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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Jul 30. 2023

지옥을 알리기 위해 지옥으로 들어가다

비톨트 필레츠키(1901~1948), 폴란드의 군인

비톨트 필레츠키

매년 1월 27일이 되면 폴란드 남부의 오슈비엥침(Oświęcim)에는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곤 한다. 이 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엄숙하고 무거운 표정들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 모인 관광객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문자들은 ‘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며 이들이 참여하고자 하는 행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학했던 ‘한 사건’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이 폴란드의 도시는 오슈비엥침이라는 폴란드식 이름 보다는 ‘아우슈비츠(Auschwitz)’라는 독일어 지명으로 세상에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나치가 세웠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 공장이었던 것이다. 유럽 각지에서 붙잡혀온 수많은 유대인, 집시, 동성연애자 또는 공산주의자들은 인종, 정치관,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끌려와서 구금되었고 구타 및 고문을 당하거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매년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대학살의 생존자이거나 그들의 후손들이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하였을 때 거의 죽어가는 몇 천명만이 간신히 생존할 수 있었는데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온갖 험한 상황들을 겪으며 단련되었던 소련군들조차 수감자들의 극도로 비참한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말았다. 심지어 여러 생존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수용기간의 괴로운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자살할 정도였다. 아우슈비츠는 문자 그대로 인간이 만든 ‘현세의 지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옥 같은 곳을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들어갔다가 탈출한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던 인물은 폴란드 출신의 군인이었는데 그의 믿기지 않는 체험을 통해 베일에 쌓여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고 전후 나치 관련자들의 범죄를 처단할 수 있었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놀라운 이야기만큼 그 삶에도 굴곡이 많았는데 이것은 마치 폴란드라는 나라의 뒤틀린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과 같았다. 지금부터 이 ‘굴곡진 운명을 가졌던 사나이’의 인생 행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부활한 조국

폴란드라는 나라는 과거 16~17세기에 인근 리투아니아와 ‘연합 왕국’을 구성해 동유럽 일대의 패권을 차지한 적도 있었던 지역의 맹주였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귀족들의 내부 분열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졌고 주변 강대국인 프로이센(독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에 의해 3차례에 걸쳐 분할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구성원인 폴란드인들 역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비록 이들은 주권이 없는 망국민들이었지만 고유의 언어를 사용했고 ‘독립된 조국’을 염원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는 1901년에 러시아 제국의 북쪽에 있던 카렐리아(현재의 핀란드 인근)의 올로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록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태어났지만 부모 모두 폴란드인이었고 산림 감시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유소년기부터 폴란드 민족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필레츠키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폴란드어로 교육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고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로 유학을 보냈는데 이곳은 북쪽의 카렐리아보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거주하였다. 필레츠키는 자연스럽게 현지 폴란드 청소년들과 어울렸고 反러시아 성향을 띄었던 학생들의 보이스카웃 모임에도 참여하게 된다. 비록 유소년들이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폴란드인들이었고 강한 민족주의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필레츠키는 1차대전 중에도 계속 학업을 이어갔는데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며 모든 상황이 급진전하기 시작한다. 10월 혁명(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 11월)으로 주도권을 잡은 볼세비키는 백군과의 내전을 벌이는 가운데 자신들의 무력한 상황을 절감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종식시키며 러시아 내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했다. 이것은 동부전선을 종식시킨 후 서부전선으로 병력과 자원을 옮기려는 독일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관계 속에 독일과 볼세비키(소비에트 러시아)는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었으며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및 폴란드 등을 독일에게 내어주게 된다. 이후 독일군은 해당 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하였는데 이 와중에 이곳에 흩어져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50년만에 독립국을 건설하기 위해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필레츠키가 이전에 가입했던 폴란드 학생들의 보이스카웃은 점차 자위단 형태인 군사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지역 내 폴란드인들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11월에는 독일이 항복을 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독일군 뒤에는 세력을 키운 볼세비키가 붉은 군대를 앞세워 서쪽으로 혁명을 전파하려 하고 있었다. 다음 차례가 자신들임을 직감한 필레츠키를 비롯한 많은 폴란드인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폴란드 지원군에 참여하게 된다. 폴란드인들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볼세비키들은 그저 러시아인들이자 자신을 점령하러 오는 적군일 뿐이었던 것이다.


