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이(2)
아니, 지금은 화가는 아닌데 예전에 미술을 전공했대.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결혼하면서 포기했대
'또각또각또각' 교실 복도에서 날만한 소리가 아닌데 묘하게 구두 소리가 울린다. 한 여자가 나무 바닥으로 된 복도를 뾰족구두를 신은 발로 걷고 있다. 긴 파마머리에 보라색 염색이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꽤 날 선 코 위엔 끝이 뾰족한 선글라스를 올리고, 몸매가 거의 그대로 다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가 팔까지 올라오는 오페라 글러브를 차고 손가락 끝에 꽤나 비싸 보이지만 속엔 별로 들어있는 게 없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핸드백을 들고 걷고 있다. 바로 그 뒤로, 대머리에 살이 너무나 쪄서 안경의 일부가 얼굴에 파고든 것이 보기에 안쓰러운 교감이 땀을 뻘뻘 흘리며 좇아 온다.
"저기.. 그.. 저기.. 학부모 되세요?"
여자는 이 남자가 자신을 불러 세운 것이 꽤나 불쾌하다는 듯이 눈을 한 번 치켜뜨고 대답한다.
"네, 그런데요? 저 5학년 4반 이기영이 엄마 되는데..."
작은 소란에 밖을 내다보던 몇 명의 아이들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얼굴로 두 눈을 반짝인다. 교감은 난처한 듯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체크무늬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자신이 기영이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성에게 말을 건넨다.
"죄.. 죄송하지만 여기는 신발을 버.. 벗고 가셔야 합니다."
원래 말을 잘 더듬는 교감이 오늘따라 더 심하게 말을 더듬는다.
"벗어야... 하나요?"
"네? 아.. 그 벗어야 하긴 하는데.."
"여기서... 벗을 까요?"
여자의 기세에 눌린 것이었을까? 교감이 손사래를 친다.
"아뇨, 그.. 뭐 아닙니다. 학부모 차.. 참관 수업 오셨지요? 4... 4반은 저 쪽입니다. 네, 들어가 보세요."
그 여성은 왼 손으로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4반 명패를 확인하고는 드르륵 교실 문을 연다. 칠판 앞에 서 있는 교사와 교실 뒤를 점령하고 있던 부모들, 그리고 수업 준비로 소란하던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그 여성에게로 향했다. 순간적인 정적이 잠시 흘렀지만 이내 다시 술렁이는 교실.
"뭐야? 연예인이야?" 소곤소곤 아이들의 입방아 소리가 교실 벽을 타고 사방으로 튄다.
"기영이 엄마래, 내가 아까 복도에서 하는 이야기 들었어." 안경잡이 영재가 언제나처럼 안경의 코받침을 쓰윽 위로 추켜 올린 뒤 이야기했다.
여자애들은 화려한 그녀의 등장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연예인 아냐? 티브이에서 본 것 같은데?"
" 와... 진짜 예뻐. 최지우 보다 예쁜데?"
"아닌데, 내가 지난번에 기영이 엄마 봤는데 저 사람 기영이 엄마 아닌데."
그들 중 한 녀석이 무심코 꺼낸 말에 술렁이는 아이들
"응? 그럼 누구야?"
"몰라, 기영이 이모 아닐까? 딱 봐도 엄청 젊잖아?"
"아냐, 내가 들었어. 기영이 엄마라고 자기가 그랬어."
교실에 들어와서부터 자꾸만 기영이에게 눈을 맞추려고, 기영이 방향으로 손을 흔드는 저 여성이 누구인가에 대해 설왕설래가 한참 이어졌지만 요즘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아이들에게 툭하면 주먹을 휘두르곤 하던 기영이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를 가진 아이는 우리 반에 없었다. 나도 기영이 엄마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있지만, 저 여성은 절대 기영이 엄마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기영이 엄마는 평범해 보이지만 뭔가 범접하지 못할 단단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딱 봐도 좀 과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할 쯤이었다.
"자~ 조용!!!" 안 선생님 아니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을 꼭 닮은 김영락 선생님이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자 잠시 소란했던 교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벽을 타고 튀어 다니던 소리들이 다시 아이들의 책상 아래로 얼른 몸을 숨겼다.
