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잡을 정, 소리 현
꿈속에서 내 몸은 송곳으로 변해 있었다. 항상 날카로운 부분이 머리 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발이 뾰족한 날이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늘 똑바로 서지 못하고 늘 불안했던 걸까...
정현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꺾어 신다가 또 한 번 휘청했다.
왼발 뒤축이 반쯤 접혀 있었다. 그는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가 말없이 발을 밀어 넣었다. 아까 꿈에서 송곳으로 서 있던 감각이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한쪽으로 기울고, 중심을 잡으려 할수록 더 우스워지는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는 순간 그 감각은 바로 현실이 됐다.
일곱 시 이십삼 분.
“엄마!”
정현의 목소리가 현관과 부엌 사이를 한 번에 찢었다.
“왜 나 안 깨웠어? 나 삼십 분엔 무조건 나가야 된다니까!”
부엌 쪽에서 국 끓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 목소리가 날아왔다.
“깨웠지. 근데 네가 오 분만, 오 분만 하다가 다시 잤잖아.”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엄마, 오늘 무슨 요일이야?”
“오늘? 글쎄다. 달력 좀 봐라. 냉장고 옆에 있잖아.”
정현은 셔츠 단추를 끼우던 손을 멈췄다.
“엄마, 오늘 무슨 요일이라고?”
“목요일 일걸.”
정현은 부엌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달력을 올려다봤다. 십칠일. 목요일.
목요일.
그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와, 씨 미치겠네”
어머니가 냄비 뚜껑을 들며 흘겨봤다.
“상스런 말은 쓰면 안되지.”
“아니, 오늘 체육이 교문 선도 서는 날이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지각하면 죽는 날이지.”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국자를 한 번 젓더니 말했다.
“선생님이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할려고?”
정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 소자 어머니께서 그 인간 손바닥 직접 보시기 전이라 그런 것으로 아뢰옵니다. 그건 손이 아니라 솥뚜껑이야. 솥뚜껑.”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표 김치찌개 냄새가 확 퍼졌다. 잘 익은 김치 냄새, 돼지고기 기름 냄새, 밥 생각이 절로 나는 냄새였다. 정현의 배가 타이밍 좋게 꼬르륵 울었다.
어머니가 바로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앉아. 밥 한 숟갈만 뜨고 가.”
“안 돼.”
“한 숟갈이라도 먹고 가야지.”
“한 숟갈 뜨다 보면 두 숟갈 먹고, 두 숟갈 먹다 보면 세 숟갈 먹고, 그러다 후두부 골절로 사망.”
“하하, 녀석 하여튼 말은 잘해.”
어머니는 툴툴거리면서도 이미 도시락가방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김이 조금 빠진 밥통, 반찬통, 수저집. 정현이 허둥대는 동안 챙길 건 다 챙겨 둔 모양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정현은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기는 늘 뭔가에 쫓겨 허둥거리는데, 어머니는 그 전에 이미 자기가 챙겨야 할 것들을 다 챙겨 둔 뒤였다. 그럴 때마다 혼자만 어딘가 덜 여문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가 도시락가방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오늘 너 좋아하는 햄도 넣었다.”
“오.”
정현은 올라오는 허기에 잠깐 흔들렸다.
“아니, 엄마 김치찌개 냄새가 너무 사기잖아.”
“그러니까 일찍 일어나랬지.”
정현은 도시락가방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오늘은 진짜 안 돼. 나 지금 뛰어도 간당간당해.”
“계단에서 뛰지 마라. 너 그러다 꼭 넘어져.”
정현은 현관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지금 안 뛰면 다른 데서 넘어져.”
“뭐?”
“다녀올게!”
문이 닫혔다.
정현은 곧장 뛰었다.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가다가 한 번 발을 크게 헛디뎠다. 난간을 꽉 움켜잡지 않았으면 그대로 미끄러졌을 터였다. 순간 아침 꿈이 떠올랐다. 뾰족한 끝으로 바닥을 짚고 간신히 버티던 송곳. 그는 혀를 찼다.
