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잡을 정, 소리 현
꿈속에서 내 몸은 송곳으로 변해 있었다. 항상 날카로운 부분이 머리 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발이 뾰족한 날이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늘 똑바로 서지 못하고 늘 불안했던 걸까...
"엄마!!!!!!! 왜 나 안 깨웠어? 7시 20분 넘었잖아. 집에서 30분에는 나가야 된다니까."
"아들, 일어났어? 엄마가 아까 깨우니까 네가 오 분만 오 분만 하면서 안 일어났잖아."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엄마 오늘 무슨 요일이야?"
"오늘? 글쎄다. 저기 냉장고 옆에 달력 있으니까 네가 한 번 보렴. 엄마도 요새 날짜 가는 걸 모르겠더라."
"오늘이 17일이니까... 와 씨, 목요일이네 오늘 체육이 교문담당인데 지각하면 뒤지는데 클났다. 엄마 나 오늘 아침 안 먹고 가."
"너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끓여놨어 얼른 비벼서 한 숟갈만 뜨고 가."
"안돼, 울 체육 배구 선수출신이라 손바닥이 솥뚜껑인데 그걸로 맞으면 아들 후두부 골절로 사망해. 다녀올게~"
(아들이 후다닥 나간 뒤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녀석... 밥 좀 챙겨 먹고 다니래도. "
중학교에 들어온 지 오늘로 578일째, 경흥 중학교 2학년 1반 내 이름은 조정현. 바로잡을 정(訂)에 소리 현(䚯)을 사용한다.
세상을 바로잡는 소리가 되라고 고현정사 주지스님이 지어 주셨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고현정사 유치원을 다녔었는데, 그때까지 우리 집은 불교였던 건가? 한 번은 엄마에게 물어봤는데 대충 얼버무리시는 게 제대로 답해줄 생각이 없으신 듯하다.
궁금할지 모르겠지만 내 소개를 조금 하자면 나는 창녕 조가 감사공파 이십 사대손의 장손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실제로는 집안에서는 서열이 두 번째지만, 집안에서 큰 사고만 치셨던 큰 아버지가 최근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큰 어머니가 외국으로 사촌들을 데리고 이민 가시면서 결국 나는 사실상 사촌형인 조대현의 뒤를 이어 장손의 자리에 등극하게 됐다. 큰 아버지는 국내 굴지의 가구업체에 브라질산 원목을 대는 사업가셨는데, 아마존을 누비며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시며 조카인 나에게 자신이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라고 하셨다. 난 그런 큰 아버지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등에서 가져온 동전들을 용돈이라며 내게 주셨는데, 나는 그것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겨 내가 수집하던 외국 우표들과 함께 수집했다.
전해 듣기로 큰 아버지에게 보증을 서 줬다가 우리 집은 한 번 제대로 망했고, 서울에서 꽤 큰 규모의 슈퍼를 운영하던 우리 집은 갈 곳이 없어 엄마의 고향인 이곳 덕포로 내려오게 됐다. 핏덩이인 나를 안고 부모님은 냄비 하나 못 챙기고 차압딱지 붙은 집과 가게를 빼앗긴 채 어쩔 수 없이 귀향하셨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침 사범대를 나오셨었고, 교원 자격증 및 다양한 자격증을 준비해 두셨던 덕에 덕포의 한 사립학교 교사로 부임하실 수 있었다. 엄마는 그게 다 당시에 유지셨던 외할아버지께서 힘을 써주신 덕분이라고 하는데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인맥과 학연으로 웬만큼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었겠지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이, 반장!"
신기하게 반장이 내 이름도 아닌데 이 소리만 들으면 고개가 돌아간다. 마침 우리 반 '문정후'라는 애가 날 먼저 알아보고 인 사를 건넸다.
"여~ 자라~" 나도 오른손을 들어 인사했다.
신안의 아주 작은 섬 ‘자라도’ 출신이라서 별명이 자라인 정후는 어렸을 때 그네에서 떨어져 눈에 흉터가 길게 있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사가트라는 캐릭터처럼 흉악하게 생겼지만 무려 경찰대 진학이 꿈인 나름 모범생인 친구다. 녀석도 나처럼 키도 덩치도 모두 큰데다가, 변성기도 일찍 와서 그런지 친구들은 이 친구를 무서워한다. 나도 1학년 때 얘네 반에 있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들 어갔다가 대뜸 "다른 반은 꺼져"라고 말하는 녀석과 싸울 뻔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때마침 종이 쳐서 녀석이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고 다음 쉬는 시간에 따지러 찾아갔는데, 벌써 그 녀석의 손에 다른 녀석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반 맨 뒷 자리와 게시판 사이에서 녀석의 손에 목이 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을 본 순간 '아 저게 내가 될 수도 있었겠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몇 번 그 녀석 반이랑 반대항으로 축구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됐다. 몸싸움하다가 내가 녀석을 날려버렸는데 팔다리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쿨하게 "남자가 운동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한 녀석의 남자다운 태도에 내가 도리어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자라새끼라 그런가 학교는 겁나 늦게 기어가네?"
"넌 반장이란 새끼가 지각하겠네?
"지금 버스 오면 지각 안 하거든?"
"어, 넌 달리기 느려서 지각~"
"자라보단 빨라서 안 지각~"
우린 그 또래 남자애들이 다들 그렇듯이 친근감을 험한 말과 욕지거리로 표시하고는 했다.
