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乾淸宮), 향원정(香遠亭)
수도권에서 계속 살아왔고, 서울을 꾸준히 방문했으며, 20대 이후로는 서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저는 서울 곳곳에 제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경의선 책거리 옆 독립서점인 책방연희,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 등등. 이런 여러 장소들 중에도 제가 가장 먼저 이곳을 저만의 쉼터로 지정해야겠다고 생각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건청궁과 향원정이죠. 이제 그곳으로 갑니다.
자경전의 동편으로 나와 조금 걸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린 것이 오늘 해를 보여줄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향원정을 따라 난 곡선의 길을 쭉 걷는 동안 오른쪽은 제 키보다 큰 개나리들이 제 시야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른 봄이면 이곳을 늘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개나리, 원래 저는 개나리가 언제 피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4월이 다 지나가던 스무 살의 봄, 꽃놀이나 하자며 친구들을 경복궁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4월이 다 지나가니 개나리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진달래도 없었죠. 친구들은 약간 실망한 기색이 있었지만, 다행히 철쭉이 피는 철이어서 친구들은 만족해했습니다. 철쭉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스무 살이 지나고 지금, 저는 개나리가 언제 피는지 이제는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매화가 이미 오고, 벚꽃이 오기 직전 그 즈음 개나리가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제가 개화시기를 어렴풋이 대부분 알게 되기까지 참 많은 봄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란색이 보이지 않는 여름의 개나리는 꽃을 피울 다음 봄을 기다리며 푸른 잎만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개나리 너머로는 제가 경복궁에서 가장 싫어하는 공간이 등장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죠. 정확히는 국립민속박물관을 싫어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이 싫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만들어진 현 국립민속박물관은 건축 자체에 문화재의 모방을 권고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공모했습니다. 창의성은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설계 공모에 많은 유명 건축가들은 공모에 참여하지 않았고, 결국 여러 문화재를 합친 괴상망측한 건물 하나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 난간을 섞어 만든 이 건축물은 보고만 있어도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원래 경복궁의 선원전(璿源殿,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셔놓은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이상한 건축물이 있으니 더욱 좋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이 몰개성한 건축물은 2030년까지 철거하여 세종으로 이전한다고 하니 사진으로만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겁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눈길을 돌려 길을 좀 더 걸으니 짙은 녹색의 병풍 사이로 연못이 하나 보입니다. 향원지(香遠池)입니다. 향원정은 그 향원지의 가운데 인공섬에 세워진 경회루가 장중하고 엄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향원정은 소박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출품 소재로 가장 많이 쓰였을 만큼 오래 전부터 아름다움을 인정받아온 이곳은 경복궁을 지나는 많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듭니다. 저 또한 늘 향원정 앞에 서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경복궁의 이런저런 사연과 정보들은 잊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곤 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향원정의 이름은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있는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뜻은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의미지요. 흔히 연꽃은 불교를 뜻하는 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유교에서도 연꽃을 좋아했습니다. 진흙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을 보며 주변 환경이 더러워도 아름다움과 좋은 향기를 풍기는 것이 군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연꽃처럼 피어난 향원정의 향기는 궁궐 곳곳으로 풍깁니다. 하지만, 이 향기에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연못이 가로막고 있죠. 이를 연못을 건너가 향기의 근원을 찾으려면 취향교(醉香橋)를 건너야 합니다. 향기에 취해 건너는 다리, 갈수록 맑아지는 향기에 취해 정신없이 다리를 건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름에 담긴 은유마저 은은하게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향원정과 취향교입니다.
한국전쟁 때 취향교가 무너지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자그마한 다리를 앞에 향원정의 남쪽에 세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잘못된 복원으로 당시의 눈으로 보기에 이게 가장 좋겠다 싶어서 세운 것일 겁니다. 최근에 이를 바꾸는 공사를 하여 조그만 다리는 사라지고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하얀색의 커다란 다리가 생겼습니다. 최근에 만든 거라 너무 번쩍번쩍하여 위화감이 듭니다. 어렸을 적부터 제가 보아왔던 다리는 남쪽의 자그마한 다리인데 말이죠. 기억도 나기 전, 어머니와 방문했던 경복궁에서 제가 봤던 향원정의 다리도 그 남쪽의 다리였습니다. 지금 향원정의 정면 사진에서 보면 그 다리가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20년 가까이 보아온 다리가 바뀌니 원래의 취향교가 어색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20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취향교가 제 눈에 익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 날이 와야 아마 저는 진심으로 건청궁에 살며 향원정을 바라보았던 당시 고종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향원정의 취향교는 건청궁으로 향합니다. 제 발길도 자연히 건청궁으로 향했습니다. 건청궁이 복원된 것은 2007년으로 최근의 일이나 제 기억에 남은 경복궁 첫 방문이 2008년이니 건청궁은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없는 것까지는 속일 수 없죠. 단청도 되어있지 않은 건청궁은 세월을 맞은 고택이 아니라 갓 만들어진 새로운 한옥처럼 보입니다. 다른 전각들과 달리 단청을 안 했다는 점에서 고종이 이곳을 무척 편히 느끼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음이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청궁은 고종의 개인 사비인 내탕금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건청(乾淸)’은 ‘하늘은 맑다.’라는 뜻입니다. 궁궐 안에 지은 자신만의 궁궐에 붙인 이름처럼 이제 자신의 미래가 맑기를 바랐을 겁니다.
