이대역
이대역에서 이대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줄임말입니다. 말 그대로 이화여자대학교(이하 이대로 표기)로 가는 가장 가까운 역이라는 소리죠. 2호선 서울대입구역처럼 서울대에서 한참 떨어져 있지 않고, 내리막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이대 정문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대를 가기 위해 이 역을 방문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20대 초중반 내내 다녔던 대학교를 가기 위해 이 역을 경유 했습니다. 처음 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신촌역이 가장 가까운 줄 알았지만, 후에 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촌역은 정문에서 가까운 역이고 그마저도 경의중앙선 서강대역이 더 가깝습니다. 후문은 이대역이 훨씬 가깝고, 내리막길만 가면 되어서 무척 편하기도 합니다. 또한, 제가 다니는 인문대가 후문 바로 옆에 붙어있기에 저는 무조건 신촌역보다는 이대역을 선호했습니다.
이 때문에 20살 이전의 제가 생각했던 이대역의 의미는 20살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대를 가기 위해 거쳐 가는 역이 아닌 등교할 때 사용하는 역으로 말이죠. 사실 20살 이전에 사용한 경험도 없으니 제 기억 속의 이대역은 제 학교로 가는 역일 뿐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 도봉구 쪽에 위치한 경기푸른미래관(경기학사)에 살 때든 집에서 통학할 때든 대부분 저는 이대역을 이용해 학교로 향했습니다. 이대역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군대 전까지만 해도 단독주택이 가득한 언덕이었으나 군대 가기 전 재개발을 시작하여 전역 이후에는 아파트가 잔뜩 들어선 지역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재개발이 안 된 구역은 있으나 예전의 정겨운 맛은 많이 없어지고, 이제는 깔끔히 단정된 느낌이 드는 길로 변모하였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이대역 6번 출구에서 제가 다닌 대학 후문까지 다니는 버스 정류장뿐입니다.
등교할 때는 내리막길이었던 그 길은 하교할 때는 오르막길이 되었습니다. 이번 이대역 여행을 하기 위해서 이대역으로 갈때도 그 하교하던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10분을 가면 이대역 6번 출구가 나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이제 이대역 승강장으로 내려갈 차례입니다. 이대역은 역의 깊이가 깊기로 유명합니다. 2호선 중에서는 까치산역 다음으로 깊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곤 하지만, 가끔 급할 때는 계단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내려갈 때는 상관없지만, 올라올 때는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뛰다가 땀 범벅이 된 적도 무척 많았습니다.
그 긴 길을 내려와 이대역 승강장 끝의 한 벤치에 앉아 가방을 내려두고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대략 오후 5시, 출퇴근 시간은 피했고, 출퇴근과 크게 관련 있는 역도 아니라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앉아 있는 동안 제 벤치 반대쪽 끝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았다가 지나갔고, 몇 편의 열차가 이대역을 스쳐 갔습니다. 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을 때쯤 스크린 도어에 붙은 이색의 시조가 보였습니다.
흰 눈이 가득한 골짜기
이색
흰 눈이 가득한 골짜기
구름도 험하구나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을까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매화를 찾아 흰 눈이 가득한 험한 골짜기로 갔으나 길을 잃어버린 위기의 상황이 표현된 시조입니다. 현재 상황은 위험하나 매화가 피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이제 곧 봄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죠. 겨울과 봄의 경계 그 어느 사이를 표현한 시조처럼 날씨는 점점 따뜻해져 이제는 햇빛 아래에서는 두꺼운 옷을 입기에는 부담스러운 날씨가 되었습니다. 다만 햇빛이 비치지 않는 지하에 있는 이대역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비껴 나간 듯한 이곳에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이대역 주변에 남은 정겨운 골목길들도 좀 있으면 재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슬퍼지더군요. 하지만, 패션의 중심거리였던 이대 패션거리도 이제 점점 사라져가는 마당에 과거를 붙잡고 슬퍼하고만 있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세상은 점점 변해갈 것이니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했지만, 역을 둘러보니 시간의 흐름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있지도 않았을 구호용품 보관함이나 근래에 많이 생긴 임산부들을 배려하는 마크들이 그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하철에서 생긴 문제점을 천천히 고쳐나간 것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가방을 멨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땀나게 뛰던 대학생은 사라졌습니다. 이젠 이대역을 뛰어 올라가기에는 숨이 너무 찬 백수 한 명이 승강장 위에 그저 서 있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바빠서 계속 뛰느라 역 한 번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가만히 역에서 30분 동안 앉아 지나간 일들을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여유라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것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과거에 멈춰 있는다면 그 어떤 문제점도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이대역을 돌아보며 잠시 멈춰두었던 저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되돌렸습니다. 여행을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나아가는 제 앞에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멈춘 역에서 벗어나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저는 나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