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이(1)
다시 기영이의 주먹이 진방이의 광대로 향했다.
떡! 진방이의 광대와 그 주변으로 순식간에 빨갛게 멍이 올라왔다.
기영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었다. 우리 집은 그때도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해마다 이삿짐을 싸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출신 초등학교가 네 군데나 되게 됐다. 5학년 때 서국 초등학교로 이사를 갔었는데 그 녀석은 전학 온 나를 햇살처럼 맞아주던 친구였다. 공부도 상위권이고, 운동도 잘하던 기영이는 늘 밝고 명랑했다. 나도 새 친구들과 꽤 잘 어울리고, 어디 가나 금방 적응하는 편이었지만 이 친구는 그야말로 빛이 났다. 날렵한 눈매에 훤칠한 키, 자신감 있는 목소리와 리더십, 그리고 무엇보다 축구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기영이의 별명은 호나우두였다. 17세에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의 최연소 선수로 참가하여 우승트로피까지 거머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된 호나우두의 이름은 녀석의 별명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 번은 옆 반 애들이랑 반대항으로 경기를 할 때였다. 기영이가 드리블을 하고 전진하면 수비수들이 마치 기영이를 피해서 양 옆으로 휙휙 비켜주는 듯한 그림이 펼쳐지고, 중앙선 부근에서 금세 골대 앞으로 질주하던 녀석은 깊게 들어오는 태클을 피해 공을 두 발로 움켜쥐고 독수리처럼 날아올랐다. 사뿐히 땅에 내리 앉은 기영이의 발 끝에서 뿜어 나온 공은 골키퍼가 서 있던 반대 방향으로 낮게 깔려 뻗어나갔다. 철썩! 그물에 공이 온몸을 던졌고, 그것이 그가 혼자 만들어 낸 일곱 번째 골이었다.
"야, 새끼야 넌 진짜 호나우두야."
"아까 기영이 돌면서 수비수 제치는 거 봤냐?"
"골키퍼 가지고 놀다가 제치고 골대 안으로 들어간 건 어떻고?"
아이들이 침이 마르도록 기영이를 칭찬했고, 나는 기영이가 받는 그 칭찬들이 마치 내 칭찬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기영이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 기영이와 나는 언제나처럼 함께 걸었다.
"야, 우리 집 갈래?"
"그럴까? 게임기 해도 돼?"
"아니, 안돼. 아빠 와 있어."
기영이의 아버지는 선장님이었다. 그냥 오징어잡이 같은 작은 배 선장 말고, 진짜 먼바다에 한 번 나가면 6개월에서 1년씩 보내다 오는 그런 큰 참치잡이 배 같은 것을 모는 선장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기영이네 집에는 거의 아빠가 안 계시고, 기영이 엄마, 기영이 동생 가영이 이렇게 셋만 있었다. 가영이는 아직 미취학으로 5학년이던 우리보다 한참 어려서 오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내가 기영이네에서 놀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로등 곁에서 하루살이들이 발광을 하기 시작할 때쯤 집을 나서려고 하면 가영이가 늘 내 팔을 붙들고 "오빠 안 가면 안 돼? 오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돼?" 하고 붙잡는 그런 맛이 있었다. "오빠 또 놀러 올게~"하고 집을 나서면 뒤에서 곧장 "우왕~~"하고 가영이의 울음소리가 터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집에 가고는 했다.
몇 번인가 뵌 기영이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걸걸한 데다, 눈썹도 진하고 호랑이 같이 끝이 올라가 있고, 눈은 깊고, 코는 아기 주먹만 하고, 콧수염에서부터 구레나룻과 턱수염까지 다 이어져 있어서 만화영화에 나오는 악당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집에 계실 때면 늘 똑같은 패션이었는데 팬티에 목이 늘어난 러닝셔츠 그게 내가 기억하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기영이는 그런 아버지가 좀 엄하기는 해도 좋다고 했다. 마셜군도에서 폭풍을 만나 죽을 뻔했던 이야기, 해적들과 격투를 벌였던 이야기 등 기영이는 그런 아버지의 무용담을 내게 마치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처럼 신이 나서 들려주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마존에서 벌목 사업을 하시던, 결국 우리집에 큰 가난과 빚을 떠안긴 큰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여하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기영이와 나는 기영이의 집으로 향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친구도 왔어요." 기영이가 먼저 큰 소리로 인사하며 들어갔다.
"어, 그래 왔냐? 정현이도 왔어?"
의외로 늘 무심한듯 했던 아저씨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네, 아저씨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정현이 아버지께서 선생님이시라며?"
"네."
"그래서 그런지 인사성이 참 밝구나."
"감사합니다."
"기영이랑 사이좋게 지내라. 기영이 많이 도와주고~"
"네"
뭘 도와주라는 건지 이해는 안됐지만, 아저씨가 내 이름을 기억한 것도 신기하고, 기영이랑 계속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시는 말씀이 싫지 않아서 나는 웃으며 인사를 드렸다. 아저씨와 짧은 대화를 마친 우리는 얼른 기영이의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 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늘 내가 놀러 가면 반갑게 맞아 주시던 기영이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놀기로 했다. 평소처럼 가방은 아무렇게나 기영이 침대 머리맡 부근에 던져두고, 우리는 <드래곤볼> 만화책을 꺼냈다. 기영이는 그림도 곧잘 그렸는데, 그는 익숙하다는 듯 얇은 모조지를 드래곤볼 만화책에 덧대어놓고 그 위에 선을 따라 척척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이큐점프라는 잡지에 연재 중이던 드래곤볼은 셀의 등장으로 극의 전체적인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초사이어인으로 변한 손오공 일행의 종횡무진하는 활약으로 극강의 재미를 더하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드래곤볼은 단순히 만화책이 아니라 문화였고, 대화의 소재였으며, 일상의 일부분을 장식하는 특별한 무언가였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기영이의 손 끝에서 손오공의 에네르기파를 쏘는 모습이 완성됐다.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 못하던 나로서는 그것이 묘기 같이 느껴졌다.
"기영아, 넌 커서 만화가 될 거야?"
"아니, 난 엄마처럼 화가가 되고 싶어."
"엄마가 화가야?"
"아니, 지금은 화가는 아닌데 예전에 미술을 전공했대.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결혼하면서 포기했대."
"아, 그래? 잘 모르겠지만 왠지 멋지다. 근데 만화는 안 그릴 거야?"
"그려야지, 난 드래곤볼 보다 더 재밌는 만화를 그릴 거야."
"좋아. 난 네 첫 번째 독자가 되겠어. 대신 야한 장면도 많이 넣어줘."
"그래, 좋아. 야한데 재밌고, 재밌는데 신나고, 신나는데 박진감 넘치는 만화를 그리겠어."
우리는 서로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사실 난 그날 기영이의 엄마가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말이 좀 신비롭게 들렸다. '아, 엄마들도 꿈이 있는 거구나' 그 당연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날 나는 집에 돌아가면 우리 엄마의 꿈이 뭐였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집에 가는 동안 잊어버려서 그 질문을 실제로 엄마에게 한 것은 매우 나중의 일이다.
그런데, 그날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기영이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그리고 내가 그 집에 놀러 가는 것 또한 마지막이 될 줄은 말이다. 알고 봤더니 그날 기영이 엄마는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은 기영이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