“아, 재수 없네…”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덕포의 아침 공기가 바로 얼굴에 붙었다. 축축한 바닷바람, 멀리서 날아오는 비린내, 골목집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된장국 냄새, 어디선가 켜 놓은 라디오 소리. 아침의 동네는 늘 비슷했지만, 늦잠을 잔 날에는 그 모든 게 유난히 선명해졌다.
정현은 책가방을 한 번 추켜올렸다. 가방 안에서 도시락통이 덜컹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맞춰 마음도 같이 덜컹거렸다. 버스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 버스만 타면 된다.
중학교에 들어온 지도 오늘로 578일째였다. 경흥중학교 2학년 1반. 이름은 조정현. 바로잡을 정(訂)에 소리 현(䚯). 세상을 바로잡는 소리가 되라고 고현정사 주지스님이 지어 준 이름이라고 했다.
참고로 정현의 집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정현은 가끔 그 점이 제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고현정사 유치원을 다닌 건 맞는데, 그럼 그때까지 집이 불교였던 건지, 아니면 그냥 절이 가까워서였던 건지. 전에 한 번 어머니께 물어본 적은 있었다. 어머니는 대충 얼버무렸고, 정현이 보기엔 그건 ‘나중에 알면 된다’가 아니라 ‘굳이 지금 말해 줄 생각은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골목을 꺾어 뛰어가며 그는 잠깐, 정말 잠깐 옛날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이 동네로 내려온 게 얼마나 오래전이었는지도 이제는 가물가물한데, 가끔은 아직도 덕포가 자기 동네 같지 않을 때가 있었다. 차압이니 보증이니 하는 단어는 어려서 다 몰랐지만, 그 단어들이 집안 공기를 얼마나 눅눅하게 만드는지는 일찍 배웠다.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밤이면,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까지 죽이게 됐으니까.
나중에야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큰아버지 보증을 섰다가 집이 한 번 제대로 무너졌다고 했다. 서울에서 제법 큰 슈퍼를 하던 집이 순식간에 기울었고, 부모님은 핏덩이였던 자기를 안고 어머니 고향인 덕포로 내려왔다. 어른들 말에 따르면 그때는 냄비 하나 제대로 못 챙길 만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범대를 나왔고, 교원 자격증이며 이런저런 자격증을 미리 따 둔 덕에 덕포의 사립학교 교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게 다 외할아버지가 사위 자존심 상할까봐 몰래 뒤에서 힘을 써 준 덕분이라고 말했지만, 정현은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몰랐다. 그 시절엔 원래 그런 게 가능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정현은 자기소개를 하라면 늘 애매했다. 학교에서는 그냥 경흥중 2학년 1반 반장 조정현이면 끝날 일을, 집안 어른들은 꼭 창녕 조가 감사공파 이십사대손이니 장손이니 하는 말까지 덧붙였다. 정확히는 ‘장손 포지션’이라는 말이 정현 머릿속에는 더 잘 맞았다. 실제로 아버지는 집안 서열로 둘째였지만, 큰아버지가 큰 사고를 치고 큰어머니가 사촌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난 뒤로는 자기가 사실상 부재인 사촌형 조대현의 바로 다음 장손 취급을 받게 됐으니까. 아직 중학교 2학년인데 장손 소리를 듣는 건 우습기도 하고, 묘하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는 그 생각을 금방 털어냈다. 지금은 집안 사정보다 1번 버스가 더 급했다.
정류장에는 이미 애들이 몇 무리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 문정후였다.
자라.
처음 애들에게 녀석의 별명을 들었을 때는 너무 성의 없어서 웃겼다. 신안 자라도 출신이라 자라라니. 그런데 별명이란 게 원래 그렇게 붙고 나면 오래 간다. 정후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데다, 왼쪽 눈가에 길게 난 흉터 때문에 가만히 서 있어도 싸움 잘할 것처럼 보였다. 변성기까지 일찍 와서 목소리도 혼자 한참 굵었다.
“어이, 반장.”
이상하게도 이름보다 그 호칭에 먼저 고개가 돌아갔다. 정현은 숨을 고르며 손을 들었다.
“여, 자라.”
