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야 놀자
파도가 치는 바다 한 아이가 왔습니다. 바다를 향해 뛰어온 아이는 파도 앞에서 멈추어 섭니다. 파도를 보고 밀려오는 파도에 도망가기도 하고 도망가는 파도에 위협을 주기도 합니다. 파도가 어디까지 오나 가만히 바라보다 파도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칩니다. 이번엔 아이의 키를 넘어가는 커다란 파도가 옵니다. 아이는 깜짝 놀라 도망가서 거리를 벌린 뒤 파도를 놀립니다. 놀림을 받은 파도는 더 커다란 파도로 아이를 쫄딱 적십니다. 파도의 힘에 당한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다 파도에 실려 온 다양한 바다생물들을 관찰하며 놉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입니다. 아이와 함께 있어 주던 갈매기들도 다시 바다로 떠나고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갑니다. 파도에게 하는 작별 인사도 잊지 않습니다.
파도가 마냥 신기했던 시절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한 어른이 여기 있습니다. 파도가 이런저런 이유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자연 현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파도는 재밌습니다. 매번 오는 세기가 달라지고, 오는 높이가 달라집니다. 나 발가락 근처에도 못 왔던 파도가 제 허리까지 오기도 합니다. 마치 파도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아예 파도에 뛰어들어 파도를 만끽하기도 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함이 파도의 매력입니다. 그 매력을 한껏 느끼며 바다를 즐깁니다.
동화책의 아이도 현실의 어른도 파도를 보면 신납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파도를 만끽하며 놉니다. 아마 이런 점은 어른에게 남은 한 줌의 동심이겠죠. 하지만, 너무 많이 알아버린 어른은 순수한 동심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이와 어른에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파도와 놀지만, 어른은 파도로 노니까요. 파도가 자연 현상임을 모르는 아이에게 파도는 자신과 잘 놀아주는 변덕스럽지만, 신기한 친구입니다. 파도의 세기와 높이가 달라지는 것이 마치 생물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아이는 더 즐겁게 놀 수 있습니다. 어른에게는 파도가 그저 노는 수단일 뿐이지만, 아이는 자기 친구인 파도와 대화하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노니 당연한 결과이겠습니다.
어른이 되면 쌓아온 많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대상을 먼저 예측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나름의 기준대로 대상을 정의합니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경험과 지식을 쌓는 게 먼접니다. 위에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동등한 선에서 경험하고 대화합니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죠. 백지만 있는 아이에게 모든 것은 경험과 대화의 대상, 즉 친구가 됩니다. 모두가 친구가 된다는 것, 의심과 음모가 판치는 어른의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몇몇 어른들은 이것이 어른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면 정말 낭만적이고 멋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동물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은 동물행동학을 만들어냈고, 인류 중심의 역사에 의문을 가졌던 이들은 세계사에서 벗어나 지구사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구를 친구로서 보살펴야 한다고 환경학자들은 늘 말합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기존 어른들의 판단과 오만에서 벗어나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다른 것들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인류 중심의 사고방식이 주는 근대 연구의 한계점에서 벗어나고자 생겨난 것이기에 아이의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시선을 낮추어 세상 모든 것들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태도만은 위의 어른과 아이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른이 잃어버린 아이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보게 하고 이해하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파도와 노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하지만, 우리를 돌아보게도 합니다. 동등한 시선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같은 대상으로 바라보고 모두를 친구삼는 아이의 행동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더 많은 것을 알고 다른 대상들을 수단으로만 삼는 어른의 행동보다 더 대단하고 멋있습니다. 하루쯤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나무, 하늘, 창문과 같은 주변 모든 것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전에는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며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