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 이야기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수명,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품고 있는 중요한 가치들.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무언가가 내게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나의 집은 위의 것들을 지켜주고, 실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줍니다. ‘집’이라는 단어에 짙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것은 그래서겠지요. 하지만, 이제 집은 부동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텅 빈 집들이 늘어났고, 사람이 사는데 필수적인 공간이 아니라 재산을 뜻하는 다른 말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마땅히 필요하다는 집의 의미는 퇴색되어 모두가 한없이 오르내리는 집값의 그래프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여기 그런 집과는 거리가 먼 작은 집이 있습니다. 시골의 언덕 위에 지어진 그 집은 아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튼튼하게도 지어졌고요. 그 집은 봄이면 사과꽃이 피는 것을 보고, 여름이면 데이지로 언덕이 뒤덮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을이면 주홍빛, 빨간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보았고, 겨울이면 흰 눈으로 덮인 마을을 보았습니다. 밤이면 별빛과 달빛이 세상을 수놓았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수도권에서 자란 도시 사람입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서울이라 제게 시골은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습니다. 아빠는 시골이 참 살기 좋은 곳이라 말하셨지만, 제 입장에서 마트도 외식할 곳도 마땅치 않고 벌레만 많을 것 같은 시골은 딱히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제가 시골을 경험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전원 기숙사였던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산골 깊숙한 곳에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슈퍼는 2km정도를 걸어야 나왔고, 편의점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벌레는 득시글거렸고, 평생 볼 여치를 그곳에서 다 보았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엔 학교 건물에 박쥐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도중에 고라니가 뛰쳐나오기도 했죠. 그래도 좋았습니다. 모든 불빛이 사라진 밤.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운동장에 나와 누우면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 이래서 시골에 사는구나 싶었습니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박스와 비료포대를 들고 눈썰매를 타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적 해보지 못한 소중한 경험을 그곳에서 쌓으며 시골에 대해 좋은 기억들이 쌓였습니다.
긴 시간이 흐르고 작은 집이 있는 시골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작은 집은 고가 전철과 자동차 지하철의 소음에 시달렸고, 고층 건물 사이에 끼어 색이 점점 바래졌습니다. 세상은 너무 바빴습니다. 작은 집은 지쳐갔습니다. 도시에 살았던 것이 익숙했던 저조차 시골에서 몇 년 산 뒤 도시의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작은 집은 오죽했을까요? 학교에 몇 개월 갔다 오고 나면 세상은 늘 조금씩이라도 바뀌어 있었습니다. 고요했던 시골의 침묵은 사라지고,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했습니다. 자동차 엔진 소리와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짜증이 올라온 것은 아마 그때쯤이었습니다. 고층 건물이 아니라 넓은 지평선과 수평선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처음으로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느리더라도 도시를 벗어나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바쁜 세상에서 아무도 작은 집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작은 집은 억만금을 주어도 없앨 수 없었기에 그곳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집을 지은 손녀의 손녀가 찾아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집을 가져가 사과나무 가득한 한 언덕에 두었습니다. 집은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누군가의 추억과 삶이 담긴 집은 억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몇 세대의 세월이 담긴 공간만큼 소중한 것이 없죠. 요즘은 그런 공간에 대한 고민이 적은 것 같습니다. 더 비싼 곳, 더 편한 곳만을 찾으니까요. 정서와 행복, 안정감을 주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집의 가치가 삶을 지탱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것, 더 빠르게 살 수 있는 것에만 맞춰진 느낌입니다. 그래도 작은 집의 가치를 잊지 않았던 손녀의 손녀는 다시 작은 집을 가져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름답고 아담하고 튼튼한 그 집에서 밤낮과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말이죠. 저도 언젠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잿빛 가득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의 빛깔 가득한 곳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히 낮잠이나 자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세상은 돈으로 움직입니다. 돈은 숫자로 표시되기에 더 많은 숫자를 얻기 위해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입니다. 그 숫자를 많이 얻기 위해 육체적으로 편한 것은 고려되나 정서적으로 편한 것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행복한 걸까요? 더 높은 숫자와 더 많은 돈을 탐하면서 사는 이 삶이 행복한 걸까요? 시골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그때가 저는 더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은 제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집도 그랬습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숫자의 도시를 떠나 느리고 불편한 자연의 시골에서 정서적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세월을 쌓아가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공간으로 이 집의 가치를 높여나가겠죠. 그리고 그 가치에는 빠름, 숫자, 돈, 표면적 편안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가득할 것입니다. 언젠가 그 따뜻함을 저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