정후가 피식 웃었다.
“넌 반장이라는 새끼가 오늘 또 지각하겠다.”
“버스만 바로 오면 안 늦거든.”
“꼭 지각하는 새끼들이 그 말을 제일 많이 하더라.”
“너야말로 자라 너는 섬에서 와서 시간 개념이 없나?”
“너 지금 섬 무시했냐?”
“아니. 자라 너를 무시한 거지.”
정후가 헛웃음을 쳤다.
“아침부터 맞고 싶냐.”
“니 느려터진 주먹은 내가 두 눈 감고도 피하거든?”
둘은 동시에 웃었다. 제법 험한 말투가 오가도 이상하게 딱 그 정도 선은 지켰다. 남자애들끼리 친해지는 방식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정현은 지갑에서 학생용 회수권을 꺼냈다. 그때 지갑 안쪽에서 낡은 외국 동전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큰아버지가 예전에 용돈이라며 쥐여 준 것이었다. 과테말라였는지 온두라스였는지, 니카라과였는지, 어릴 때는 이름만 들어도 무슨 모험담 같던 나라들이었다. 큰아버지는 국내 굴지의 가구업체에 브라질산 원목을 대는 사업을 한다며, 아마존을 누비며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곤 했다. 그러면서 조카인 자기한테는 자기가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라고 했다.
어릴 때 정현은 그런 큰아버지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외국 동전 몇 개를 쥐여 주면 그걸 우표랑 같이 모아 두기도 했다. 나중에 집안이 무너진 사정을 듣고 나서는, 그 동전들도 예전처럼 곱게 보이지만은 않게 됐지만.
그 옆에서 정후가 손에 들고 있는 걸 보고 정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멀쩡한 회수권이 아니었다. 한 장을 정성 들여 비벼 반으로 갈라낸, 누가 봐도 수상한 반쪽짜리였다.
“야.”
정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그거 또 했냐?”
정후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뭘.”
“지랄하지 마. 회수권 위조.”
“위조는 무슨. 절약 정신이지.”
“넌 커서 경찰이 아니라 화폐범죄 전담반에 잡혀가겠다.”
“아 네가 꼰지를라고? 그 잘난 반장이라서?”
“친구니까 봐주는 거야.”
“와, 존나 고맙다.”
정현은 웃다가도 그의 손에 들린 반쪽 회수권을 한 번 더 봤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버스값 몇 번 아끼면 그게 그대로 용돈이 되는 집들이 있었다. 정후네도 잘은 몰라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정현의 집도 남의 사정을 우습게 볼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괜히 입으로는 더 반듯한 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들키면 쪽팔리잖아.”
정후가 그 말을 듣고 잠깐 정현을 봤다.
“넌 이상하게 맞는 말 할 때 더 재수 없어.”
정현도 바로 받아쳤다.
“넌 이상하게 틀린 짓 할 때 더 당당하고.”
정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가난하면 좀 그래도 돼.”
“가난이 범죄를 정당화하진 않거든?”
“야, 그건 선생들이나 하는 소리고.”
정현이 대꾸하려는 순간, 누군가 정류장 끝에서 외쳤다.
“어, 1번 버스 두 대 온다!”
고개들이 한꺼번에 돌아갔다. 진짜였다. 1번 버스 두 대가 나란히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한 줄이던 줄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질서 같은 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정현의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다.
오늘은 앉아서 갈 수 있겠다.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서자 정현과 정후는 거의 동시에 뛰어올랐다. 중문 근처 자리가 두 개나 비어 있었다. 정후가 먼저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정현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 봐. 내가 더 빠르지?”
정후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밀었잖아.”
“어, 밀린 놈이 병신.”
“하여간 경찰대 간다는 새끼가 제일 불법적이야.”
“경찰이 되려면 범죄자의 심리를 알아야지.”
“범죄자의 심리가 아니라 범죄자 그 자체 같은데.”
정후가 씨익 웃었다.
“너 오늘 말빨 좋네. 늦잠 자서 바이오리듬이 좋냐?”
