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군산역에서 금강하굿둑으로 25분 정도를 걸어가면 배 모양의 한 건물이 서 있습니다. 채만식 문학관입니다. 근처에는 딱히 뭐가 없어 이런 데다 지어놨나 싶지만, 군산역에서 별로 멀지 않으니 그냥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아는 채만식은 친일파인데 이런 문학관까지 지어져 있는 것이 신기했지만, 다른 유명한 친일파인 서정주도 문학관이 있으니 있을 법도 하다 싶었습니다. 수능 문학 공부하면서 누구나 채만식의 이름은 듣게 되니까요.
채만식은 1902년 군산의 임피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군산 시내나 금강하구와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집에서 만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서당을 다니면서 임피보통학교도 다녔습니다. 임피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식 학문을 배우며 자유연애를 꿈꿨으나 집안에서 결혼할 이를 정해놓아 1920년 익산군의 규수와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중도 휴학하고 귀국하였습니다. 이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아 장기 결석으로 퇴학 처리당했고, 강화의 한 사립학교에 취직했습니다. 이후 이광수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동아일보>, <개벽>, <조선일보>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고, 소설 집필에 힘씁니다. 해방 후에는 글을 쓰면서 사는 곳을 계속 옮기다 1950년 이리시(現 익산시)에서 지병으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늘 원했던 것이 글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원고지였다고 하니까요. 워낙 가난한지라 책상을 따로 두고 글을 쓰지도 못해 궤짝을 책상 삼아 글을 썼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성향이 한몫합니다. 회사 일에 적응하지 못해 매번 관두었으니까요. 한 군데의 회사를 오랜 시간 다녔다면 아마 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가난해도 글을 쓰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동반자(카프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비슷한 성향의 글을 쓰는 작가)적 입장이 잘 드러나는 글을 썼고, 그 이후에는 일제의 극단적 억압으로 인해 자신의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못한 당시 사회와 현실을 고발하려는 의도에서 풍자성이 강한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이때 나온 것이 그의 대표작들인 ≪태평천하≫,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입니다. 이때 나온 작품들은 억압받는 사회를 개인의 삶에 담아내어 풍자함으로써 당시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잘 비판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를 비판할 줄 알았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일제의 억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들을 쓸 때까지는 일제에 전혀 협력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사회를 통렬히 풍자하는 채만식의 소설은 일제에 거슬렸고, 1937년 ‘독서회사건’ 가담자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채 모진 고문을 받습니다. 이때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인해 5개월 후, 풀려난 뒤부터 친일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 후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기고하여 광복 후 남아있는 일제의 문화 잔재를 비판하고,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는 글을 남깁니다. 다른 친일 문학인들이 그 어떠한 반성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대비되는 삶입니다. 특히 친일 행위의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는 망언을 남긴 서정주에 비하면 그는 확실히 더 인격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현실을 풍자, 반어, 역설, 풍부한 어휘를 통해 비판함으로써 당대의 사회문제를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문학 스타일은 그의 대표작들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 척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일제의 잔재가 남은 사회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친일파였던 자신을 비판하고 반성함으로써 당시 시대에 대한 비판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친일 행위는 분명 그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오점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드러내어 비판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문학에서 추구했던 현실비판이라는 태도를 삶의 태도와 일치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빛을 잃을 뻔했던 그의 일제강점기 풍자 문학들은 빛을 되찾았고, 그의 모든 문학은 타당성을 얻었습니다.
친일은 옹호할 수 없는 커다란 죄입니다. 그 친일로 인해 징용, 징병으로 일본에 끌려가 어딘지도 모르는 타국 만 리에서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이런 죄를 지은 친일파들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최소한 자신의 죄를 밝히고 반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성 따위는 하지 않은 채 다시 국가의 지도층이 되었고,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는 일반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채만식의 반성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만, 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들이 참 많았기 때문이죠. 그 반성은 그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빛을 발휘했습니다. 현실을 비판하는 그의 문학들이 현재까지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현실을 비판했고, 그래서 자신 또한 비판했습니다. 그 일관적인 태도는 그의 삶을 구원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그의 문학만큼은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