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센티미터 키, 약간 통통한 체격, 커트 머리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50대 초반의 그녀가 우리 집에 왔다. 큰 언니 뻘되는 분이 오후 늦게 면접을 보러 오셨다. 암 수술 후, 항암을 앞두고 집안일을 도와줄 '이모님' 구인을 올렸고, 몇 안 되는 전화통화 끝에 이 분이 오셨다. 싹싹하고 사교성이 좋아 보였다. 다행이었다.
인생 3번째 이모님을 맞이했다. 첫 애 출산 한 달 전, 뇌출혈로 친정엄마가 쓰러지셨다. 어떤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2번의 출산과 육아에 이모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스갯소리로 "친정엄마 복은 없어도 이모님 복은 있다"라고 나를 포함한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할 정도로 이전 이모님 두 분은 아이 둘을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모님 도움 없이 4년간 일과 육아를 병행했다. 암 발병 후, 타지에서 나와 아이들이 기댈 친정엄마가 다시 절실하게 필요했다. 가까스로 만난 울산 이모님 역시 친정식구 같은 그런 분이었다. 이모님 복은 여전했다. 다행이었다.
2019년 5월, 이모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울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옷가게와 식당을 운영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본인 소개를 하셨다. 결혼 후에는 경주에 생활 터전을 마련했지만, 울산 곳곳의 역사와 지리를 잘 아는 울산 토박이였다. 주말에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찬양과 학생지도를 하며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버리는 시간 없이 충실히 산다고 했다. 다부진 몸과 얼굴에서 힘이 느껴졌다.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진심이었다.
그 해 12월까지 총 8개월의 시간을 온전히 그녀와 함께 했다. 울산에서 만든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지방에 살았지만, 암 치료는 경기도에 위치한 대학병원에서 했다. 3주에 1번씩 6개월간 진행된 항암치료를 위해 SRT 새벽 6시 20분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1박 2일의 병원 일정 동안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유치원생인 딸아이를 챙겨주셨다. 엄마의 부재를 채워주셨다. 덕분에 나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치료에 신경 쓸 수 있었다. 치료를 마친 다음날 오후, 무거운 발걸음으로 힘겹게 집에 올 때면, "오늘도 고생했네, 우리 큰 딸."이라고, 하던 일 멈추고, 나를 맞아주시던 엄마의 얼굴이 이모님에게서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집에 왔구나,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구나'가 절로 나오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따뜻한 밥상을 차리며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엄마가 보내준, 엄마의 아바타 같았다.
항암 후 일주일은 부작용으로 괴로웠다. 몸과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같이 쳐진 나에게 간간히 바람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바로 이모님이었다. 면역에 좋다고 이것저것 사와 뚝딱뚝딱 솜씨 좋게 만들어 식탁에 올려주셨다. 기분전환을 위해 근처 구경도 시켜주고 계란팩으로 얼굴 마사지까지 해 주셨다. 대상포진으로 고열이 나서 응급실에 이틀 누워있을 때에도 먹어야 산다고 바리바리 도시락을 싸 오셨다. 비록 그 자리에서 먹을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배불리 먹었다. 교회 성경학교 교사를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율동이며, 만들기, 그리기 등 여러 활동들을 소개하며 같이 어울리셨다. 그녀 덕분에 절간처럼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찼을 우리 집은 풍선이 둥둥 떠오를 듯한 활기로 가득 찼다. 이모님이 퇴근 준비를 할 때마다, 딸아이는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조금만 더. 조금만요!"를 외치며 따라다녔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8개월이 지나 이모님은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게 몸에 배어있는 분이라, 마지막 퇴근 이후 우리 집에서 한 번, 밖에서 한 번 만났을 정도이다. 가끔 생각나서 연락하면, 여전히 "--하느라 바빠요. 건강 챙기며 살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울산에서 정주고 마음 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누군가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려놓아도 쓰러질 것만 같던 힘든 때, 타지에서 고립과 외로움을 느끼며 누구라도 잡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나를 구해준 은인이었다. 친정엄마도, 동생도, 남편도, 자식도 아닌, 이모님을 통해서.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조금씩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역시, 난 누가 뭐래도 이모님 복이 많은 사람이다. 감사하고 귀한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