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한 세계의 사랑 수록作
언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이다. 그 규칙 바깥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그 이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의 언어권 안에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를 호명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에이미라는 사라-17의 로봇 시점에서 전개된다. 앞서 우리는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규칙이라는 사실을 상정했다. 그렇다면 과연 로봇에게도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 규칙은 유효할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근본적으로 권력의 위계임을 알아야 한다. 이 소설 내 세계관에서, 명령을 하는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는 노동 행위들은 로봇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 말인 즉슨, 일반적인 SF 소설 속 개념과 다르게 해당 소설 내 언어 Hegemony는 상당히 인간 중점적인 상황으로 흘러간다.
로봇이 하는 수술은 인간이 하는 수술보다 수술비가 10배나 비싼데도 사람들은 로봇의 손을 선호한다. 인간의 손보다 오차가 없고 정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망 선고는 인간이 하기를 바란다.
당연히 의아함이 든다. 어째서 인간은 정교한 로봇의 힘으로 살고자 하나, 생사를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쩌면 고레에다 감독의 <괴물>에 등장하는 핵심 메시지와 공통된 결의 질문일 수도 있겠다. 인간을 인간으로 상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기억을 가진 로봇을 과연 로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로봇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이미는 이손의 엄마를 자신의 엄마라고 부른다. 이손의 엄마인 박동주 씨 보호자(즉, 유민)을 엄마라고 호명한다. 이손의 엄마를 엄마라고 호명함으로써 이손의 기억칩을 보존한 이들은 공동의 엄마를 가진다. 그것은 곧 그들을 이손과 동일시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이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거야.”
기억 속 ‘나’와 현실의 ‘나’가 다를 경우, 진짜 ‘나’는 무엇일까? 기억이 변한다면, 더 이상 그건 나의 기억이 아니게 될까? 사람을 상정하는 것은 과연 기억의 총합인가, 물리적인 실체인가? 또는, 기억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재정의 된 영혼인가?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개념을 역설하기 위해선, 기억은 본질적으로 재구성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억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인간이 빈번히 발생시킨 사건이었다. 즉, 기억의 재구성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이 아니다.
이곳의 로봇은 마음을 모른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에이미는 수치심을 느끼고, 기억칩을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마음이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단 하나의 성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 말한다. 그건 인류애라고 말할 수도 있고, 더 큰 선을 향한 욕망일 수도 있다. “내가 대통령이 된 거 같아요.”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상정하는 것. 행복을 위한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상정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