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지만, 친숙한

공덕역

by baekja

1학년 때 고시원을 구할 때는 연대 쪽에 구했지만, 군 전역 이후로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기 싫어 대흥역과 공덕역 사이에 고시원을 구했습니다. 고시원이 대체로 대흥역과 공덕역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다 보니 5호선을 탈 때는 공덕역까지 걸어가서 타곤 했습니다. 공덕역을 여행하러 갈 때도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고시원을 나와 걸어갔습니다. 출근 시간은 지났지만, 오전이라 차들과 사람들이 꽤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침이라 서늘했지만, 햇빛 있는 곳은 따뜻하여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10분여를 걸어 공덕역으로 들어갔습니다.


공덕역은 5호선, 6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철도 등 총 4개의 지하철 노선이 다닙니다. 5호선과 6호선이 붙어있고, 연결통로를 한참 걸어가면 경의중앙선, 공항철도가 붙어있습니다. 가끔은 공덕역이 두 개의 역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죠. 제가 자주 이용하는 것은 5호선과 6호선입니다. 다만, 6호선은 대흥에서 타면 되니 공덕역에서 주로 이용하는 것은 5호선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별 고민을 하지 않고 5호선 쪽으로 내려가 개찰구를 지나 벤치에 앉았습니다. 습관처럼 내딛는 이 발걸음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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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 사는 곳은 연대 근처였고, 자연히 학교에서 발걸음은 신촌역 쪽으로 향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타왔던, 1~4호선과 달리 5~8호선은 친숙한 노선이 아니었기에 무언가 꺼려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5호선이나 6호선을 타면 가깝게 갈 수 있는 곳들도 굳이 신촌역을 이용해서 환승해서 가곤 했습니다. 공덕역을 조금이나마 친숙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1학년 여름방학 즈음이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 많은 이들이 동아리 한 개쯤은 들기 마련입니다. 저는 풍물패를 동아리로 들었습니다. 풍물패에서 맡은 역할은 상모를 돌리며 소고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상모를 동아리에서 지원해주지는 않다 보니 상모를 사야 했습니다. 상모는 국악사에서 팔고 국악사는 종로3가에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2호선을 타고 가서 을지로 3가에서 갈아탔을 테지만, 선배와 동기가 같이 가니 5호선을 타고 종로3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편하더군요. 이제부터는 종로3가 쪽을 갈 때 5호선을 타야겠다 싶었습니다. 굳이 2호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가던 제가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 공덕은 어색한 역이 아닌 친숙한 역이 되었고, 제가 자주 이용하는 역이 되었습니다.


제가 자주 이용하는 것만큼 공덕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아침이었지만, 5호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꽤 있는 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4개의 노선이 겹치는 곳이다 보니 사람이 많은 것도 있겠지만, 공덕 로터리가 꽤 발달하고 큰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겁니다. 커다란 에스오일 본사가 공덕에 있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요. 20살 이전에 공덕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높은 빌딩이 가득한 로터리,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공덕의 이미지이지만, 정작 제게 크게 다가오는 공덕역의 이미지는 따로 없습니다. 많이 이용하고 공덕 주변의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는 했어도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벤치에 앉아 가만히 제가 무얼 하러 공덕역에 왔는지를 떠올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신촌 로터리를 지나기 위해 신촌역을 지하 연결통로로 쓰는 것처럼 공덕 로터리를 지나기 위해 공덕역은 지하 연결통로로 자주 사용하곤 했습니다. 공덕 이마트를 방문한다든가 족발 먹으러 공덕시장을 간다든가 산책하러 효창공원으로 넘어간다든가 할 때 모두 연결통로로 공덕역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군 전역 이후 신촌에 이마트가 생기고 나서는 이런 이미지도 더욱 없어져 친숙하지만 애매한 이미지가 공덕역에 생겨버렸습니다. 그쯤 생각하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냐는 사고방식으로 굳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게 편안함을 주는 친숙한 역이면 그만이지요.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주변을 다시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편안히 앉아서 여행을 즐기는 저와는 달리 시간에 쫓겨 보였습니다. 현대인들의 바쁨이란. 그리고 현대인들이 가진 무채색의 감정을 계속 받아내는 공덕역은 무척 힘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이동시킨다는 역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지만, 역이 이동시키는 사람들의 얼굴은 꽤 어두워 보였으니까요. 웃음 하나 없는 공덕역을 변화시킨 것은 갑자기 승강장에 나타난 한 어린아이였습니다. 굳은 얼굴의 어른들 사이에서 혼자 꺄르르 웃는 아이는 갑자기 역에 색채를 불어넣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 열차를 타고 떠났지만, 그 아이가 준 온기는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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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기를 가지고 마음에 좀 더 여유를 두며 이쪽저쪽을 쳐다보다 뒤를 돌아 반대편 스크린도어를 쳐다보니 시민공모작 시가 하나 보였습니다.



부스럭부스럭


이남순


아이나 어른이나

부스럭 소리엔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뜬다


부스럭 소리엔

맛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애써서 깨우지 않아도

애써서 일으키지 않아도


부스럭부스럭 소리는

맛난 주전부리가

나를 부른다는 소리인 듯

순간 행복하다



시는 부스럭부스럭 소리에 담긴 일상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평범하고 딱딱한 일상 속 부스럭부스럭 소리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이 무척 따뜻해 읽는 저도 행복해졌습니다. 공덕역이 제겐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이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시장에서 족발을 먹으며 친구들과 떠들며, 5호선을 타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사소한 행복들이 가득 모인 곳. 이러한 사소한 행복들이 모여 있으니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역이지만, 무척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 제가 생각하는 공덕역은 친숙하지만, 애매한 일상 같은 행복을 전달해주는 역이었습니다. 공덕역의 따뜻함을 이렇게 확인하고 저는 미련 없이 공덕역에서의 여행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들떴지만, 안정된 발걸음으로 공덕역을 천천히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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