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나라
독일에서의 생활은 마치 미로 같은 행정 절차와 맞서 싸우는 미드의 한 에피소드같다. 특히 은행계좌를 개설하는 일은, 간단히 몇 번의 클릭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외국인인 나에게는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과정 중 하나이다. 나는 아직 독일은행계좌가 없고 온라인 은행을 쓰고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대체 뭐하셨어요?"라고 묻는다면, 나름 합리적인 변명을 고하려 한다.
첫 번째, 독일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약속의 땅이다.
'테어민'(약속)의 나라 독일에서는 은행계좌를 열기 위해선 약속을 잡아야 한다. 처음 독일에 도착해 은행계좌를 열려고 했을 때, 나는 필요할 것 같은 서류를 들고 은행에 방문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직업이 없었던 터라, 계좌 개설은 커녕 다시 약속을 잡고 와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은 적어도 일주일 후에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듣고 온라인 은행인 N26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독일은 '문서의 나라’이다. 여기서는 은행계좌를 개설하면, 계좌의 핀번호나 비밀번호를 ‘우편’으로 보내준다. 이런 절차는 은행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공공 서비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공보험에 가입하면 계정을 활성화하기 위한 핀번호가 우편으로 오고, 다른 관공서에 가입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우편으로 비밀번호를 보내왔다. 이렇게 우편으로만 비밀번호를 받을 수 있다는건 여전히 신기한 사실이다.
세 번째, 독일에서는 계좌 이체에 보통 하루 이상이 걸린다. 이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다소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온라인 은행을 사용하면 적어도 같은 은행 간에는 즉시 송금이 가능하다. 그리고 온라인 은행을 사용하면 어떤 ATM에서든 수수료 없이 몇 번정도 출금할 수 있고, 계좌 유지비도 없다는 점이 외국인으로서는 더 매력적인 선택지이다.(그렇다...독일에는 계좌 유지비가 있다...)
내 경우에는 온라인뱅크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어떤 친구들은 직업이 없이 계좌개설에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경우는 온라인뱅크 마저도 언어의 장벽으로 힘들게 힘들게 오픈하기도 한다. 보안에 대한 걱정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위험할만큼의 돈도 없기 때문에 그냥저냥 쓰고있다.
한국에서의 복잡한 본인 인증 절차에 비하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단 은행 계좌를 만들고 나면, 그 이후의 생활이 훨씬 더 편리해진다는 점이다. 비록 독일은 행정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릴지라도, 이 모든 과정을 허허…하면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것이 빨리 적응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