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입도한 지 십 년. 한림에 산지도 십 년. 이제 조금씩 마을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가고 보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소소하게 적어 보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님도 모르는 우리 동네 이야기,... 시작합니다.
테쉬폰?
금악에 가면 항상 인파가 몰리는 곳이 있다. 금믈오름(금오름)이 그렇고, 오늘 이야기할 테쉬폰 주위가 그렇다. 테쉬폰은 아치형 건축물이라고 쉽게 이해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서 더 설명하겠다. 그래도 테쉬폰의 유래쯤은 알아야 할 것 같다. 어떤 유래로 우리나라 제주까지 오게 되었는지….
'제주근대건축 산책'(김태일)에 따르면, 테쉬폰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큰 도시 중 하나였던 ‘크테시폰’의 유적에 기반을 둔다. 이 당시 이곳에 건축물 사이사이에 거대한 아치모양을 삽입하여 건물을 완성했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문화와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준 결과물이 되었다. 오늘날 이라크 남쪽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즉,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기 크테시폰 도시에 건축과 건축 사이를 아치형으로 연결해 사용했던 것이 유래가 되었고, 제주도에서는 아일랜드에서 온 신부님에 의해 금악에 짓기 시작한 건축형태이다.
테쉬폰 건축은 거푸집이나 기둥 없이 지을 수 있고, 콘크리트와 콘크리트 벽돌만 있으면 지을 수 있는 경제적이고 비교적 손쉽게 지을 수 있는 건물로써, 그 당시 제주 환경에 적절한 건축기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한때 축사용부터 주택용까지 제주에 200채 가까운 테쉬폰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테쉬폰(금악리 135번지)은 주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건물인데 옆에 카페도 생기고 말과 소가 풀 뜯는 광활한 목장도 구경할 수 있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꽤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바로 아래 사진을 보면 양쪽 대칭 모양으로 출입구와 창문이 있다. 이 테쉬폰 주택은 1 가구가 아닌 2 가구용이었다. 한 가구가 살아도 좁은 공간인데, 이곳에 어떻게 두 가구가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다. 내부도 매우 좁다. 지금은 이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어, 안까지 들어가서 체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부가 너무 좁아 밖에서만 봐도 한눈에 다 볼 수 있다.
이시돌 주택 테쉬폰의 위력
테쉬폰은 제주에만 존재했던 건축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한주택공사가 설치된 해는 1962년이다. 전쟁 이후 주택난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빨리 만들어 주택난을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건축자재를 규격화하는 방안을 세우고 조립식 주택을 연구한 결과, 시험주택 A~F형(1963년 11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발표), 총 여섯 유형의 모델을 발표했다. 그 여섯 유형 중 B형이 테쉬폰 형태의 집이었다.
제주도에서는 이미 금악에서 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테쉬폰 건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님이 테쉬폰에 대한 특허를 1963년 5월 20일에 받았다고 하니, 대한주택공사의 B형 모델의 생성은 맥그린치 신부님의 테쉬폰 보다 나중이었던 것이다. - '제주근대건축 산책'(김태일)에 보면 서울 수유리 허허벌판에, 대한주택공사의 B형 모델인 테쉬폰 주택 모델하우스 사진이 실려있다.
테쉬폰 형성 시기 즈음에,…
우리나라가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대한주택공사도 설치해 가며 아주 열심히 열심히 빨리빨리 하고 있을 때, 우리 시댁은 이러했다고 한다.
시부모님은 두 분 모두 경상북도분들인데, 60년대에 충청북도로 이사해 사셨다. 친척분 한분이 충청도에 갔다가 땅이 억수로 좋다며, 거기서 농사짓고 살면 좋겠다는 말에 충청도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우리 남편이 태어났다. 농사를 위한 땅을 보고 가셨기 때문에 도시가 아닌 산속 화전민 격으로 터를 잡으신 거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1968년 ‘화전정리법‘이 만들어지면서 1976년 종결될 때까지 화전민을 해산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산속에 살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살라는 것인데, 가까운 지방으로 나가면 30을, 멀리 나가 정착하면 정부에서 50만 원을 지원해 줬다고 한다.
시어머님 말씀이,... '우리는 50 받고 마산으로 안 간나' 하셨다.
마산에서 어렵게 정착하며 사시다가 우리 시어머님은 마산에서 남편 잃고 둘째 아들도 잃으면서, 우리 남편이 중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 나가셔서 지금까지 부산에서 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