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일까?
학기 초 첫 조회 시간, 교실 안에는 아직 서로를 다 모르는 애들 특유의 어색한 공기가 떠 있었다. 그 앞, 교탁 옆에는 꽤 뚱뚱한데도 왠지 살 속에 단단한 근육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작고 다부진 선생님이 서 있었다. 국어과 선생이자 2학년 1반 담임인 김영락 선생이었다. 순둥순둥하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네모난 안경, 그리고 쉰을 갓 넘긴 나이답지 않게 거의 백발에 가까운 머리. 그 모습이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을 너무 닮아서, 애들은 뒤에서 그를 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김 선생인데 별명은 안 선생님인 셈이었다.
2학년에 올라간 첫날, 김영락 선생은 정현을 임시 반장으로 세웠다. 학기 초가 좀 지나고 한가해지면 반장선거를 하겠다더니, 결국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정현이 계속 반장이 됐다. 한 번은 왜 하필 자기를 반장으로 시켰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김영락 선생은 별 뜻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우리 반에서 1학년 때 성적이 제일 좋던데?”
듣고 보니 납득할 만했다. 정현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반장.”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실실 웃으며 정현을 부르는 녀석이 있었다. 이름은 김충근. 말이 조금 어눌하고, 공부도 느린 편이었다. 학기 초에 애들이 발음 이상하다고 놀리던 걸 한 번 말려준 뒤로는 이상하게 정현을 잘 따랐다. 다른 애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데, 충근이는 4교시까지만 반에서 수업을 듣고 5, 6교시는 특수반 교실로 갔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끝나기 5분 전이면 정현이 충근이를 데리고 그쪽까지 같이 가 주곤 했다. 김영락 선생이 부탁한 일이기도 했다.
“충근아, 나도 내 이름 있거든?”
“눠 이름이 반장 아늬야?”
“조. 정. 현. 어제도 말해줬잖아.”
“아?! 늬가 정현이야? 반장이 아늬야?”
“반장 맞는데, 이름도 정현이라고.”
충근이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금세 웃었다.
“그래. 반장 맞아. 반장. 맞지? 반장?”
결국 정현이 먼저 포기했다.
“어… 그래. 반장 맞아.”
충근이를 특수반 교실 앞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려는데, 충근이가 손을 흔들었다.
“반장 잘 가~ 반장~ 곰아워~”
정현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자기가 뭐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없는데, 충근이는 매일같이 고맙다고 말했다.
“어, 충근아. 수업 잘 들어.”
딩동댕동.
오늘따라 5교시 시작종이 더 빨리 울리는 것 같았다. 정현은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가 벽에 붙은 경고문을 봤다.
교내 정숙
뛰는 대신 총총걸음으로 속도를 높였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교실로 돌아갔다.
5교시는 영어 시간이었다.
영어과목의 김재덕 선생은 눈매가 얇고, 얼굴도 작고 길쭉한 편에, 입술까지 얇아서 어딘가 얍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종 치고 들어오는 정현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얼른 앉아라. 속 안 좋아도 종 치면 일단 끊고 오고, 들어와서 다시 손 들고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해야지.”
“특수반 동행 다녀왔어요.”
“그래, 특수임무 하느라 고생했다.”
애들이 억지로 웃었다.
김재덕 선생은 재미없는 농담을 던져놓고, 안 웃으면 웃을 때까지 비슷한 농담을 더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들은 보통 적당히 입꼬리만 올리거나 “하, 하, 하” 하고 소리라도 내줬다.
그 사람의 수업 방식은 처음 겪었을 때 너무 이상해서 아직도 정현 기억에 선명했다. 2학년 1학기 첫날, 김재덕 선생은 영어 교과서 맨 뒤 단어 정리 부분을 펴라고 했다.
“자, 여기 총 천이백 단어 들어 있지? 지금부터 한 달 동안 너희는 이걸 다 외우게 될 거야. 확인은 간단해. 매주 화요일, 목요일, 무작위로 백 단어씩 시험 본다. 틀린 개수대로 발바닥 맞는다. 쉽지? 질문 있는 사람? 없지? 오케이.”
그 뒤로 진짜 매주 두 번씩 백 문제 영단어 시험이 나왔고, 틀린 개수대로 주걱으로 발바닥을 맞았다. 김재덕 선생은 첫날밤에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발바닥을 때리는 게 정력에 좋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고, 몇몇 애들은 뭘 아는 얼굴로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짜 시험지가 눈앞에 깔렸기 때문이다.
“자, 짝꿍이랑 바꿔서 채점했지? 1번부터 앞으로 나와서 시험지 내고, 교탁에 발 올리고 틀린 개수 큰 소리로 외쳐. 방법은 두 가지야. 열 개 이상 틀린 놈들은 열 개짜리 슈퍼파워 한 대로 맞을지, 잔잔하게 열 대로 맞을지 골라. 알겠지? 자, 1번.”
“12개요. 슈퍼파워요.”
“오~케이.”
