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역은 서울의 지하철역 중 가장 최근에 인연을 쌓은 역입니다. 관심을 가질만한 곳에 있는 역도 아니고, 자주 오는 역도 아니며, 환승역으로도 자주 쓰는 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앞에서 천천히 걸어서 50분이면 충분히 닿는 가까운 거리의 이 역은, 이름만 자주 들어 알고 있을 뿐 그 면면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 인생에 하등 끼어들 일이 없어 보였던 이 역과 최근 인연을 쌓게 된 것은 교보문고가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꿈을 꿉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을 갖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다.’와 같은 것들을 말이죠. 저도 그런 많은 꿈을 가진 아이 중 하나였습니다. 빛나는 다양한 꿈 중 하나는 서점 직원이었습니다. 책을 주문해서 보관해두다가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어느 날은 책을 보다가 같은 책을 보는 손님과 이야기하는 소박하지만, 풍족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 꿈을 이루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쉬이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짧고 굵게 현실과 타협해보기로 했습니다. 책이 있는 곳에서 책과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한 번 이뤄보기로 했죠. 그래서 깔끔하게 교보문고에 지원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교보문고는 신논현역 옆의 강남점이고,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광화문역과 연결된 광화문점입니다. 그 외의 교보문고는 잘 상상해보지도 않았고, 갈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사실 이 근처 살면서 합정에 교보문고가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알바구인사이트에서 교보문고를 찾다가 처음 알게 되었죠. 합정역 8번 출구 옆 연결통로를 통해 교보문고 합정점으로 들어가는 길은 떨렸습니다. 자주 가봤던 교보문고라고는 하지만, 그건 고객으로서였지 면접자로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했지만, 일찍 도착해서 새로운 장소를 이곳저곳 살펴보는 습관 덕분에 면접은 어렵지 않게 붙을 수 있었고, 제 첫 직장으로 교보문고가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알바는 몇 개 해보았습니다. 야간 편의점이라든가 택배 상하차라든가. 하지만, 일주일에 5일 7시간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규칙적으로 가서 하는 알바는 처음이었습니다. 알바긴 했지만, 직장을 다니는 느낌이긴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천천히 어렵지 않게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교보문고는 떨어진 두 구역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나 월요일이면 주말에 안 들어온 책이 몰려 들어온다는 것, 연말이나 방학 기간에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까지. 7개월을 다니면서 하나씩 하나씩 익숙해졌고, 친숙해졌습니다. 실수도 해보았고, 회식도 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상도 만났고, 정말 좋은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런 많은 삶과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책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딜 가든 책이 있었고, 매일 새로운 책이 들어왔으며, 매일 책이 나갔습니다. 애착을 가지고 전혀 모르는 책을 바라본다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익숙해졌습니다. 표지와 디자인만 보아도 애정을 주는 책들이 생기는 새로운 경험은 아마 서점 직원으로 조금이나마 일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이겠지요.
아쉬운 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주에 비견될지 모르는 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적은 책이 상품으로 취급된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평생 책을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저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별들이 계속 태어나고 은하가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책은 계속 발행됩니다. 하지만, 우주는 계속 팽창하는데 비해 서가의 수는 늘어나지 않습니다. 책들이 빠져나갈 시간입니다. 안 팔리는 책들. 미회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하나씩 빠져나가 창고로 되돌아갑니다. 제가 애착을 주었던 몇몇 책들 또한 보입니다. 내용의 좋음과 나쁨, 책 자체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떠나 매상의 좋음과 나쁨으로 책의 진열이 갈리는 것은 냉혹하지만, 어쩌면 당연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책과 함께 있는 것은 분명 제게 즐겁고 좋은 일이었지만, 돈을 받으며 일정한 일만 하다 보니 안주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주하는 삶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안주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좋았던 첫 직장을 관두고 나왔습니다. 계약직을 관두고 나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정이 많이 쌓여 힘들었습니다. 마지막 출근날 가끔은 정말 지겹고 오기 싫던 6호선 합정역 승강장에 내려 지나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쉽다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 가득하더군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생각을 털어내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던 마지막을 보내고 나니 다시 합정역에 올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때는 잠시 서 있었지만, 이번에는 6호선 승강장에 앉아 가장 최근의 과거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습니다. 나의 첫 직장, 다양한 사회적 경험, 몇 발자국만 앞으로 가면 나는 책 내음, 차디찬 박스들에 실려 오던 새 책들. 그 모든 경험과 감각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후에 교보문고 합정점이 사라져버린다 해도 합정역이 있는 한 땀을 흘리며 책을 만지고, 책의 곁에서 일만 해도 행복해하던 내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에 가장 가까운 이 이야기들이 점차 바래져 과거로 간다 하더라도 저의 출근길에 늘 함께했던 합정역은 그 이야기를 기억해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