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을 끝내 보지 못한 고독한 민족의 초인 이육사

안동

by baekja

도산서원에서 이육사문학관까지는 꽤 멉니다. 4.5km 정도 되죠. 급행 3번, 512, 513번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지만, 당최 버스 시간표를 알 수 없는 탓에 저는 그냥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냥 평지로 가는 길이면 참 편하겠지만, 산지라 그런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섞여 있었습니다. 다만, 포장은 잘 되어 있어 그냥 2차선 도로를 따라 쭉 걸어가면 됩니다. 굽이굽이 길을 천을 따라 걷는 것은 늘 편안함을 주는 일입니다. 오랜만에 얻은 좋은 산책길이라 행복하게 걷고 있는데 종종 전에 보지 못했던 밭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넝쿨이 이리저리 얽힌 나무들이 있는 밭이었는데 열매는 다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어디서 맡아 본 싱그러운 단 냄새가 희미하게 났습니다. 포도나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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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도> 中


이육사의 유명한 시 청포도의 구절입니다. 도시에서 벗어난 궁벽한 산골, 이곳에서 포도가 자라는 것을 보며 이육사는 자랐겠죠. 포도밭을 따라 1시간여를 더 걸으면 마지막 고갯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고갯길을 넘어서면 막혀있던 시계가 트이며 넓은 들판에 가득한 벼와 그 들판의 옆에서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그 낙동강을 뒤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산의 능선이 드러납니다. 가슴이 활짝 트이는 아름다운 공간. 이곳에서 시인 이육사는 살았고, 지금은 번듯하게 잘 지은 이육사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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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문학관에 처음 들어오면 흉상과 함께 그를 나타내는 4개의 숫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17, 27, 30, 44. 엄청난 의미를 가진 숫자들은 아니지만, 이육사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이육사의 삶을 따라가며 이 숫자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죠.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황의 후손들이 도산서원 근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산서원 근처에 이육사의 생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년시절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이육사의 시는 형태적으로 기·승·전·결 4단 구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만약 한학만 계속 배웠다면 근대 문학인인 이육사는 없었겠죠. 16세가 되던 1920년 봄에 결혼하여 그때부터 장인이 운영하던 영천 백학학원에 들어가 신교육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교육을 한 번 접하고 나니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져 일본과 중국에 유학하며 근대 교육기관에서 새로운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 도쿄와 중국 베이징에 유학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양과 동양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안목을 높이고 의식을 확장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에밀 졸라, 발자크, 펄벅, 앙드레 말로, 괴테, 헨리 소로우, 루쉰, 쉬즈모 등의 사상과 책을 접하였습니다.


이렇게 학문에 힘을 쓰던 이육사가 중국에서 귀국한 1927년 가을, 대구에서 큰 거사가 터졌습니다. 장진홍 열사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폭탄을 터트린 사건이었죠. 수사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일본 경찰은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을 모조리 잡아갔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27: 감옥에 처음 들어간 년도). 이때 일 년 반 동안 대구형무소에 잡혀들어가 사용했던 수형번호가 264였고, 이것은 이육사의 필명이 됩니다.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1930년부터 이육사는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30: 처음 시를 쓴 연도). 그가 쓰는 곧 그의 삶이었기에 당연히 독립운동과 관련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서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육사의 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죠.


그는 정말 투철한 정신을 가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대구에서 어떤 독립운동이 일어났다하면 이육사부터 잡아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의열단에 가입하고 1932년에는 중국에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임무를 위해 상하이로 이동했다가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하지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계속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1943년에는 무기를 들여오려고 베이징으로 이동했으나 모친과 맏형의 소상으로 귀국했다가 헌병대에 붙잡혔습니다. 이후 그는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17번째(17: 이육사가 감옥에 투옥된 횟수)이자 마지막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몸이 상할 대로 상해있었던 그는 1944년 베이징 일제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44: 그가 사망한 년도).


그의 생 40년 동안 그는 강력한 의지로 독립을 향한 길을 걸었습니다. 몸에 멍이 들고 피가 흘러내려도 민족의 독립과 국가의 형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강렬한 의지는 그의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이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喬木)>


교목이라는 말 자체가 우뚝 선, 키 큰 나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나무에게 건네는 말은 의지가 느껴지는 무척 강한 말입니다. 세월에 불타고도 우뚝 서서 봄에도 꽃피우지 말라거나, 마음이 뉘우침이 아니라거나 호수 속에 깊이 거꾸러질지언정 바람도 흔들진 못하게 하라는 말은 결연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죠. 당시 많은 이들은 그랬을 겁니다. 사람 죽을 일 있냐고, 적당히 하라고. 하지만, 이육사가 바라본 현실은 절대 좋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바꾸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일제 순사들이 이 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모골이 송연해졌겠지요. 몇십 년을 달래기도 하고 탄압도 하면서 완벽한 식민지 만들기에 힘써왔는데 여전히 이런 의지를 가진 투사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말로야 이런 투사들이 지나온 길이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이육사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걱정했고, 누군가는 비웃었으며, 누군가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길 위에서 이들은 고독했고 슬펐습니다. 이육사도 마찬가지로 늘 가슴에 고독과 비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매운 계절의 챗죽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나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絶頂)>


자신의 뜻을 맘대로 펼칠 수 없는 겨울이 계속되는 현실 속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나 황폐한 고원에 도착한 화자가 있습니다. 그 고원 위에서 그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서리 위에 서 있습니다. 무릎을 꿇어 잠시 쉴 수도 없고, 발을 디뎌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그가 생각한 일제강점기의 현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묶여 찬바람을 맞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이 모두 다르듯 많은 이들이 이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육사와 같은 소수의 이들만이 이렇게 느끼고 있었죠. 그 상황에서 그의 고독감은 대단했을 겁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절망. 그걸 남들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할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상황. 깊고 깊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는 시에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서뿐만 아니라 이처럼 당시 상황에서 느낀 자신의 내면도 담아냈습니다. 그의 시에서 독립에 대한 의지 말고 고독과 비애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죠. 슬프게도 그는 해방 1년 전 이 고독과 슬픔 속에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문학관을 나와 생가터 앞에 서서 넓디넓은 들판을 바라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북쪽에서 남쪽을 잇는 백두대간의 능선이 이 땅을 앞에 두고 멈춘듯한 모습을 보니 이육사의 <광야>가 떠오릅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氾)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깊은 역사가 담긴 너른 들판, 산맥들이 바다를 향해 달리다가도 끊겨버린 땅이 있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해주고 예쁜 눈송이가 나풀나풀 나리며 매화 향기가 흔연히 퍼지는 이상향. 그곳에 투철한 의지를 가진 이가 고독과 비애를 딛고 일어서 노래를 부르고 씨를 뿌립니다. 이 씨는 이 이상향을 풍요롭게 하겠지요. 하지만, 그는 이 이상향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러졌고,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 영웅과도 같은 어떤 이가 이 땅을 밟고 목놓아 외칠 것입니다. “대한 독립 만세!” 끝내 겨울의 끝을 보지 못하고 씨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한 명의 시인은 그제야 저 먼 세상에서 간신히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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