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결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웠던 나는 나름 좋은 대학 시절을 겪으며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다. 나라는 인간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하루는 학생회에서 다음 축제 이벤트에 관련된 회의를 했다. 열띤 논쟁이 끝나고 모두들 하나씩 자리를 나갈 때쯤 회장오빠의 친구분을 봤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아는 듯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자연스럽고 따듯하게 웃는 모습이 멋졌다. 입고 있던 갈색스웨터가 그 사람과 너무 잘 어울렸다. 그 자리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하게 되었다. 그 오빠는 토목공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철학과를 복수 전공했다고 했다. 나는 오빠가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잠자리에 드는 길에도 그 오빠가 생각이 났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아 괜히 토목공학과 근처 매점을 가거나 학생회관에 갈 때에도 토목공학과가 있는 공학관을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오빠를 마주치면 할 변명도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거의 한 달을 공학관을 매일 지나다닐 때쯤 그 오빠를 만났다. 그 오빠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떻게 공학관에 왔는지 물었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준비된 변명을 했다. 오빠는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빠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한참을 웃었다. 나는 상황을 얼버무리고 가려던 반대 방향으로 왔다. 나는 내가 꽤나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준비성이 없는 거짓말은 금방 탄로가 났다. 다행히도 오빠는 그 거짓말을 귀여워해 주었다. 다음날 그 오빠한테 연락이 왔다.
첫 문자에는 이렇게 왔다.
"안녕 수희야 저번에 만나서 반가웠어. 공학관까지 와줘서 고마워!"
오빠는 생각보다 개구쟁이였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쉽게 가까워졌고 나는 오빠의 재밌고 어른스러운 점이 좋았다. 나의 첫 연애는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 드라마틱한 연출을 전혀 없었다. 바빴던 우리는 작은 시간을 만나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겼고 서로에게 감사했다.
만난 지 한 달쯤 나는 성주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얘기했다. 성주는 다짜고짜 좋은 사람이냐며 나쁜 사람이면 절대 만나면 안 된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그런 성주가 조금 웃기면서도 나를 위해 화를 내는 성주가 고마웠다. 성주는 질투가 난다고 말했다.
"수희는 내 건데! 이상한 오빠가 수희를 데려갔다니! 수희한테 잘 못해주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주가 너무 웃겼다. 나는 성주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내가 성주가 첫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느꼈던 느낌이기 때문이다. 성주가 질투해 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질투했었다면 나만 성주를 좋아하는 것 같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어도 나에겐 네가 첫 번째로 소중해. 나는 이 세상 그 누구 보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 성주야. 조금 행복한 밤이었다.
우리는 거실에 앉아 맥주를 한잔씩 하고 아주 늦은 밤까지 서로의 남자친구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늦은 밤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더 곤히 자게 했다. 나는 자면서도 오늘이 가지 않기를 기도했다.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듯한 이날밤을 잊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알았다. 이렇게 행복한 밤은 어른이 되면 자주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 밤이 더 행복했다. 어렸을 때 그게 행복한지 모르던 그 밤이 이제는 손에 꼽을 만큼 행복한 날이 되었다.
성주는 3학년을 유급해 나와 같은 해에 졸업을 했다.
우리는 중학교 때보다는 많이 멀어져 있었다. 나는 그게 더 이상 서운하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이상 새로운 가족을 가져야 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영원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마치 첫사랑을 떠나보내듯이 성주는 마음에서 놓아주었다. 그 이후 나의 삶은 편안해졌다. 나만 사랑해 주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인턴쉽을 하던 회사에서 정규직을 추천받아 졸업하기 전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되고 편안한 삶이었다. 나는 많은 행복한 날들을 보낼 때에도 성주가 생각이 났다. 졸업할 때쯤 서로 다른 집을 알아보고 다른 곳으로 이사 나왔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고 그녀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성주의 생각이 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좋은 곳을 갈 때마다 부모님을 생각하듯 성주가 생각이 났다.
7개월쯤 지났을 때 성주에게 문자가 왔다.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 성주의 안부를 물었다.
성주는 좀 힘들다고 얘기를 했다. 나는 아주 빠르게 성주에 집으로 갔다. 성주에 집은 엉망이었다.
청소를 좋아하던 성주는 내가 뭔가를 흘리기만 하도 청소기를 꺼내 들었다. 그때마다 미안했던 나는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성주는 절대 청소기를 나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나는 청소를 취미처럼 하는 성주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성주의 집이 현관에서부터 이렇게 난잡하게 쓰레기가 쌓여있다니 좀 이해가 안 갔다. 나는 성주를 보자마자 물었다. 어디 아픈 게 아닌지 혹은 남자친구랑 헤어졌는지. 성주는 대답했다. 역시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이번 남자친구는 툭하면 성주에게 손찌검을 했고 하지만 몸에 표식이 남거나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내가 이해가 안됬던 것은 왜 신고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그런 사람을 7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만난 건지였다.
성주는 속히 나쁜 남자라고 불리는 종류의 남자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잘해주고 성주를 아껴주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본색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나는 시간이 더 지나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일이 일어난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헤어진 것이 너무나 잘 된 일이라고 위로했다. 더 이상 힘든 일이 성주에게는 일어나질 않기를 나는 기도했다.
늦은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오빠와 통화를 했다. 왜 성주가 만나는 사람들이 성주에게 부족한 사랑을 주는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오빠는 나에게 성주가 그런 사람들을 만난 거지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사람들도 있고 다들 그렇게 상황이 안 좋아지게 될지 모르고 만나는 거라고 답했다.
나는 다음 날에도 퇴근을 하고 성주의 집으로 갔다. 성주와 못한 얘기들을 마저 하고 마치 우리가 처음 자취를 하던 날처럼 많은 대화를 하다 자고 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성주가 좋은 회복을 하기를 바랐다. 사람한테 상처를 받고 사람을 싫어하게 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렇게 사랑스럽고 반짝이는 성주가 성주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매일매일 행복에 흠뻑 젖어 살기를 바랐다. 나는 성주를 안아 주었다. 성주가 내 품에서 맘껏 울 수 있도록 안아 주었다. 토닥여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 주면서. 단 한 가지 약속을 받았다. 다음에 만나는 사람이 어떠한 형태로든 폭언 혹은 폭력을 한다면 나에게 바로 얘기할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헤어질 것. 성주는 다시는 나쁜 남자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