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되기
독일어에는 Fernweh 라는 단어가 있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 여행에 대한 갈망이라는 뜻으로 향수병과는 다르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가 고 전혜린 역시도 그녀의 글에서 여러번 언급하였다. 새해가 올 때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항상 언제나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언젠가부터 똑같은 사람만 만나고 가는곳만 가고 예상할 수 있는 주말을 보낼때마다 그 글을 떠올린다. 내가 그토록 적응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생활기반이 되자마자 지겨워지다니....나는 이곳 생활에 적응한걸까 그냥 타성에 젖고 무뎌진걸까?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했을때 나는 겨우 열 네살이었다. 물 위로 노을지는 베니스의 풍경을 보면서 10년뒤에 꼭 다시 와야지 하고 다짐을 새겼다. 애들의 다짐이 그렇듯 당연하게도 몇달 뒤엔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대학생이 되어 그때의 결심이 떠올라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그 홀로여행하는 즐거움, 문화충격, 새로운것들, 새로운 사람들, 그곳의 친구들, 그리고 당시 가지고 있던 유럽에 대한 낭만과 열망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랬는데..., 절대 떠나고 싶지 않던 베를린도 권태로운 일상이, 습관이, 마침내는 지겨움이 되었다. 지난 달은 어떻게 버텼는지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지루했다. 한국에서부터 동생이 놀러왔었고, 친구도 왔었다. 나 또한 다른도시로 놀러가 잠시동안 여행자가 된 기분을 잔뜩 머금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오랜만에 들뜬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그게 벌써 몇달 전이었다.
작년부터 뉴욕에 살던 친구가 이번에야말로 놀러오지 않겠냐고 부추겼다. 근처 도시에 유학생으로 지내고 있던 오랜 친구와도 계획을 세웠다 . 나는 비상용으로 모으고 있던 돈과, 한국 신용카드를 더해 계산을 해보았다. 가장 비싼 휴가철에 이 돈을 주고 한국이 아닌 다른나라를 여행하는건 오랜만이다. 결제창을 앞에 두고 몇번이나 확인을 한 뒤에야 큰맘먹고 결제버튼을 눌렀다.
잘있어라 베를린. 잘있어라 이 미친놈들아. 잠시동안만 안녕.
뉴욕에서의 경험은 예전에 내가 유럽에서 느꼈던 생생한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새 책을 펼쳤을 때 나는 특유의 냄새처럼 신선하고도 낯선 감각이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30대에도 이런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여행은 역시 좋은 거구나.
뉴욕은 베를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멜팅팟이었다. 동양인 동네에서 몇 블록만 지나도 스페인계 이민자, 그리고 몇블록을 더 걸어가면 유대인 커뮤니티가 나왔다. 다양한 뿌리의 문화, 음식, 예술이 넘쳐나게 펼쳐져 있어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
브룩클린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아침마다 공원에 갔다. 지나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양인인 거리에서 어쩐지 경계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유대인 남자 몇을 지나 10분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베트남인 이민자가 운영하는 반미 가게가 있었다. 현금을 주고 반미와 아이스커피를 사들고 공원으로 걸어간다. 그러면 그 공원 한편에는 중년의 아시안 여자들 모임이 느리고 고요한 음악을 틀어놓고 다같이 천천히 수련을 하고있었고, 다른 한쪽의 그룹은 신나는 음악으로 열심히 줌바댄스를 추고있었다. 아침부터 활기가 넘쳐보였다. 낯선 곳에서 찾은 안락하고 편안한 기분이 좋았다. 이런곳에서 살면 좋겠다. 여기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날 친구 B의 단골이라는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다른 친구가 곧 온다며 나를 소개해줬다.
She is from Berlin
순간 나는 거기서 살고있지만 원래는 한국인이라는걸 덧붙여야할지 말아야할지 잠깐 고민했다. 새로온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B에게 말했다. 왜 베를린에서 왔다고 말해, 난 한국인인데. 친구는 으쓱하면서 툭 내뱉었다. 거기서 온건 맞잖아? No one cares.
몇달 전 뮌헨 예술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의 연간전시를 보러 갔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구의 클라스메이트들에게 , She is from Berlin이라고 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베를린 안에서 나를 소개할때는 언제나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기 때문에 타지에서 이런 소개를 할때에는 어쩐지 어색하다.
이곳으로 이사한지 얼마 안되었을때나 어학원을 다닐 때에는 대답이 쉬웠다. 한국에서 왔어. 이제 몇달째야. 혹은 온지 1년 지났어...5년이 지나자 이 도시에서는 아주 새로운 사람을 만날일은 별로 없고 여행지에서도 친구를 통해서 사람을 만난다. 눈 깜짝 할 새에 5년이 지났고 나는 더이상 새로운 이민자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도시에서는 베를린에서 온사람, 내가 살고있는 이 도시에서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 되는것은 어쩐지 난감한 일이다. 둘 다 맞는 말이지만.
독일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친구가 물었다
'너는 너 자신이 베를리너라고 느껴?"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런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베를리너인거지 뭐"
사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얼마전까지 베를린이 지겨워서 미칠것같다고 불평해댔는데 그렇게 느낄리가 있나. 내 자신이 베를리너라고 느끼냐고? 이 문장 자체가 과장되고 까끌거리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어쩐지 지금껏 잘 지내오던 친구들과 멀어지는것 같다. 이 도시가 이끄는 광기나 가난하게 사는게 스탠다드인 ..그딴 자질구레하고 무질서한것들이 싫어지던 차였다. 더이상 파티를 즐기지도 않고, 술이나 약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다시 평범한 한국인같은 스타일링을 한다. 친구가 말했다. 맞아 어쩌면 넌 뮌헨에 더 어울릴지도 몰라. 너는 클래식 하잖아. 그럼 난 베를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게 된거야?
지루해보이던 뮌헨을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내 마음은 여기서 떠버린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Fernweh라는건 단순히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서 느끼는게 아닐까? 어쩌면 일상의 어느 순간부터 내 일부분이 몇개로 쪼개져서 여기저기로 날아간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찾지 못할 조각이 어딘가에 숨어버려서 그걸 그리워하는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