"어, 1번 버스 두 대 같이 온다."
그때, 한 고등학생 형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진짜 1번 버스 두대가 나란히 정류장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말은 오늘 앉아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았다. 나는 얼른 지갑에서 학생용 회수권을 꺼낸다. 그런데 나는 멀쩡한 회수권을, 자라 녀석은 어제 열심히 비벼서 두 장으로 만든 한 장짜리 회수권의 반쪽 면이다. 다들 알다시피 정성을 다해서 회 수권을 비비면 종이를 덧대어 만들었기 때문에 두 장이 되기도 하고, 그냥 찢어져서 날리기도 했는데 자라 녀석 역시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회수권 비비기에 열중했던 것은 회수권 가격을 아낀 나머지 돈이 그 달의 용돈이 되기 때문이다.
"넌.. 커서 경찰 되겠다는 새끼가, 나중에 커서 훌륭한 화폐위조범 되겠다."
"까는 소리 하네. 지금 이렇게 아껴야 학비에 보태지. 우리집 겁나 가난한거 알잖아."
"가난이 범죄를 정당화 하지는 않거든? 넌 내가 버스 기사 아저씨한테 다 말할 거야. 이 새끼 회수권 위조범이라고. "
"야, 쫌 봐줘라.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이 찔러도 피도 안 나올 새끼.."
"뭘 봐줘. 넌 콩밥 좀 먹어야 정신차릴 놈..."
"야야, 닥치고, 버스나 타자. 이러다 놓친다."
버스가 정류장에 흙먼지를 뿌리면서 멈춰 서자 순간적으로 한 줄이었던 줄이 서너 줄로 바뀌었다. 자라, 아니 정후와 나는 앞 다투어 버스에 올라탔고, 버스 중문 근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볼일 급한 신부처럼 후다닥 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정후가 안 쪽에 나는 문 쪽에 앉았다.
"거 봐 내가 더 빠르지?"
"네가 쳐 밀었잖아."
"밀린 놈이 병신이지."
"병신을 미는 놈이 인간이냐?"
"그러네?"
우리는 낄낄거렸고 몇 년이나 된지 모를 낡은 버스는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기분 좋게 몸이 뒤로 밀리는 느낌에 등을 좌석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배 앞에 둔 가방을 움켜쥐는데 가방에서 반찬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서울에는 급식이라는 게 생겼다는데 우린 지방이라 그런 건 아직 없어서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데, 보통 우리 학교 애들은 남학교라 그런지 도시락을 두 개씩 들고 다닌다. 2교시 끝나고 까먹을 용도로 하나, 4교시 끝나고 점심시간에 까먹을 용도로 또 하나, 그러고도 모자라서 매점은 항상 인산인해를 이룬다. 왜 돌아 서면 배가 고픈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끼이이익 제법 긴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섰다. 이번 정거장은 덕포여자 상업 고등학교 덕포여자 상업 고등학교입니다.." 공부는 못해도 예쁜 누나들이 많기로 소문난 여상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오늘따라 버스 두대가 나란히 온 덕분에 버스 안은 평소 등교시간과 달리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버스에 올라탄 여학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맨 앞에 오 는 한 여학생의 미모에 내 마음도 잠시 설렜다. 깻잎 머리로 날카롭게 앞이마를 커버한 한 여학생이 맨 앞에서 내 방향으로 걸 어오는 걸 보고는
"야, 자라. 저 누나 겁나 예쁘지 않냐?"
"쳐다보지 마라 저 누나 일진이다."
"아는 누나야?"
“딱 보면 모르냐? 등교시간인데 지네 학교에서 버스 타잖아. 1교시 부터 학교 땡땡이 치는거 아냐. 개날라리지. 너, 성훈이 형 알지? 그 형이 불러서 형들 노는데 한 번 따라간 적 있는데 저 누나가 덕여상 짱이라던데?"
"성훈이 형이면..아. 진짜? 저 순진하고 천사같은 얼굴에 짱이라고?"
"어, 저 누나가 한 번은..."
그때, 버스가 급하게 출발을 했다. 깻잎 머리의 덕여상 짱이라던 여학생은 발을 한 번 헛디디는 듯하더니 내가 앉은 방향으 로 일자로 달려왔다. 우다다다다다다 털썩.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잠시 판단이 안 섰지만, 그 여학생이 내 무릎에 앉았다. 내 무릎에 말이다. 진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말캉한 촉감과 아찔 한 샴푸 냄새에 나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얼굴이 벌게지고 귀까지 빨개져서 어버버 하는 내 가슴을 그 여학생은 살짝 밀어내며 "미안."이라고 중얼거리듯 말하고 후다닥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 여학생의 친구들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키득 키득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고, 나는 내 심장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들릴까 봐 걱정이 됐다.
"이.. 이게 무.. 무슨.."
먼 산 보듯 창밖을 보며 낄낄거리는 자라 아니 정후의 뒤통수를 한 번, 그 여학생 쪽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던 나는 부끄러움에 가방에 얼굴을 푹 하고 묻어버렸다. 그리고 나중에 정후에게 전해 듣기로는 그 여학생이 다음 정거장에서 그대로 내려버렸 다고 했다. 거의 한 일주일 동안은 그 여학생의 촉감과 샴푸냄새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향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 샴푸 브랜드를 알아내서 내 방에 뚜껑을 열어둔 채 디퓨저로 사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 중학교 2학년 남학생에게 그 경험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누나를 다시 만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