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들 사이를 여행하는 이번 글의 시작은 오산역이었습니다. 제 삶에서 늘 출발지이자 종착지였던 곳. 마지막은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충남으로 내려갑니다. 신도림역에서 급행을 타고 1시간 20분여를 달려 도착한 역, 천안역이었습니다.
천안역은 무척 조용했습니다.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잔뜩 다니는 천안역은 제법 큰 역입니다. KTX가 다니지는 않지만, 낮에는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다양한 기차 덕에 쉴 틈이 없는 역이죠. 대합실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이 역의 밤 10시 즈음은 무척 조용했습니다. 기차와 1호선이 거의 들어오지 않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텅 빈 승강장들. 그저 일자로 늘어서기만 해 있을 뿐인 역사의 승강장들은 침묵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짙게 내려앉은 승강장들의 어둠 구석구석을 역의 불빛들이 파고들었고, 그 너머에는 발달한 천안 시내의 네온사인이 반짝였습니다.
하행 승강장에서 내려 상행 승강장으로 가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여행을 가던 무수히 많은 날을 떠올렸습니다. 오산역에는 기차가 서긴 하지만, 많은 수의 기차가 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차를 탈 때는 대부분 다른 역을 이용해야 합니다. 기차 여행을 갈 때는 전부 하행선을 이용하기에 오산역의 위에 있는 수원역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그럼 대부분 무궁화호를 이용해 여행을 가는 저는 평택역이나 천안역을 이용하게 됩니다. 평택역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1호선이 기차보다 운임이 압도적으로 싸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1호선을 타고 멀리 내려가는 거죠. 그런 이유로 저는 늘 여행의 시작을 천안역과 함께했습니다.
계단을 다 올라오자 대합실이 눈에 보였습니다. 몇 년째 던킨 도너츠에서 변할 줄 모르는 대합실. 기억 속에서 천안역과 처음 마주했던 것은 이 대합실이었습니다. 저는 공주에서 기숙사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공주 시내로 가는 길과 천안 시내로 가는 길. 공주 시내로 갈 경우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시외버스의 간격이 길고, 학교 자체가 공주의 북쪽에 있다 보니 돌아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천안 시내로 갈 때는 천안종합버스터미널에서 꽤 긴 거리를 걸어 천안역으로 간 다음 1호선을 타야 했지만, 돌아가지 않아 조금 빠른 편이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집과 학교를 오가는 동안 천안역 앞은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대합실 건너편에는 다른 대합실이 있습니다. 다수의 기차는 그 대합실과 연결된 승강장에서 탑니다. 늘 여행을 시작할 때는 그곳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술만 마시던 1, 2학년과 군대 시절이 지나고 저는 혼자 여행을 자주 떠나게 되었습니다. 화장실이 있고 몸을 움직이기 편하여 저는 늘 기차를 선호했고, 기차를 처음 타는 곳은 늘 천안역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천안역에 도착하여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잠시 짐을 풀고 옆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는 것은 제 여행에서 하나의 의례처럼 되었습니다. 무거운 가방, 기대 혹은 설렘 여행의 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천안역과 함께였습니다
대합실 너머 출구로 나가면 택시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 택시를 거의 타본 적 없지만, 딱 한 번 집으로 가는 오산까지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1호선을 탈 때 오산역은 무척 애매해집니다. 병점역보다 아래에 있어 서울에서 아래로 오는 병점행이나 서동탄행을 탈 수가 없습니다. 고작 세 정류장 때문에 늘 천안행이나 신창행을 타야 합니다. 술을 먹고 천안행 막차를 타고 집에 오던 날. 깜박 졸고 일어나니 천안이더군요. 12시. 찜질방을 가서 한숨 자고 내일 가는 게 더 좋은 선택이었겠지만, 저한테 무슨 정신이 있었을까요? 일어나서 바로 택시를 잡았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다시는 술에 죽은 채로 천안행을 안 타게 되었습니다.
천안역 안쪽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렸습니다. 상행선 승강장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와 끝쪽으로 가 밤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앉아 생각했습니다. 여행의 끝. 늘 여행의 마지막은 이 승강장이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여행지를 전전하다 끝내 마주친 친숙한 곳. 집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새로움이 끝나고 일상으로 향해가는 관문. 늘 기차 여행의 마지막은 이곳이었습니다. 이번 지하철 여행의 마지막도 이 승강장이 되었습니다. 28개의 역, 그 역들의 모습과 이야기, 그리고 그 역들과 늘 같이 있던 나의 마지막. 마지막 30분이 끝나고 저를 다시 오산으로 데려다줄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밝은 빛이 가득한 열차. 열차 앞에 서서 잠시 뒤를 돌아봤습니다. 조용한 천안역. 여운이 남는 고요한 어둠을 잠시 보다가 그대로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문이 닫혔고, 여행도 끝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