"기영아~ 엄마 왔어." 여성은 나름 소곤대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반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기영이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 씨발!" 기영이가 벌떡 일어나는데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모두가 기영이를 쳐다봤고, 기영이는 "누가? 누가 우리 엄만데?"라고 여성을 향해 빽 소리를 지르더니 후다닥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따라가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자리에 앉으라고 제지하는 바람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잠시 다른 학부모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 원피스 여성을 데리고 교실 앞 복도에 나가 도저히 교실 안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뭔가를 소곤소곤했다.
나중에 기영이의 동생 가영이를 통해 듣게 된 사실은, 기영이 부모님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이유로 이혼을 했으며, 기영이 엄마는 결국 화가의 꿈을 찾겠다며 기영이와 가영이를 두고 프랑스인가 이태리인가 하는 유럽의 어느 나라로 떠났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아빠가 데리고 온 새엄마(오늘 학부모 참관 수업에 온 그 여성)와 살게 된 기영이와 가영이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가영이 말로는 그 새엄마라는 사람이 어디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기영이 아빠는 자신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기영이의 새엄마에게 애들 먹이고, 교육하는 데에만 신경 쓰라고 했고, 다른 집안일은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 후 기영이와 기영이의 새엄마 이야기는 꾸준히 구설수에 올랐고, 그때마다 기영이는 자신에 대해 뒷담화 하는 아이들을 족족 잡아 족쳤다. 기영이의 주먹은 또래 아이들보다 배는 강했고, 나는 그런 기영이가 엇나가는 것 같아 태산같이 걱정했다. 그리고 그를 곁에서 어르고 달래 봤지만, 정작 6학년으로 올라가서는 기영이와 반이 갈리면서 가끔 기영이가 더 난폭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기영이네 집에 놀러 가지 않게 되었다. 기영이도 더 이상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시 기영이와 한 반이 된 것은 같은 중학교에 진학을 한 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당시 친했다는 것이 오히려 껄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기영이는 나에게 냉랭했다.
다시 경흥 중학교 2학년 1반 교실,
소문에 의하면 그동안 기영네 집은 굉장히 부자가 됐다고 했다. 기영이 아빠가 원양어선에서 벌어 온 돈으로 투자한 선박 사업이 잘 돼서, 기영이네 집은 바다가 보이는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기영이 아빠가 에쿠스로 기영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을 봤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영이의 엄마는 치맛바람으로 유명했고, 여전히 진한 염색머리를 하고, 야시시한 옷을 입고 학교를 들락거렸다. 게다가 그녀는 학부모 대표와 학부모 배구팀 대표를 겸임했다. 기영이는 보통 도시락통 사이즈를 훨씬 뛰어넘는 찬합에 도시락을 싸왔는데, 소시지나 돈가스가 칸칸이 가득 들어있고, 맨 아래 칸에는 과일까지 잘라서 들어있어서 기영이가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아이들이 "나 이거 한 입만 먹어도 돼?"라며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기영이의 새엄마가 어떤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 둥, 극장 앞 오거리 쪽 홍등가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 둥 하는 그 소문은 여전히 있었다. 제법 우리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관심 있을 법한 성적인 주제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소문을 말하는 녀석이 있으면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했지만 소문의 싹은 잘리지 않았다. 오늘 진방이와 기영이가 싸운 것도 사실 그 때문이었다. 언젠가 진방이가 자기 큰 형이랑 홍등가 앞을 지나는데 기영이 새엄마가 "총각 오이 좀 닦고 가"라고 호객행위를 했다며 진방이가 교실에서 떠벌린 것이었다. 진위여부를 떠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휘와 표현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술렁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기영이가 곧장 책상 위로 날아서 진방이와 엉겨 붙은 것이었다. 진방이 녀석도 키는 작지만 덩치가 있는 편이라서 밀리지 않고 서로 몇 번이고 주먹이 오갔다. 기영이가 마지막으로 진방이를 때렸을 때는 뭔가 깨지는 듯한 빡! 하는 소리가 들렸고, 싸움이 격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두 녀석의 사이로 몸을 던졌다. "그만" 내가 악다구니를 섰지만, 둘 중 누군가가 휘두른 주먹에 오른쪽 귀를 맞아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졌다. 그때 의자가 하나가 바로 옆으로 날아와 우당탕 소리가 났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봤더니 정후였다.
