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축적

이촌역

by baekja

한 역을 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내가 여행하는 역들은 내가 자주 다닌 곳이고 주변을 꽤 돌아다닌 역들이라 여러 개의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촌역은 다릅니다. 딱 한 가지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저에게 있어 이촌역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이고 국립중앙박물관하면 이촌역입니다.


이촌역이 만들어진 것은 1978년 경원선으로 개통되면서입니다. 경원선은 서울에서 북한의 강원도 원산까지 가는 노선으로 이제 그 끝은 가볼 수 없는 노선이지만, 일부만 개통되었습니다. 기차는 다니지 않고 지금은 그 철로로 경의중앙선 전철이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촌역의 경의중앙선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었고, 이촌역을 처음 방문할 때부터 자주 이용했던 노선은 4호선이었습니다. 이번 여행도 4호선을 타고 이촌역으로 왔습니다. 도착한 시간은 애매한 평일 오후. 주말이라면 방문객이라도 더러 있었을 테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역에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늘한 지하의 공기를 느끼며 이번에도 구석의 벤치에 일단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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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앉아 처음 떠올린 것은 이촌역을 처음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세워진 것은 2005년이나 제가 처음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2008년입니다. 한 그룹에서 단체로 대형버스를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했습니다. 상설 전시를 보지는 않았고, 바로 기획전시실에 들어가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특별전을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 관람하고 나서는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족 행사가 있어서 근처에 남았습니다. 시간이 남은 김에 상설 전시실을 둘러보는데 그렇게 큰 박물관이 있다니! 별천지가 따로 없었죠. 막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제게 유명한 유물들이 가득한 국립중앙박물관은 무척 신기한 놀이터였습니다. 그렇게 맘껏 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처음 이촌역 4호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2008년의 여름. 그것이 저와 이촌역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갔고, 군 전역 이후에는 1년에 6번은 방문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역사와 미술사를 참 좋아하는 제게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이촌역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지금이나 그때나 이촌역의 인상은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 SKT 5G Wibro 기기가 설치된 것이 승강장 내의 큰 차이라면 큰 차이겠습니다. 물론 이런 자잘한 변화 말고도 하나의 큰 변화가 있기는 했습니다. 원래 이촌역에서 박물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2번 출구로 나가 조금 걸어가야 했는데 이촌역에서 박물관 바로 앞까지 이어주는 무빙워크가 생긴 것이죠. 이름은 박물관 나들길이고, 벽면에는 LED로 유명 유물들을 표현했고, 음악으로는 <아름다운 나라>가 재생됩니다. 벌써 박물관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확실히 주죠. 더운 여름 박물관을 갈 때마다 이 나들길 덕분에 얼마나 편하게 가는지 모릅니다.


Wifi가 설치되고 나들길이 설치되는 등 역이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조금씩이라도 변화해왔다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포함한 삶을 담아 그대로 멈추어 있습니다. 현재까지 남은 누군가의 삶을 담은 과거의 물건들은 미적, 학술적 분석의 대상을 넘어 거룩함마저 느껴집니다. 일상용품이든 사치품이든 무기든 미술품이든 그걸 만들어낸 사람들의 마음은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하나였습니다. 오래도록 이 물품이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은 사용한 사람들의 삶과 함께 유물에 담아져 현재의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습니다.


이촌역이 이처럼 현재를 의미하고 박물관이 과거를 의미한다면 나들길은 이 시간을 연결하기 위한 역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존재할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현재를 넘어 과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제가 앉아있던 4호선의 이촌역은 1985년 개통했습니다. 제 그리 길지 않은 삶에 비교하면 현재가 아닌 아주 오래전의 과거입니다. 아마 변하지 않았을 승강장의 바닥이 이 시간을 담고 있을 겁니다. 30년 이상을 이 자리를 지킨 이촌역의 역사(驛舍)는 나들길과 박물관을 빼고도 이미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나의 장소가 됩니다. 박물관으로 사람을 나르는 역은 이미 그 자체의 역사만으로 쌓여온 시간의 묵직함을 내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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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 담은 한반도의 시간, 이촌역이 담은 그 주변의 시간, 이촌역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쌓인 저의 시간까지 시간들이 켜켜이 쌓인 이촌역의 오후는 고요했습니다. 고요한 중후함을 느끼며 저는 일어섰습니다. 열차가 한 대씩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쌓일 이촌역의 시간을 맘에 담고, 그 시간 위에 올라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후에 조금 더 쌓여있을 박물관과 이촌역, 저의 시간을 기대하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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