버스가 출발하자 몸이 뒤로 살짝 밀렸다. 정현은 그제야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일단 버스는 탔다. 교문 앞에서 전력질주만 하면 아직 희망은 있었다.
그는 가방을 배 위로 끌어안았다. 그 순간 도시락 냄새가 훅 올라왔다. 김치, 달걀말이, 멸치볶음, 햄. 버스 안에는 원래도 남학생들 냄새가 떠다녔다. 운동화 냄새, 비누 냄새, 땀 냄새, 머리 기름 냄새, 도시락 냄새. 그런 게 다 섞이면 이상하게 학교 가는 냄새가 됐다.
정현은 무심코 자기 셔츠 깃을 한 번 만졌다. 구겨진 게 느껴졌다. 계단을 뛰어내려왔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그는 괜히 교복 앞섶을 펴고 가방끈을 반듯하게 고쳐 멨다. 아무도 자기한테 관심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날따라 더 신경이 쓰였다.
다음 정거장에서 버스가 길게 마찰음을 냈다.
“이번 정거장은 덕포여자상업고등학교, 덕포여자상업고등학교입니다.”
정현이 고개를 들었다.
덕여상 앞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정류장쯤 되면 버스 안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남학생들이 창밖을 보는 척했고, 여학생들이 타면 시선이 분주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버스가 두 대나 붙어 와서인지 안이 평소보다 한산했다. 그래서 더 잘 보였다.
맨 앞에서 한 여학생이 올라탔다.
처음엔 머리만 보였다. 깻잎처럼 비스듬히 이마를 덮은 앞머리. 그 아래 드러난 눈매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예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얼굴이었다. 차갑다고 하기엔 생기가 있었고, 순하다고 하기엔 강한 선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태도였다.
그 여학생은 버스에 올라타면서 단 한 번도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지각이 걱정돼 눈치 보는 애들처럼 서두르지도 않았고,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괜히 웃지도 않았다. 마치 자기가 어디에 있든, 그게 누구 눈에 띄든, 별 상관 없다는 사람 같았다.
정현은 저도 모르게 팔꿈치로 정후를 툭 쳤다.
“야. 저 누나 좀 봐.”
정후가 힐끗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야야, 쳐다보지 마라.”
“왜.”
“일진이야.”
정현은 다시 그 여학생을 봤다.
“진짜?”
“딱 보면 모르냐? 등교시간인데 지네 학교 앞에서 버스 타잖아. 1교시부터 째는 거지.”
“근데 얼굴은 하나도 안 무섭게 생겼는데. 오히려 예쁘장한 편인데?”
정후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애들이 더 무섭지.”
“혹시 아는 사람?”
“내가 직접 아는 건 아니고. 성훈이 형 있잖아, 덕포공고.”
“어.”
“형들 노는데 한 번 따라갔을 때 들었어. 덕여상 짱이라더라.”
정현은 다시 그 여학생을 봤다. 이번엔 얼굴보다 손을 먼저 봤다. 가방끈을 쥔 손가락이 가늘었는데 제법 단단했다. 교복 치마를 대충 입은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흐트러져 보이지 않았다. 정현은 왜 자꾸 저 누나를 쳐다보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예뻐서라고 말하면 너무 단순했고, 특이해 보여서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진짜 덕여상 짱이면…”
정현이 말을 흐리자 정후가 씩 웃었다.
“왜. 실망했냐?”
“내가 뭘.”
“딱 보니 이새끼 사랑에 빠진것 같은데?”
정현은 괜히 정색했다.
“내가 무슨.”
“방금 너 표정이 좀 다르던데.”
바로 그때 버스가 거친 엔진음을 내며 급하게 출발했다.
너무 급하게, 예고도 없이.
앞문 쪽에 서 있던 애들이 동시에 휘청였다. 그중에서도 깻잎 머리 여학생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왼발이 한 번 미끄러지더니 중심이 그대로 정현쪽으로 쏠렸다.
정현은 눈만 크게 뜬 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우다다다.
털썩.
