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문(敦化門), 진선문(進善門)
돈화문 옆에 서서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저 멀리 터널이 두 개가 보입니다. 율곡로 지하화 사업으로 만들어진 터널인데 이 터널을 만든 이유는 원래 연결되어 있었던 종묘와 창덕궁 간의 통로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지금 완성은 되었지만, 이곳은 아직 궁궐담장길이라는 산책로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종묘와 창덕궁의 통합 관람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언젠가 창덕궁에서 종묘로 넘어가는 그 길을 맛볼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이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돈화문 서쪽에 있는 창덕궁 종합관람지원센터 앞에 섭니다. 사실 당시 저는 표를 살 이유가 없습니다.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돈화문의 입구에서 주민등록증만 찍고 지나가면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후원 표를 사기 위해서는 종합관람지원센터를 들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수요일 아침 11시, 저는 후원 12시 표를 구매하였습니다. 이제 창덕궁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났습니다. 관람지원센터를 나와 돈화문 앞에 섭니다.
돈화문 앞에는 복원된 월대(月臺)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달이 비추는 무대’라는 뜻을 가진 무대는 궁궐 권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경복궁에서도 계속 봤죠. 다만, 이곳은 궁궐 안의 무대가 아닌 궁궐 밖의 무대이기 때문에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과거시험 합격자의 방(榜)이 여기 걸렸고, 중국 사신을 위한 축하 공연으로 산대놀이(탈을 쓰고 큰길가나 빈터에 만든 무대에서 하는 복합적인 구성의 탈놀음)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기근이 심할 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행사도 했습니다. 광장과 같은 조선시대 공식적인 행사의 장이었던 곳입니다.
지금 광화문 앞의 월대는 복원 중이지만, 돈화문 앞의 월대는 복원이 끝난 상태입니다. 원래 돈화문 앞의 월대는 흙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 순종 황제의 자동차가 문지방을 통과하기 쉽도록 묻어놓았었죠. 그 묻혀 있는 월대를 복원한 것인데 복원된 월대는 원래 도로 바로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월대의 크기를 만끽하고 역사적 상상력으로 조선시대 월대 앞을 구상해보기에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앞에 보도를 만들어 놓아 월대를 보기 쉽게 하였고, 많은 이들이 월대를 제대로 갖춘 돈화문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이 월대 앞에서 사진을 찍곤 하죠.
이제 월대의 계단을 올라옵니다. 궁궐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돈화문이 제 앞에 있습니다. 현재의 돈화문이 세워진 것은 선조 40년(1607)입니다. 물론 창덕궁이 처음 세워진 것은 이때가 아닙니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세워졌습니다. 태종이 창덕궁을 세운 것은 조선 초기 두 개의 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태종이 왕자 이방원이던 시절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 방석과 정도전을 죽이고 넷째 형 방과를 몰아낸 이 난은 태종에게 왕좌를 가져다주었지만, 경복궁에 대한 나쁜 기억 또한 함께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정종이 수도를 개경으로 옮긴 것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며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지었습니다. 당연히 신하들은 이에 대해 크게 반대했습니다. 경복궁이라는 궁궐이 있는데 창덕궁이라는 궁궐을 왜 짓냐는 것이죠. 태종은 이에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어찌 경복궁(景福宮)을 허기(虛器)로 만들어서 쓰지 않는 것이냐? 내가 태조의 개창(開創)하신 뜻을 알고, 또 지리(地理)의 설(說)이 괴탄(怪誕)한 것을 알지만,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음양(陰陽)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하니, 내가 듣고 의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무인년 규문(閨門)의 일은 내가 경들과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사신이 오는 것과 성절(聖節)의 조하(朝賀)하는 일 같은 것은 반드시 이 궁에서 하기 때문에 때로 수즙(修葺)하여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경복궁을 쓰지 않는 첫 번째 이유로 풍수지리에 맞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참 경복궁 하나를 짓기 위해서 전국의 많은 명당들을 다 고려했음을 생각하면 참 웃깁니다. 옮기기 위한 핑계를 대는 것이죠. 다만, 풍수가 좋지 않음을 말하는 근거로 무인년 규문의 일(1차 왕자의 난, 정도전과 방석을 방원이 죽인 난)을 댑니다. 그걸 일으킨 사람이 태종임을 생각하면 태종의 뻔뻔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럼 기껏 세워둔 경복궁은 안 쓰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태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조하를 하는 등의 큰 의식은 경복궁에서 계속 할 것임을 말하며 아예 궁의 용도를 나눠버렸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창덕궁은 잘 쓰이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가장 먼저 중건되었습니다. 이 창덕궁이 중건될 때 돈화문이 선조 40년(1607)에 완성되었고, 창덕궁 중건은 광해군 3년(1611)에 완료되었으니 돈화문은 궁궐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됩니다. 그 가치 덕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요. 그래서 흥례문, 광화문에서 느낄 수 없는 오랜 세월의 맛이 돈화문에서 은은히 배어나옵니다.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는 돈화문은 덕이 창성한다는 창덕궁의 정문으로 오랜 시간 자리했습니다. 돈화문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졌고, 가장 중요한 행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돈화문의 문루에서 종과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었죠. 종소리와 북소리를 모두 쳐서 알리는 정오(正午)와 종을 28번 쳐서 밤 10시에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 북을 33번 쳐서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 등 3가지 시각을 알려주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반란을 한 역도의 머리를 임금이 받는 헌부례(獻俘禮)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머리를 받은 곳이 바로 돈화문의 문루죠.
