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ja Feb 22. 2024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쇼생크 탈출

 얼마 전 인생 처음으로 연금복권을 샀습니다. 왜 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로또나 복권을 5000원 주고 사느니 그 돈으로 맛있는 분식 사먹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여전히 이러한 생각에 변함은 없습니다. 뭐 당연하게도 연금복권은 떨어졌습니다. 진짜 번호가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이 참 헛웃음이 나오게 하더군요. 하지만, 뭐 액땜했다 치고 사둔 연금복권은 여전히 지갑에 넣어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이미 시작부터 너무 힘든 올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복권 종이를 빼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흐르다 보니 20대 후반에 백수가 된 저와 달리 대단한 커리어를 가지고 젊은 나이에 은행의 부지점장이 된 앤디는 어찌어찌 흐르다 보니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죽인 혐의를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상황은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같이 들어온 누군가는 꺼내달라고 외치다가 간수의 봉에 맞아 죽었고, 은행의 부지점장 때였던 예전과는 달리 자유롭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힘든 업무 와중에도 악질적인 다른 죄수들의 성폭행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앤디는 늘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간수들의 세금 보고를 도와주고, 교도소장의 불법적인 돈을 관리하며 교도소 내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토미라는 젊은 죄수를 가르쳐 검정고시를 합격시킵니다. 그는 계속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희망은 삶을 건설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는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어 사람을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합니다. 토미의 증언으로 무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앤디에게 만들어지지만, 교도소장은 앤디를 독방에 가두고, 토미를 총살해 앤디가 교도소를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앤디는 처음으로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교도소장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의 표정에는 짙은 괴로움만 묻어나옵니다. 간신히 독방을 빠져나온 앤디의 앞에는 교도소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만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태평양이 보이는 멕시코의 한 해안가에서 살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를 보고 친구인 레드는 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앤디가 나갈 수 있는 희망은 없어보였으니까요.


 저는 계속 희망을 가지는 앤디와 그 희망을 버리고 현실을 보라는 레드에게 전부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희망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되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큰 희망부터 출퇴근길 대중교통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점심 메뉴가 맛있는 것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작은 희망까지 사람들은 그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사람을 괴롭게도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것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부 이루어졌다면 이미 희망은 사람이 바라는 꿈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있는 현실이겠죠. 희망은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운명인지 확률인지 우연인지 모를 그 무수한 갈림길 속에서 희망은 누군가를 빛으로 이끌기도 하고, 누군가를 어둠으로 내리 끌기도 합니다. 모두가 빛으로 이끌리면 참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기에 누군가는 어둠으로 끌려가 깊고 깊은 절망을 맛보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절망을 맛보기 싫은 이들은 점차 희망을 잃어갑니다.


 앤디는 위에서 말했듯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가 교도소에서 쌓아온 19년 동안의 희망은 마침내 그를 바깥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탈옥했고, 교도소장의 비리를 전부 폭로한 후 교도소장의 돈을 들고 멕시코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쇼생크 탈출’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19년 동안 굴을 팠습니다. 무척이나 절망적이었을 현실 속에서 그는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끈기와 노력은 결실을 이루어 잡을 수 없는 나비와도 같던 희망을 끝내 손에 쥐었습니다. 탈옥 후 비를 맞으며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리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이 희망을 얻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기쁨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줍니다.


 과연 저는 앤디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사실 삶의 대부분을 레드처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가질 수 있는 만큼의 희망만 가졌고, 그 희망만큼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불가능’의 영역에 가까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희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희망은 절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희망을 가지지 않은 척을 해보아도 제 마음속은 조금씩 마모되었습니다. 저는 영화 속 앤디와 같은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실패는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저는 희망과 도전을 조금씩 버렸습니다.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앤디와 같은 삶을 살라고 하면 무척 부담됩니다. 저는 15cm 망치 한 자루로 긴 굴을 파고, 매주 한 통씩 편지를 써서 교도소 내에 도서관을 만들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간수들의 세금을 관리하며 돈을 빼돌릴 준비를 하는 대단한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요. 그래도 앤디의 삶을 보며 희망을 놓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에게 절망을 가져다줄지언정 언젠가 희망을 향해 다가갔던 끈기와 노력은 내가 꼭 바랐던 희망이 아닐지라도 나에게 다른 희망을 가져와 현실로 이루어줄지 모르니까요. 가만히 침대에 누워 내가 끝없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절망감을 느끼기보다는 무언가라도 하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제 삶을 어둠이 아닌 빛으로 이끄는 방법이라 믿어봐야지요. 앤디의 삶을 보며 현재의 제가, 그리고 미래의 제가 실패라는 절망을 넘어 더 나아가는 힘을 조금이라도 얻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원을 자유롭게 가지는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