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군산 근대 거리를 걷다 보면 웬 사진관 하나가 나옵니다. 이름은 초원사진관. 정말 사진관처럼 꾸며져 있지만, 진짜 사진관은 아닙니다. 예전에 영화 세트장이었던 곳을 복원하여 그 영화를 추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영화의 이름은 <8월의 크리스마스>.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무척 유명한 영화입니다. 문학관 기행인데 이곳에 대한 얘기를 왜 꺼내냐고요? 지금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의 이야기가 마치 문학처럼 느껴져서.’라는 낭만적인 이유로 이곳을 문학관 기행 글에 넣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지도 않은 제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수능 특강에 나와서.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난 겨울 수능특강이 나왔고, 저는 수능특강을 풀고 있었습니다. 수능특강에는 전에는 나오지 않았던 문학 작품들이 자주 나왔는데 시나리오의 예시로 나온 것이 <8월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시나리오에서 순수한 사랑에 대한 아련한 느낌이라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문제집에 찌든 고등학생은 쉬운 문제가 나왔다며 좋아하기 바빴습니다. 당장 문제를 계속 풀어야 하는 예비 고3의 입장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시나리오는 문학으로 분류된 시험 지문에 불과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답사에서였습니다. 군산의 근대 유적들을 살펴보러 왔는데 유적들 사이에 초원사진관이 있었습니다. 답사에 포함되지는 않아서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근대 거리의 느낌과 어우러져 아련한 느낌을 풍기는 건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잊고 있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군 선임을 따라 방구석 1열을 통해 다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무척 맑고 순수한 사랑을 담담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시험 지문으로라도 접하게 해준 수능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들더군요. 일단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게 좋은 영화를 소개해주었으니 고마워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초원사진관을 군산을 온 김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작품에서 정원(한석규)이 운영했던 초원사진관은 원래는 차고였습니다. 영화 제작진이 감성에 맞는 사진관을 찾아 전국을 헤맸지만, 찾지 못해 차고를 사진관으로 변형시켜 세트장으로 사용한 것이죠. 초원사진관이라는 이름은 한석규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 사진관의 이름입니다. 촬영 중에는 종종 새로 생긴 사진관인 줄 알고 주민들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촬영의 마지막 장면에는 눈이 내리는데 지금처럼 CG 같은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라 소금을 뿌려 눈을 대체했습니다. 다림(심은하)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진을 보며 활짝 웃는 장면에 내리는 눈이 소금이라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 것이 대단했지만, 웃기기도 했습니다.
사진관 내부는 넓지는 않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재밌게 볼 만한 요소들로 가득 채워놓았습니다. 저는 영화는 안 봤으니 스윽 둘러보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영화의 특징이라면 시한부를 선고받은 정원의 내레이션이 영화에 많이 등장한다는 점인데 그 내레이션 중에 감정을 건드리는 대사가 참 많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위의 대사는 사진관에서 본 시나리오 중 가장 인상적인 내레이션이고, 밑의 대사는 수능 특강에 실린 시나리오 부분 중 가장 인상적인 내레이션입니다. 두 내레이션 모두 사랑에 대한 아련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을 불러냅니다. 심은하도 밑의 내레이션이 가장 감정을 건드린다고 답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영상으로 그 감성을 느낄 수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나라오의 대사를 통해서도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몇 번이고 대사를 곱씹어보기에는 영화보다는 시나리오를 보는 것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죠. 이처럼 사람의 삶을 담고 감정을 전달하는 시나리오를 문학이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할까요? 그래서 영화 시나리오가 수능 특강에 문학 부분에 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글로 묘사한 시나리오는 문학인데 영화는 문학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문학은 글로 쓰이고 글로 읽힙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지고 영상으로 보이는 영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번 여행을 오기 전의 저라면 아무래도 문학에 포함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행을 쭉 돌면서 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문학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삶의 어떤 사소한 문제라도 진실하게 고민하고 그 고민이나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닐까.’ 문학은 무척 어려웠지만, 작가들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되고 나서는 그들은 그냥 그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내린 답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런 점에서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본가들의 삶은 잘 알지 못하지만, 삶의 유한성과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고민한 것이 작품에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아련함이 담담하게 순수하고 맑은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 내에 은은하게 녹아 나옵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 고민에서 나온 감정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이 영화가 문학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물론 이건 저만의 생각입니다. 보통 문학은 언어와 글자를 통해 표현되는 예술이니까요. 그 수단의 차이에 의해 시나리오는 문학에 속할 수 있지만, 영화는 문학에 속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영화 또한 언어를 사용하는 복합예술이기에 문학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시나리오의 대사가 있으니까요.
이런저런 고민을 마치고 사진관을 빠져나왔습니다. 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자연의 바람을 맞으니 이런 고민이 조금 사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뭐 문학이면 어떻고 문학이 아니면 어떤가요? 제 감정을 건드리고 삶에 대한 고민을 끌어낼 수 있으면 그냥 좋은 거지. 이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고 있든, 어떤 과학 현상으로 만들어지든, 제 기분을 좋게 만들었으니 그만인 것처럼요. 그래서 나오던 발걸음을 되돌려 초원사진관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한 번 더 정원과 다림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아련함을 마음에 한가득 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