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장례식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은 모두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여러 상상과 가설들은 많이 세워졌지만, 정확히 증명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보통 삶의 끝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에 의해 그 삶이 연장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더 이상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알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슬픔을 느끼고, 죽음을 생각할 때 상실의 공포를 같이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삶의 유한성을 인지하고, 그 누군가와 같이 오랜 경험과 추억을 쌓았을 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한한 삶의 가능성을 가졌고, 삶에서 이별하는 이들과 오랜 경험과 추억을 쌓지 않은 아이들은 장례식에서 이러한 감정을 못 느끼기도 합니다.
증조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노마는 기분이 좋습니다. 학교에 안 가게 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아이들의 밝은 분위기와 달리 어른들의 분위기는 좀 가라앉아 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호상’이긴 하겠지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신나있고, 사촌동생인 레이와 장난을 치며 놉니다. 마침내는 교회를 나와 레이와 연못과 묘비를 구경하고 뜰에서 뛰어놉니다. 레이는 죽음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마는 이것이 증조할아버지를 보는 마지막임을 알기는 압니다. 그래서 꽃에 둘러싸인 채 누워서 웃고 있는 증조할아버지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할아버지는 오늘 행복했을 거야.”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장례식. 많은 이들의 애도가 가득한 그곳에서 꽃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할아버지. 긴 삶을 살다가 갔고, 마지막까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있을 할아버지는 행복할 겁니다. 아이의 눈은 있는 그대로를 보기에 그 순수함으로 진실을 궤뚫기도 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 마주했던 장례식은 이처럼 호상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어머니의 삼촌뻘이니 나이가 조금 드시기는 하셨지만, 지병으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의 분위기가 무거운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제가 뭘 알 리가 있나요.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누군가의 장례식은 지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엄마는 울고 있고, 아버지의 얼굴이 심각해서 여기서 웃고 떠들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몸은 배배꼬였습니다. 어른들이 그걸 모를 리 없죠. 저는 그래서 장례식장 근처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을 이것저것 살펴보았습니다. 재밌었습니다. 한 한 시간이 지났을까. 부모님이 저를 찾으시더군요. 그 길로 염을 한 채 누워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형상은 잘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분위기는 기억이 납니다. 고요한 무언가. 모두가 침묵하게 되는 것. 슬픔이나 공포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엄마한테 혼날 때를 제외하고 분위기가 무겁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왔습니다. 그냥 그게 전부였습니다.
동화책에서 아이의 눈으로 본 장례식은 지루했고, 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즐겁게 놀았을 뿐입니다. 저 또한 어렸을 때 처음 간 장례식은 비슷했습니다. 아직 경험과 추억을 쌓지 못한 이들에게 조금 먼 가족의 죽음은 흔한 이별보다도 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의 무지와 순수는 그냥 그 상황을 볼 뿐 그 뒤의 이야기를 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죽음을 조금 단순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다르게 보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조금 먼 이야기기에 와 닿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이별이겠구나 싶은 거지요.
죽음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극도의 불안이 몰려옵니다. 그 뒤에 쌓인 이야기들이 무겁습니다. 가끔은 죽음 뒤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저 하나의 이별로 받아들일 뿐인 죽음. 삶이 창창하고 무한한 아이들에게는 죽음의 무게는 딱 그 정도가 적당합니다. 하지만, 종종 아이들은 도처에 널린 죽음 앞에서 죽음의 무게를 너무 일찍 실감해버리기도 합니다. 이유 없이 죽어간 가족들의 시체 앞에서 울고 또 울다 알게 되어버린 죽음은 너무 무겁습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이런 죽음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이 있겠지요. 동화책에서처럼, 그리고 어렸을 때 저처럼 적어도 아이들이 순수함을 가지고 죽음을 대할 수 있는 환경이 어디에서든 구성되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죽음을 직접 대면해야 할 나이는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