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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ja Feb 29. 2024

가위바위보

서문


 후배가 1년 만에 모란장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내장고기 무한리필로 유명한 모란장은 저와 후배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총선을 앞둔 정치 선전을 지나 어른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저와 후배는 어른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턴과 취업, 우울증과 공황.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너무나 깊고 어두운 이야기. 서로의 웃음 속엔 뼈가 있었고,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노래방에 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소주 두 병을 마신 채 불러대는 노래. 음정은 하나도 맞지 않고, 박자도 틀린 노래 속엔 울분이 가득했습니다. 그저 소리 지르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 지르고 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게임장으로 가 농구공을 던졌습니다. 퉁퉁 의미 없이 들리는 소리와 의미 없이 올라가는 점수 속에서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즐거웠지만, 그 뿌듯함이 제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게임장을 나와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럴 날이었습니다.


 분당선에 올라타 취한 채 서 있는데 한 어르신께서 저를 불렀습니다. 비몽사몽 얼굴을 들자 어르신께서 가방을 자신의 쪽에 놓으라고 하시더군요. 뭐랄까. 호의를 거절할 힘조차 없어 그곳에 가방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몇 정거장이 지났을까 어르신은 다시 제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내릴 거냐고. 저는 수원에서 내린다고 했습니다. 어르신은 기흥에서 내리니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주시며 벽에 기대어 서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그 자리에 선 채 수원역까지 왔습니다. 그게 전부였지만,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어르신은 기흥역에서 내리실 때도 제게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정말 간만에 느끼는 모르는 사람과의 정이었습니다. 감사했고, 감사했습니다.


 수원역에 내려 일호선으로 갈아탔습니다. 갈아탄 일호선엔 아이들이 가득했습니다. 서로 몰랐던 아이들은 오늘 같은 칸에 탔다는 인연만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 가위바위보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내기도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의미 없는 승패만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가치를 매기고 승패를 나누어 내기를 거는 어른들의 가위바위보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저 계속 만들어지는 승패 속에 즐거움과 안타까움만 존재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과 탄식만이 거기 있었고, 현실의 냉혹함은 거기 없었습니다. 처음 만난 이들에 대한 정과 그 순간에 대한 순수함만이 그 공간을 뒤덮었습니다. 저는 그 중간에 서서 그저 웃음만을 내보였습니다. 그 순간에 아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그저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이제 어른입니다. 가위바위보 하나에도 의심하고 가치를 매기는 어쩌면 되먹지 못한 어른입니다. 제게 단순함과 순수함이란 없습니다. 누군가의 상황 그 너머를 생각하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무수한 예측들은 이제 한 자아를 형성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자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이 자아에 순수함은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가위바위보에 가치를 매기고 의심하는 평범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 자아는 저의 순수함을 삼켰고, 낭만을 삼켜 현실에 적응하게 했습니다.


 그런 어른이 동화를 읽습니다.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동화를 어른이 읽습니다. 자신의 맘속에 남은 낭만과 순수함을 펼쳐낸 이야기를 한 어른이 읽어보려 합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도 멋있는 사람도 아닙니다만, 그저 그 순수함을 되찾고 싶은 사람입니다. 되찾지 못하더라도 그 순수함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른인 저의 시선을 되돌려 아이였던 저의 시선을 보고자 합니다. 어른이 보는 동화엔 순수함이 많이 사라졌겠지만, 그 너머 제가 보지 못했던 언젠가의 순수함, 낭만을 동화에서 조금씩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차갑고 냉혹한 세상 속 이제는 즐거움의 가위바위보를 하지 못하는 어른이 동화를 읽고 떠올리는 기억과 생각의 말들. 그것이 앞으로 쓸 글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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