"아 씨발,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정후는 언제 왔는지 먼저 진방이의 가슴팍을 힘껏 밀어버렸다. 정후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진방이가 밀려 책상 하나와 함께 넘어갔다. 그 사이 나는 기영이의 양 어깨를 붙잡고 청소함 쪽으로 밀어냈다. 기영이가 이것 놓으라며 온몸으로 반항했다. "야, 그만하라고 했지" 그때 기영이는 다시 나를 떼어내려고 힘껏 나를 밀었지만 나는 상체의 중심을 앞으로 내밀며 버텨냈다. 그리고 나는 오른손 주먹으로 있는 힘껏 기영이의 왼쪽 얼굴을 거의 스칠 정도로 가깝게 그 뒤에 있는 게시판을 때렸다. 나무 합판 위에 녹색 부직포를 덧붙여 만든 게시판이 힘없이 구멍이 뚫리면서 상당히 큰 소리가 '쾅'하고 났다.
기영이는 순간적으로 매우 놀랐는지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싸움구경을 하던 아이들 입에서 "와.." 소리가 나왔다. 그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문이 열리고 김재덕 선생님이 들어왔다. "야!! 너네 뭐야?" 실상 이 싸움의 당사자는 진방이와 기영이 두 사람이었지만, 말리려던 정후와 나까지 선생님께 혼나게 됐다.
"야, 정현이, 조정현! 너 이 새끼 반장이라고 좋게 봤더니 애들이랑 싸움을 해?"
"선생님, 그게 아니고..."
김재덕 선생은 아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내 말을 잘랐다.
"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지금 다 봤는데. 너부터 교탁에 발 올려."
"선생님, 저는 싸움을..."
선생님은 또 한 번 내 말을 자르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선생님 저는 싸움을 말리려고..."
"너 이 새끼 뭐 하는 거야? 발 올리라고 했어 안 했어?"
"선생님 저는 맞을 짓을 한 적이 없..."
"저거 게시판 네가 주먹으로 쳐서 부수는 걸 봤는데 맞을 짓을 한 적이 없어?"
"그건..."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며 김재덕 선생은 자신의 말에 계속 말대답을 하는 내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표정으로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짝'
내 얼굴이 돌아갔다. 나는 놀랐고, 당황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사방에서 김재덕 선생의 손이 날아왔고, 나는 피하고 말 것도 없이 무방비로 맞았다. 선생의 주먹이 내 가슴팍을 때렸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선생은 내 다리를 걷어차버렸다. 나의 몸이 잠시 공중에 뜨는 듯하더니 이내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나만 맞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진방이와 정후까지 손으로, 또 늘 들고 다니는 주걱으로 앞 뒤 가리지 않고 때렸다. 순간 이곳이 학교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되는 나였다.
그때 선생이 내리친 주걱에 정후가 머리를 맞았는데 '빠각' 하고 좋지 못한 소리가 났다. 뜨거운 피가 진방이의 머리에서 이마로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진방이가 옆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은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우리 세 명이 이렇게 맞는 동안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서 있는 기영이였다. 김재덕 선생은 상황 설명은 전혀 듣지 않은 채, 철저하게 기영이만 배재하고 세 명에게만 체벌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방아 괜찮아?"
사실 그 순간 그런 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일단 난 얼른 진방이부터 챙겼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상당했다.
"선생님, 진방이 병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나와 친구들을 향해 미친 듯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을 부를 단어가 '선생님'이라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러웠지만, 일단은 친구의 용태부터 챙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선생도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는지 아이들에게 자습을 시키고 진방이를 냅다 둘러업고는 양호실로 달려갔다. 교실 맨 뒤에 있는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는데 얼굴 한쪽이 부어서 다른 사람의 얼굴 같이 느껴졌다. 문득 나는 담임인 김영락 선생님께 이 상황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담임 선생님은 3반에서 국어과목을 수업하고 있었다. 나는 앞문을 다급하게 두드리고 허락을 받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선생님과 3반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은 내게 "정현아 너 얼굴 왜 그래?"라고 물으셨고 나는 "선생님 진방이가 다쳤어요."라고 말했다. 양호실로 서둘러 이동하는 동안 선생님께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슬램덩크 안 선생님처럼 늘 온화하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양호실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진방이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김재덕 선생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담임은 양호실 안에 들어가 잠시 진방이를 살피더니 김재덕 선생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계속)
* 주의: 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나 지명 등은 실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