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역(2호선 전철)
그렇게 따뜻했던 낮이 거짓이라는 듯, 해가 진 후의 서울은 꽤 추웠습니다. 이미 오후 아홉 시가 넘은 밤. 피곤했지만, 또 하나의 여행을 하려 고시원 밖으로 나왔습니다. 학교 옆을 돌아 정문 근처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큰 건물들이 서 있는 신촌 로터리가 나옵니다. 특히 이마트와 현대백화점이 위치한 왼쪽은 무척 화려한 느낌이 듭니다. 이마트는 꽤 자주 갔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인지라 현대백화점은 화장실을 이용하러 딱 한 번 들어가 봤습니다. 아, 신촌역 끝으로 연결된 연결통로에 있는 백화점 상점들은 자주 스쳐 지나가긴 했습니다. 비 오는 날 신촌까지 편히 가려면 그만한 연결통로가 없죠. 빨간 잠망경, 줄여서 빨잠이라 부르는 신촌의 중심 광장까지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신촌에 약속이 있어 신촌역을 방문하던 평소와 달리 신촌역을 여행하려 방문했습니다.
퇴근 시간도 아니고 술 먹고 집에 가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 신촌역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상의 신촌 거리에는 이제야 코로나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리게 된 많은 청춘이 술을 마시고 떠들며 오늘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그 밝고 화려한 거리를 상상하며 저는 벤치 옆에 가방을 내려두고 앉았습니다. 앉자마자 문득 수강신청을 하던 날 학교를 처음 방문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인생에서 두 번째 방문하는 신촌역을 두리번거리며 서강대로 가는 입구를 찾아 천천히 올라가던 날. 그때만큼 설레고 긴장되던 날이 인생에 몇 번 올까 싶은 날. 그날이 오산 이후 저의 첫 번째 새로운 마을(新村)이 되어 준 신촌과 제대로 대면한 첫날이었습니다.
주변을 잘 모르고 놀아줄 친구들이 많던 1·2학년 때는 마냥 신촌이 좋은 줄 알고 신촌 주변에서 놀았습니다. 특히, 1학년 1학기 때는 아예 연세대학교 옆에 고시원을 잡아 서강대 근처에서 술 먹는 것보다 신촌 주변에서 술 먹는 것을 훨씬 선호했습니다. 장소가 조금 협소한 서강대 주변의 술집과는 달리 신촌의 술집들은 장소가 꽤 컸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과 술을 먹기에는 신촌이 무조건 좋았죠. 그래서 이제는 색바랜 느낌이 드는 1학년의 즐거운 추억들은 대부분 신촌, 그리고 신촌역과 관련된 것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던 신촌역이 익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술 먹으면 금방 친해진다던가요? 거의 매일같이 술을 먹고 방문하는데 신촌역이랑 안 친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술을 먹고 친구들을 배웅해주기를 몇 번, 하루는 적당한 밤에 보내기도 하고, 하루는 낮에 술 먹고 보내기도 하고, 또 다른 하루는 밤새고 새벽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신촌역은 친구들을 배웅하는 역뿐 아니라 학교에서 신촌으로 이어지는 빠른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려면 로터리를 건너가야 했는데 로터리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3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가거나 조금 돌아서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했기에 그냥 지하로 내려가 한 번에 로터리를 건널 수 있는 신촌역을 자주 이용하고는 했습니다. 술 취한 상태로 정신 바짝 차리고 천천히 신촌역을 터벅터벅 걷던 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역 주변을 살펴보는데 <금강의 새벽>이라는 제목의 시가 보였습니다. “몇 겁의 시간을 흘러 새벽을 흔들고 있는 금강”으로 시작하는 그 시를 보며 저는 ‘몇 병의 술을 먹으며 새벽을 흔들고 있는 신촌역’이라는 글귀를 떠올렸습니다. 그 글귀를 떠올리며 ‘내 삶에서 술과 신촌은 떼어 놓을 수 없나?’ 생각하는데 문득 처음 신촌을 방문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술과는 전혀 관련 없던 중학생. 수학 과외를 해주던 연세대 선생님을 따라 연세대를 방문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연세대 구경 좀 하고 돈까스만 먹고 집으로 돌아왔었습니다. 신촌역은 이제 제게 있어 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장소인데 첫 만남은 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왠지 웃기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때 이후로 20대가 되도록 신촌을 방문한 적이 없으니 제 삶에서 술과 연결지어 신촌역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촌 거리는 술로 끝나지만, 신촌역은 그저 술을 마시기 전의 설렘과 술을 마실 때의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친구들을 보내고 난 후의 허무함, 혹은 제가 집으로 향할 때의 씁쓸함을 같이 담고 있죠. 하지만, 술자리의 소란스러움과 즐거움이 끝나고 난 후의 고요함과 편안함도 신촌역은 담고 있습니다. 이제 하루를 끝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니까요. 그 누구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편하게 집으로 향하는 순간의 저는 늘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을 모두 담아 둔 신촌역은 정말 정이 많이 든 역이기도 합니다. 그 정에는 늘 은은한 술 내음이 포함되어 있었죠. 그 감정들과 향기가 오래도록 제가 기억할 신촌역의 이미지입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신촌역의 사람들은 조금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해 친구들과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과거의 저와 제 친구들을 보는 것 같아 잠시 쳐다보다가 미래에도 친구들과 몇 번은 저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신촌역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미안, 그래도 부탁할게. 늘 술 취한 나를 집으로 잘 보내줘. 다음에 또 보자,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