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열차
중학생 때 학원을 정말 열심히 다녔습니다. 학교에 갔다가 학원을 갔다가 숙제를 하면 하루가 끝나곤 했었습니다. 쉬는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답답한 상황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문제집을 풀고 또 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 상황을 벗어날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창문 밖 보기였습니다. 창문 밖을 보면 차들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까만색 아스팔트 도로 위 흰색의 선 안을 달리는 차들. 웃기게도 그걸 30분을 멍하니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딱히 즐겁지도 재밌지도 않았지만,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고요한 자습실, 그 너머의 차들. 조용한 명상실에서 불멍을 때리는 것이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화물열차가 달립니다. 터널을 통과하고, 도시를 지나가고, 철교를 건너고, 달리고 달립니다. 그뿐인 동화입니다. 멍하니 보게 되지만, 편안합니다. 그냥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게 됩니다. 그래도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도시를 누비는 차들과 이 화물열차의 다른 점은 색깔입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차들과는 달리 화물열차의 색깔은 무지개빛입니다. 빨주노초파남보가 섞인 화물열차는 채도가 강렬한 그 색만으로 이 열차가 현실이 아닌 꿈에 있는 어떤 열차임을 인식시킵니다. 빛깔이 예쁜 열차는 회색빛 가득한 산업 혁명의 부산물이 아닌 꿈속에서 튀어나온 열차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바삐 도시를 누비는 지금은 이런 색깔이 놀랍고 생경하지만, 어렸을 때는 이런 색깔을 줄곧 잘 찾아내곤 했습니다. 황금 마티즈를 먼저 찾아내어 친구를 한 대 때리는 것만큼 즐겁고 재미난 일이 없었죠. 어쩌다 동시에 찾아내면 찌찌뽕을 외치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일곱 빛깔을 주변에서 먼저 찾아내는 사람이 때릴 수 있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를 전부 찾는 게 어찌나 어려웠던지 이게 빨간색이냐 주황색이냐를 두고 싸우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 시절엔 무채색의 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색깔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지금이 도시 그 너머의 무언가를 깊이 볼 수 있을지언정 그때는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커가면서 보이는 것들은 어떤 물건의 색깔이 아니라 어떤 물건의 값과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 물건을 깊이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물건을 그냥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한 감정들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볼 수 있는 시선이 부럽고, 그렇게 보는 아이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지금 물건의 겉모습만 순수하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자라오면서 만들어낸 ‘저’라는 인격체가 가진 생각과 감정은 그 시절을 아득히 넘었고, 겉으로만 무언가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의심과 비판으로 가득한 한 어른이 아이들을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따라 하다가 누군가에게는 사회화가 덜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저는 화물열차의 아름다운 빛깔처럼 도시에서 색깔을 찾는 그 시선을 선망하지만, 이제는 갖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도시의 색깔을 찾고, 화물열차의 채도 높은 색깔에 감탄하던 아이는 이제 없습니다. 그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중학생 때 이미 색깔을 찾지 못하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이제는 색깔 너머의 이야기를 읽거나 바삐 흘러가는 것들에 그저 멍해질 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종종 그저 움직이는 것을 보며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쉼을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멈춰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끝없이 달려가는 화물열차처럼 도시와 제 삶도 계속 달려갑니다. 힘차게 색깔들을 찾으며 뛰놀던 아이의 낭만을 조금은 맘에 담아 둔 채 희망과 꿈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제 삶과 철길의 끝에 있을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그림처럼 걸려 있는 아름다운 풍경 앞 종점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