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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Jul 15. 2024

초복이라는 이름 값한 날에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79

"오늘은 닭죽 해주세요."

딸의 요청에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여기저기서 초복이라는 광고가 들려도 올해도 슬그머니 넘어갈까 했다. 복날이라고 보양식을 애써 챙겨 먹지 않는 습관대로 불 앞에 오래 서서 땀 흘리고 싶지 않았다. 학교 급식에도 삼계탕이 특식으로 나오는데 굳이 집에서까지 닭죽을 해 달라고 하나 싶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급식 메뉴는 삼계탕이지만, 보나 마나 먹을 게 별로 없을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딸은 급식이 부실하다는 이야기를 거의 매일 입에 달고 산다. 작년까지 안 먹던 닭죽을 올해는 여러 번 끓여 먹였다. 입에 맞았는지 부족한 엄마표 닭죽이라도 주문하길래 또 예스했다. 하다 보면 못하는 솜씨도 늘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오늘도 즐겁게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재료는 준비되었으니, 점심은 여유롭게 먹기로 했다.


특별한 약속이 없어 혼밥이 일상이지만, 혼밥도 오전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전날 먹고 남은 생선과 고기가 있으면 야채샐러드, 김치류와 함께 5분 안에 뚝딱 먹을 때도 있고, 그것도 없으면 계란을 풀어 버섯, 양파와 같이 살짝 볶아서 먹는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여유를 부리며 나만을 위한 점심을 차린다. 생선을 조리거나 불고기를 볶으며 팬에서 접시로 옮긴 음식을 느릿하게 먹을 때도 있다. 가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 먹는데도 기분과 체력에 따라 좌우된다. 단,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빵은 간식일 뿐, 주식으로 삼지 않는다.


월요일인데 차분해지면서 기분이 좋길래 뭐라도 해 먹고 싶었다. 사놓은 가지로 솥밥 비슷한 것을 해 보기로 했다.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하지 않고 대충 내식대로 만들어서 "비스무리"라고 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자주 해 준 가지나물의 물컹한 식감이 싫어 안 먹었지만 구워도 볶아도 대처 무쳐도 입에서 녹는 부들부들한 식감을 이제는 좋아한다. 안토시아닌이 풍부하다는 가지는 여름에 꼭 먹어야 하는 열매채소이다. 눈에 확 띄는 보라색의 통통한 외형이 인상적인 만큼 알고 보면 건강에도 좋다. 특히 콜레스테롤 개선, 안구건조예방과 시력보호 효과를 받고 싶은 욕심에 자주 먹는다.


미리 불려놓은 잡곡들을 솥에 덜었다. 흰쌀이 아니라 쌀, 현미, 병아리콩, 귀리, 약콩, 흑미를 넣고 썰어놓은 가지와 다진 파를 같이 넣었다. 그리고 센불 중불 약불로 번갈아 불조절을 하며 끓였다. 잡곡이라 인덕션에서 한참을 끓였다. 물이 부족해 두 번 정도 물을 넣고 끓이다 보니 밥이 아니라 죽이 되었다. 실패가 예상되었을지도 모를 나만의 레시피로 가지잡곡죽을 만들었다. 들기름과 깨소금을 뿌리고 냉장고에서 열무김치와 깻잎을 꺼냈다. 고등어조림도 데웠다. 죽이 되어 비주얼이 아름답진 않았어도 건강한 맛이었다. 잡곡들이 잘 삶아져서 녹아내린 듯한 가지들과 섞여 목 넘김이 꽤 부드러웠다.


가지잡곡죽



역시나 더운 날이었다. 뜨끈한 점심을 먹고 나서 속은 편했지만 땀이 났다. 선풍기와 에어컨 바람으로 열을 식힌 뒤에 저녁 준비를 했다. 닭가슴살과 안심, 찹쌀을 넣어 닭죽을 끓였다. 당근과 애호박 같은 야채는 싫어하니 눈에 안 보이는 양파만 넣고 보글보글 끌어 오르는 죽을 저어가며 시계를 쳐다봤다. 아들은 집에 있었고, 딸과 남편이 차례로 도착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들은 급식으로 푸짐한 닭다리가 들어간 삼계탕을 두 번이나 먹고 왔다며 평소와 다르게 간단히 그릇만 먹었다. 딸은 역시나 부실했던 급식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맛있게 먹어줬다. 어찌 보면 오로지 딸을 위해 끓인 닭죽일 뻔했는데 다행히 남편은 회사에서 삼계탕을 먹지 않았다고 한 그릇을 말없이 먹어줬다. 초복이라고 당당히 닭죽으로 단백질을 충분히 보충했는데 다가오는 중복과 말복은 무엇을 먹어야할까, 가족들의 의견을 물어봐야겠다. 나와 가족을 위해 부엌에서 땀 흘린 하루가 복된 날이 되길 바라본다. 




닭죽



비 온다는 예보에 서둘러 산책을 나왔으나 더운 기운은 여전했다. 그래도 일몰 직전 하늘은 신비롭고 평안해 보였다. 하루종일 바깥은 더웠지만 내 속은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탄천길에서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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