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위에 있는 이념은 없다, ≪태백산맥≫

벌교, 조정래

by baekja

순천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20여 분을 달리면 자그마한 벌교역에 도착합니다. 내려서 역사에 들어가자마자 꼬막에 관한 전시물이 보입니다. 원래도 벌교는 꼬막으로 유명했지만, <1박2일> 이후 벌교하면 꼬막이 되었고, 꼬막하면 벌교가 되었습니다. 벌교에 당연히 꼬막만 있다면 제가 벌교를 방문했을 리 없겠죠. 벌교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하소설이라 불리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벌교역을 빠져나와 처음 본 벌교읍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다양한 체인점들이 눈에 띄었고, 큰 수산시장 또한 있었습니다. 꼬막이라는 확실한 산업이 있고, 관광지로 오기도 좋다 보니까 모여드는 사람이 제법 있어서겠지요. 그렇게 꼬막 식당들이 죽 늘어선 거리를 지나면 5분이 채 되지 않아 오늘의 숙소 구 보성여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여관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수리와 리모델링을 하여 2012년 개관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조가 현재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와는 좀 달라 당황스럽지만, 예스러운 숙소 느낌이 나서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남도여관의 모델이 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20230923_141136.jpg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을 빠져나와 근대 느낌이 나도록 조성한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걸었습니다. 벌교는 원래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으나 육지와 바다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가 될 가능성을 일제가 알아보고 근대화를 시켰다고 합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보통역으로 벌교역이 개통된 것도 1930년이죠. 그 당시부터 벌교는 제법 발전하여 꽤 큰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때를 증명하는 유적이 구 벌교금융조합입니다. 191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이후에는 농촌지도소 벌교지소, 벌교지역 농민상담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지금은 벌교금융조합의 역사를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에서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근무한 곳이 바로 벌교금융조합입니다. 그는 해방 후에도 금융조합장으로 활동합니다. 이는 소설에서 친일파 척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20230923_150523.jpg 구 벌교금융조합


문학거리를 조금 더 걸으면 태백산맥 기념조형물이 나옵니다. 조정래의 부조와 ≪태백산맥≫의 줄거리를 적어놓았습니다. ≪태백산맥≫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벌교지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역사적 이념적 갈등을 그린 소설입니다. 가족끼리도 이념이 달라 싸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부분을 잘 다룬 소설이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분은 이념이 아니라 농민입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전혀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지주들이 농지 용도를 바꾸거나 미리 신청하여 농민들의 땅을 빼앗을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지주들을 공격했고, 정부의 탄압을 받자 농민들의 편을 들어주며 투쟁하겠다는 남로당과 빨치산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이 소설에서 말하는 건 이념만으로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그러한 이념을 지지하게 되었느냐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작가는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로 농민 문제를 제시한 것이죠.


이제 문학거리를 다 걷고 벌교 홍교를 건넙니다. 벌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이 다리는 1729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벌교의 근본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가면 좌·우익을 동시에 비판하다 빨갱이로 몰린 등장인물 김범우의 집이 나옵니다. 낡은 기와집을 슥 보고, 천을 따라 죽 내려가면 소화다리가 나옵니다. 1931년에 지어진 이 콘크리트 다리는 이곳을 지배하는 이념이 달라질 때마다 사람들이 총살을 당하던 곳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리 밑의 천은 붉게 물들었겠죠. 고작 사람이 만들어낸 사상과 이념 따위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사람의 생명마저 앗아가는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광기의 비극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20230923_152909.jpg 벌교 홍교


소화다리에서 벌교버스터미널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벌교버스터미널을 돌아 나오면 등장인물들의 집인 소화의 집과 현부자집 옆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크고 번듯한 태백산맥 문학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소설 ≪태백산맥≫을 위해 취재를 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벌교읍의 약도를 그리고 등장인물들과 등장인물들의 집을 설정한 자료들을 보고 있으면 그 대단한 노력에 없던 존경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리산 약도로 그것을 그리기 위해 지리산을 열 번 이상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거기에 지리산 빨치산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기 위해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들을 찾아가 취재를 했다고 합니다. ≪태백산맥≫을 연재하던 때는 1980년대로 아직 서슬 퍼런 안기부가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사람들을 잡아넣던 때였습니다. 그 시대에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그런 것에 겁먹지 않고 세세히 취재했다는 점은 그가 대쪽같은 그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에 농민의 편을 들어 친일파인 지주들을 공격했다는 소설의 내용까지 겹쳤으니 그는 자연히 이적성 논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경찰들의 감시가 따라붙었고, 신원 조회 서류를 내야 했으며, 뭐만 하면 경찰서에 출두해야 했습니다. TV방영은 어림도 없었고, 온갖 음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위협은 작가가 유서까지 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적인 그의 사상을 생각해보면 그를 대놓고 탄압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정부의 탄압이 없어지자 1994년에는 반공 우익단체들이 작가를 고소하였으나 2005년에 무혐의 처리를 받았습니다. 반공과 공산주의의 이분법 속에서 ≪태백산맥≫은 빨갱이 소설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태백산맥≫은 전 세계 평론가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소설로는 ≪태백산맥≫과 ≪토지≫뿐입니다. 역사의 복합적인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겠죠.


문학관 2층에는 백일장에서 수상한 학생들의 시와 그림이 있었습니다. 향토적 감성이 온전히 전해지는 평화로운 글과 그림이었습니다. 무수한 죽음이 있던 벌교읍 위에는 이제는 이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평화가 계속되어야겠지요. 소화네 집과 현부자집을 보고 나오는 길에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나누는 데 제법 몰두해 있습니다. 70여 년이 지났음에도 전쟁의 상흔은 남아 이념으로 사람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적인 시선은 많은 문제를 바라볼 넓은 시선을 좁게 만듭니다. 친일파들은 우익으로 변모하여 공산주의자를 타도하자고 말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내내 민중을 괴롭히던 친일파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고, 그들이 척결되지 않는 현실과 독립운동가였던 공산주의자들이 탄압받는 현실, 여전히 농민들을 수탈하던 이들이 여전히 위에 서서 농민들을 수탈하던 현실을 많은 이들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노했고, 일어섰으며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로 몰렸습니다. 아니, 그냥 생계를 이어나가던 이들도 총에 협박받아 누군가에게 음식을 주었다는 이유로 죽었습니다. 아니면 그 한 명이 있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비일비재했고, 당연했습니다. 이분법적인 시선은 이처럼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갑니다. 그 광기는 많은 이들을 죽였고, 여전히 사회 곳곳에 존재합니다. ≪태백산맥≫은 이러한 시선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건을 더 다양한 측면에서 보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태백산맥≫에서 양쪽의 이념을 모두 비판하는 김범우는 무척 중요한 사람입니다. 김범우는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나누는 이념이 사람 위에 설 수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모두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벌교 읍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벌교역에 도착했습니다. ≪태백산맥≫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죽은 형 염상진의 시체를 우익인 염상구가 경찰에게서 거두는 장소입니다. 좌·우익으로 갈렸던 형제가 죽음으로 화해하는 곳이죠. 그리 가까운 형제였음에도 누구 하나가 죽고 나서야 화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분위기였습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사람의 생명을 잃은 후에야 이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죽음으로 화해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무거운 밤공기가 벌교역에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