떡!!!!!!!!!!!! 따닥!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한 한 대를 맞은 녀석이 나머지 연타가 발에 닿자마자 윽 소리를 내더니 자기 발을 움켜쥔 채 교탁 아래로 주저앉았다. 정현을 포함한 애들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자, 지금부터 피하거나 넘어지는 놈은 두 배~ 2번.”
“7개요.”
따다다다다다닥.
“다음.”
“40개요. 잔잔하게요.”
따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10개요. 슈퍼파워요.”
떡!!!!!!!!!!!
정현은 illegal에서 l을 하나만 써서 딱 하나 틀렸다. 반에서 제일 많이 맞춘 쪽이었지만 특별대우는 없었다. 딱 한 대. 그런데도 발바닥에 전기가 찌릿하고 흐르는 것 같았다. 첫 주 영어시간은 단어시험 보고 발바닥 맞다가 거의 다 끝났다. 김재덕 선생은 지친 기색도 없이 웃는 얼굴로 애들 발바닥을 후려갈겼다. 손목만 경쾌하게 튕기는데, 보고 있으면 저 사람은 남 발바닥 때리려고 태어난 인간인가 싶었다.
“이게 다 정력에 도움이 되는 거야. 나중에 졸업하면 스승의 날 감사하다고 선물 사들고 올 거다. 다 너희 위해서 이러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입꼬리 한쪽이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저 선생은 변태가 틀림없다고, 정현은 생각했다.
한 번 그렇게 맞고 나니 아이들의 영단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등하굣길에 수첩에 단어를 적어 외우고, 쉬는 시간마다 뜻과 철자를 중얼거리는 애들이 생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반 애들 대부분이 천이백 단어를 줄줄 외우게 됐다. 외삼촌이 군대 가면 “처맞으면 다 된다”던 말이 있었는데, 정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선험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The chief Joseph surrendered to the American army…”
목요일 식후 5교시, 김재덕 선생이 교과서를 읽는 목소리는 이제 거의 자장가 같았다. 정현은 눈꺼풀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18번!”
18번이던 영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뒤에.”
그 뒤에 앉은 건 정현이었다.
반쯤 졸다가 황급히 일어났다.
“다음 부분 읽어.”
“야… 어디야?”
소곤거리며 짝꿍 규호에게 물었지만, 규호는 자기도 모른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정현이 당황해서 선생 쪽을 보는 순간, 분필이 날아와 이마 한가운데 박혔다.
딱.
“야, 내가 해태 투수로 갔으면 선동렬이도 벤치나 달궜을 텐데 말이야.”
김재덕 선생이 고소하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짝꿍.”
그 사이 읽던 곳을 어떻게든 찾아낸 규호가 벌떡 일어났다.
“넌 뒤로 나가서 손 들고 있어.”
“Chief Joseph was shocked…”
규호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정현은 교실 맨 뒤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선생 입장에선 집중하라고 뒤로 내보낸 거겠지만, 보통 학생들은 그런 순간에 더 많은 딴생각을 하게 마련이었다. 정현도 그랬다.
오늘 아침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잠깐 허벅지에 닿았던 여학생의 엉덩이 감촉, 갑자기 출발한 버스 때문에 자기 쪽으로 휘청이며 넘어오던 몸, 당황해서 귀와 목덜미까지 빨개졌던 얼굴. 무엇보다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샴푸 냄새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정현은 나도 모르게 손등으로 얼굴 온도를 재 봤다. 손등에 닿는 체온이 제법 뜨끈했다.
딩동댕동.
수업 종료 종이 울렸다.
“반장~”
“네.”
“네가 반장이야? 반장이 집중 안 할래?”
“죄송합니다.”
“됐고, 이따가 유인물 애들 나눠줄 거 있으니까 교무실 들러.”
“네.”
드르륵, 탁.
김재덕 선생이 교실문을 닫고 나가자 정현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교실 뒤쪽 공기가 먼저 달라졌다.
애들 몇이 의자를 끄는 소리, 누군가 짧게 숨 들이마시는 소리.
웅성거림이 한쪽으로 쏠렸다.
“너 오늘 진짜 뒤져볼래?”
“야, 이 씨발새끼야. 안 놔? 이 개호로새끼가.”
“네가 먼저 놔, 이 씨발놈아.”
창가 맨 뒷자리였다.
기영이와 진방이가 서로 멱살을 잡은 채, 얼굴을 거의 들이민 상태로 노려보고 있었다. 둘 사이로는 이미 책상이 반쯤 밀려 있었고, 주변 애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원을 만들듯 몰려들었다.
“거지같은 너네 집이나 잘 간수해, 씨발.”
기영이 먼저 이를 드러내듯 내뱉었다.
기영이랑 진방이가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며 서로의 멱살을 잡고 안 놔주고 있었다.
“이 창녀 새끼가.” 진방이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기영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느그 엄마 창녀라고 했다.”
짝! 진방이의 손바닥이 기영이의 얼굴을 크게 돌려 버렸으나 여전히 둘의 손은 서로의 멱살을 단단히 잡은 상태였다. 두 명 주위로 반 아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다시 기영이의 주먹이 진방이의 광대로 향했다.
떡! 진방이의 광대와 그 주변으로 순식간에 빨갛게 멍이 올라왔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