건청궁은 서양 문물로 인해 급격히 변해가는 시대를 따라가려는 고종의 노력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을 겪으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겠죠. 그래서 1883년(고종 21)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을 통해 들은 전깃불이야기를 듣고, 이를 조선에도 설치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후 고종은 에디슨 전등회사(現 GENERAL ELECTRIC)에 전기등 설비를 발주하였고, 에디슨 전등회사에서는 건청궁과 향원정 주변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발전 시설과 가로등을 시공하게 되었습니다. 발전 설비는 향원정의 물을 이용한 화력발전이었습니다. 1879년 에디슨의 탄소선 전구 발명 뒤로 1887년(고종25)에 들여왔으니 고종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최신식 시설은 설치했으나 이를 관리하고 발전시킬 기술력은 당시 조선에 전무했습니다. 서양문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당시 조선의 상층부와 고종의 한계였죠. 그래서 설치한 후 생기는 문제점들은 전등에 대한 몇몇 부정적 인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계속 갈아줘야 하는 전등과 전등의 엄청난 가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전등을 문제만 일으킨다며 ‘건달불’로 불렀습니다. 발전기 때문에 연못의 온도가 올라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여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며, 발전기의 큰 소리 때문에 궁녀들은 잠을 들지 못하여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몇 년 후 건청궁에서 벌어질 비극에 비하면 스쳐 지나가는 재밌는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건청궁에서 벌어진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고종33)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적어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죠. 을미사변은 친일을 견제하여 친러를 활용한 눈엣가시같은 명성황후를 없애기 위해 벌어진 일입니다. 위의 내용 정도만 을미사변에 대해 알고 있던 저는 도대체 어떻게 궁내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일본 낭인들이 궁궐 깊은 곳에 자리한 건청궁까지 들어갔는지 궁금했습니다. 조금 찾아보니 당연히 내통자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협력으로 만든 신식군대인 훈련대의 제2대대장인 우범선이 바로 그였습니다. 당시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와 더불어 을미사변을 공동으로 계획한 사람이죠.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인 것이 아니라 조선 내의 내분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궁궐로 들여보내겠다는 명목으로 을미사변 당시 궁궐 주변을 지키던 시위대를 훈련대로 막아서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낭인들이 궁궐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이런 우범선과 휘하 훈련대의 활약(?) 덕에 일본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명성황후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을미사변의 내용은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이시즈카 에조가 쓴 <에조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가 머무는 ‘곤녕합(坤寧閤)’에 들이닥쳐 곤녕합 마당으로 명성황후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내려와 명성황후의 배를 칼로 마구 찌른 채로 자위와 강간을 했다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신을 건청궁 동편의 녹산에서 불태워 증거를 인멸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건청궁에 관문각에 있던 서양인들에게 목격되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내용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면서 민심 또한 일본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일본이 완전히 잃게 된 것이죠. 이때 이후로 친일파의 다수는 백성들의 돌팔매질에 당하거나 암살당하고,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우범선은 1903년 암살당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우범선의 아들인 우장춘은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차별을 견디며 공부한 끝에 조국에 농업에 도움이 될 만한 종자를 알려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건청궁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은 이제 역사 속 한 장면이 되었고, 건청궁은 평범하고 밝은 커다란 한옥 건물로만 보입니다. 곤녕합을 둘러싼 행각의 툇마루는 제 쉼터가 되었습니다. 한옥의 처마가 주는 그늘 밑에서 잠시 앉아 있으면 그것만큼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없는 시간 대 경복궁 모퉁이인 건청궁의 모퉁이, 행각의 툇마루는 늘 서서 떠돌아다니는 제 삶에 등 대고 쉴 곳이 되어줍니다. 흐린 그날도 잠시 툇마루에 앉아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습니다.
건청궁에서 편안함을 주는 휴식처는 행각의 툇마루지만,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이곳이 아닙니다. 벚꽃 다 지고 피는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관문각(건청궁에 있던 서양식 건물) 터를 돌아 장안당으로 들어서 그 마루 앞에 서보아야 합니다. 마루에 앉을 수는 없지만, 잠시 그 마루 앞 돌계단에 앉아 앞을 보면 향원정과 취향교의 아름다운 모습이 제 답답한 가슴마저 뻥 뚫어줍니다. 여름이라 나뭇잎에 가려 그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봄이나 가을만 되어도 그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돌계단에 앉아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로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시대, 시름을 잠시나마 잊고자 했던 고종의 마음이 그려지는 듯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