돈화문의 앞에서 이제 발걸음을 옮겨 들어갑니다. 창덕궁의 첫 공간이 넓게 펼쳐집니다. 넓게 트인 공간과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돈화문 뒤 양쪽으로 4그루 씩 늘어선 창덕궁의 회화나무들입니다. 수령이 300~4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나무들은 아름드리나무가 얼마나 보는 이들의 시선을 편안하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어렸을 때는 보물과 국보를 찾기 바빴지만, 지금은 이 나무들 곁에 서서 잠시 쉬는 것이 창덕궁을 보는 또 하나의 낙이 되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광화문 뒤 흥례문 앞 구역과 돈화문 뒤 구역은 큰 차이가 느껴집니다. 경복궁의 공간이 엄정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면 창덕궁은 편안함을 줍니다. 법도에 맞추어 칼같이 지은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산의 지세를 따라 지어 법도를 맞추되 자연에 맞게 응용을 한 궁궐이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보기 좋으라고 회화나무를 이곳에 심은 것은 아닙니다. 회화나무 자체가 궁궐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주나라 때는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외조(外朝)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어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三公)이 마주 보고 앉고, 좌우에는 각각 아홉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어 고관들이 둘러앉았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이 고사에 따라 궁궐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을 찾기 쉽지만, 우리나라에는 창덕궁이 유일합니다.
회화나무와 함께하는 넓은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 시선 너머로 궐내각사가 보입니다. 널찍한 공간의 끝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틀면 경복궁처럼 금천교가 보입니다. 돈화문과 금천교가 ‘ㄱ’자로 되어 있는 것은 경복궁과 다른 점입니다. 경복궁은 근정전에 다다르기까지 모든 문과 금천교가 일자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이것이 자연의 지세를 해치지 않고 그에 맞추어 짓는 창덕궁의 묘미입니다. 다만, 금천교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문의 축이 틀어진 것은 의도한 게 아닙니다. 복원 과정에서 잘못 복원한 것이죠.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이 공간의 사진을 보면 진선문과 금천교의 축이 일자로 되어 있는데 훨씬 어색함이 덜하고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어색한 금천교를 다시 고쳐 복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금천교가 너무 오래되어(태종 때 만든 거의 그대로) 해체하면 새 돌들을 써야하기 때문이랍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경복궁 금천교의 자랑이 천록이라면 창덕궁 금천교의 자랑은 산예(狻猊)입니다. 산예는 어떤 동물도 마주치기만 하면 도망치고 만다는 전설 속 백수(百獸)의 왕입니다. 상상 속 동물인 산예는 보통 사자의 모습을 띄고 있어 사자로 부르기도 하죠. 위엄 넘치면서도 귀여운 다리 기둥 위의 산예들을 감상하고 나면 이제 진선문(進善門)으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저는 늘 봄이면 진선문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무들이 많은 곳으로 갑니다. 매화와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어 눈길을 안 줄 수가 없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지 휴일이면 사진 한 번 찍어보겠다고 이 매화나 복사꽃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곤 합니다. 아마 봄이면 창덕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 중 하나겠지요.창덕궁을 거닐고 있던 그때는 여름이라 봄꽃들의 화사함은 볼 수 없었지만, 무궁화는 볼 수 있었습니다. 화사하지는 않아도 분홍, 붉은 빛깔이 섞인 무궁화는 고고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 짙은 녹음 사이에서 그 존재감을 강렬히 뽐내고 있었습니다.
잠시 빠졌던 발걸음을 궁궐의 축선 상으로 되돌리고 진선문 앞에 섰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궁궐의 내부입니다. 선한 말을 올리고 선한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이 있는 인정전으로 올리는 이 문은 대문(大門)이라고 불립니다. 이 안쪽부터는 궁궐의 주요 전각들이 자리한 대내(大內)지요. 진선문을 넘어 빈 공간으로 천천히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