무게가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그 여학생이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이 지나치게 길었다. 몸이 먼저 굳었다. 말캉한 감촉, 교복 치맛자락이 스치는 느낌, 샴푸 냄새. 모든 게 한꺼번에 들이쳤다. 정현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여학생의 옆얼굴만 봤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아까보다 더 낯설었다. 예쁘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건, 표정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놀라서 굳지도 않았고, 민망해서 웃지도 않았다. 중심을 잃은 건 분명 자긴데, 다음 순간 바로 자기 몸을 수습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정현의 가슴께를 손끝으로 가볍게 짚고 몸을 일으켰다.
“미안.”
목소리는 낮았고, 짧았다. 사과 같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정말 미안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이 상황에 필요한 말을 하나 꺼낸 사람처럼 들렸다.
정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까지 열이 확 올랐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들리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옆에서 누가 웃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친구들인지, 뒤에 서 있던 여학생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웃음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른다는 게 더 사람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정현은 무심코 여학생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이미 벌떡 일어나 문 쪽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방금 일이 자기한테 별 의미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무심함이 조금 섭섭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옆에서 정후가 창밖을 보는 척 어깨를 들썩였다.
정현은 그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 가방을 끌어안고 그 안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그러자 도시락 냄새가 확 올라왔다. 김치냄새. 멸치냄새. 집 냄새.
방금 자기 무릎 위를 스치고 간 향기와, 자기 가방에서 올라오는 반찬 냄새가 한꺼번에 섞였다.
그 순간 정현은 처음으로 자기가 어떤 냄새 속에서 사는지를 의식했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했다.
꼭 들킨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엇이 들켰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가난인지, 촌스러움인지, 사춘기인지. 아니면 그 전부인지.
그는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생각보다 더 어리숙했다. 방금 전까지는 그냥 지각할까 봐 바쁜 중학생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자기 혼자만 뭔가를 너무 크게 느껴 버린 얼굴이었다.
정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낮게 말했다.
“야, 반장.”
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너 오늘 표정 진짜 걸작이다.”
“닥쳐.”
“좋아서 죽을라 그러네.”
정현이 고개도 안 든 채 중얼거렸다.
“한 번만 더 말하면 버스에서 밀어버린다.”
정후가 낄낄 웃었다.
“그럼 나도 네 도시락부터 창문 밖으로 던진다.”
정현은 그 말에 바로 가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정후는 그 반응이 더 웃긴지 한참을 숨 죽여 웃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그 여학생은 아무렇지 않게 내려 버렸다.
내리기 직전, 그녀가 이쪽을 한 번 봤는지는 정현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애매함조차 그를 더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차라리 눈이 마주치는게 더 나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버스가 다시 움직였다.
정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 씨. 너는 이런 건 꼭 당첨되더라.”
정현이 마지못해 물었다.
“뭐가.”
“평소엔 세상 재미없는 얼굴 하고 다니면서, 이상한 데서 운 터짐.”
정현은 그 말에 괜히 더 기분이 나빠졌다.
“운은 개뿔.”
“왜. 싫었냐?”
정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싫었다고 하기엔 거짓말이었다. 좋았다고 말하자니 그것도 이상했다. 단순히 설렜다고 하기엔 그 순간 자기 안에서 올라온 것이 너무 많았다. 좋음, 당황, 부끄러움, 초라함. 그런 게 전부 한꺼번에 올라와 버리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 말도 못 하게 된다.
정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튼 너 오늘 학교 가서도 정신 못 차리겠다.”
정현은 창밖만 보았다.
그날 이후 거의 일주일 동안은 그 샴푸 냄새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떠오를 때마다 설레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같이 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자기 셔츠의 구김, 자기 가방 손잡이의 닳은 자국, 자기 얼굴의 붉은 기.
그 누나가 아니라, 그 누나 앞에서 드러난 자기 꼴이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정현은 나중에도 그날을 생각하면 먼저 심장이 뛰기보다 목이 조금 뻣뻣해졌다.
좋아서였는지, 부끄러워서였는지, 그는 오래도록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하나였다.
버스 안에서 잠깐 자기 무릎 위에 앉았다 간 그 여학생은,
단순히 예쁜 사람으로 끝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현이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