볼세비키의 진군 속도는 대단히 빨랐는데 1919년 1월에 빌니우스가 붉은 군대의 수중에 떨어졌다. 폴란드인들은 긴장했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130년 만의 독립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죽을 각오로 싸우기 시작했다. 폴란드군은 붉은 군대와 혈투를 벌이면서 초기에는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군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민들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는 붉은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920년 8월경에는 수도인 바르샤바가 점령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필레츠키는 정예인 ‘울란 기병연대’의 일원으로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동료들과 함께 전의를 불태우며 용감하게 싸웠다. 8월 12일부터 약 2주간 진행되었던 전투에서 폴란드군은 아군의 결사항전과 붉은 군대의 지휘상 실수 등이 겹치면서 기적적으로 승리했고 수도와 조국을 지켜낸다. 이후 폴란드군의 재역공이 이어졌고 내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볼세비키는 1921년 3월에 폴란드와의 종전에 합의하게 된다. 1683년 오스만-터키로부터의 2차 비엔나 포위 이후 폴란드는 다시 한번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했고 자신들의 나라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부활의 중심에는 필레츠키를 포함한 젊은 폴란드 청년들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필레츠키는 이 과정에서 2회에 걸쳐 무공 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자랑스럽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치에 대항하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막을 내린 후 예비군 신분이 된 필레츠키는 우선 학업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1922년 포즈난 대학교의 농학부에서 학업을 시작했던 그는 예술과 문학에 더욱 관심이 많았고 빌니우스 대학으로 옮기며 예술관련 공부를 이어간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 및 기울어져가는 집안 사정 등으로 인해 1924년에 학업을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필레츠키는 이듬해인 1925년에 기병 연대에서 사관 자격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동부 리다(Lida)에 정착했는데 교사와 결혼하며 가족을 이루었고 기병으로서 지역 승마 학교에서 후진 양성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더불어 자신의 농장도 운영하며 지역 농업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제 막 탄생한 조국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그의 삶도 안정적인 궤도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39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나치의 입장에서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의 연결을 갈라 놓은 단치히(Danzig: 폴란드어로 그단스크 Gdansk) 자유시의 존재는 큰 스트레스였고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였다. 나치는 이에 대해 1939년 이후 강하게 영토 주장을 하기 시작했고 1939년 8월이 되자 양 측의 전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38세로 예비역이었던 필레츠키는 8월 말에 폴란드 19사단 소속 기병대 지휘관으로 동원되었다. 모두가 예견했던 전쟁은 불과 며칠 후에 발발했는데 슈투카(Stuka) 급강하 폭격기 및 1호와 2호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은 전격전을 통해 폴란드군을 괴멸 시키며 진군했다. 필레츠키의 부대는 9월 6일에 서부에 위치한 피오트르코프(Piotrków)에서 와해되었는데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잔존 부대원들과 함께 남쪽으로 후퇴한다. 9월 17일에는 소련군이 동쪽에서 침공하며 폴란드에게 국가로서 모든 생존의 희망을 사라지게 했다.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양쪽 군대에게 협공 당하며 항복하게 되는데 1918년에 국가를 세운지 불과 21년만의 일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필레츠키는 패전 이후 자신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는데 조국의 침략자들에게 끝까지 저항할 생각이었고 그 장소는 해외가 아닌 폴란드 국내가 될 것이었다. 그는 다른 병사들과 같이 루마니아 등으로 탈출하지 않았고 국내에서 저항 조직을 구성하려 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험난한 길이 예상되었다.


1939년 11월에 필레츠키는 동료 폴란드 장교들과 함께 ‘비밀 폴란드군(TAP)’을 창설한다. 필레츠키는 조직의 중부 지역을 담당했고 독일 점령군을 속이기 위해 화장품 창고 관리자로 위장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舊폴란드군 출신들을 대상으로 조직이 점차 확대되었고 1940년 중반까지 19000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가입하게 된다. 필레츠키는 조직의 참모장 역할을 하며 더 많은 인원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노력했고 연합군을 위한 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조직의 수장인 브워다키에비치 소령이 극단적인 카톨릭 신자에 극우파였고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조직원들에게 강요했는데 독일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한 명의 사람이 아쉬웠던 필레츠키에게 이러한 브워다키에비치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브워다키에비치는 폴란드의 정체성이 카톨릭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자는 조직을 떠나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다. 필레츠키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고 양 측의 견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필레츠키는 브워다키에비치에게 또다른 저항 조직인 ‘무장투쟁연합(ZWZ)’으로 조직을 합칠 것을 제안한다. 무장투쟁연합은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조직원을 모집했고 보다 구성원에 대한 포용성이 있는 단체였다. 브워다키에비치는 양 단체의 통합을 지속적으로 반대했지만 돌연 1940년 8월에 이를 수용하려 한다. 단, 이와 관련해 한가지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이란 최근에 운영을 시작해서 여러 저항단체의 많은 조직원들이 수감되어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필레츠키가 잠입하여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필레츠키에게 이것은 일종의 개인적인 보복으로 여겨 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한다. 이렇게 필레츠키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옥으로 들어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독일어로 줄여서 ‘KZ/KL Auschwitz’로 부른다)는 폴란드의 크라코프에서 50km 떨어진 오슈비엥침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원래 폴란드군이 막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나치는 이곳을 점령한 후 독일령 실레지엔에 편입시키며 아우슈비츠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폴란드군의 막사는 수용소로 개조하여 사용되었는데 초기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의 임시 수용소였다. 1940년 5월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로부터 30명의 독일인 범죄자들이 이송되었는데 이때부터 가학적인 ‘살인 수용소’로서의 악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수용소는 3개의 구획(2호 수용소인 비르케나우와 3호 수용소인 모노비츠)으로 확장되었는데 1940년에는 아우슈비츠 1호 수용소만 가동하고 있었다. 아직 가스실은 설치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지만 1940년 6월부터 폴란드 정치범들이 본격적으로 수감되기 시작하며 아우슈비츠는 수감자의 지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필레츠키는 이곳에 잠입하기 위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마시 세라핀스키(Tomasz Serafiński)라는 사람의 신분증을 구했고 바르샤바 거리를 마구 활보하던 중 1940년 9월에 독일군의 불심 검문에서 붙잡혔다. 이러한 장면은 당시 폴란드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는데 붙잡히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는지 그는 의도하던 대로 다른 2천여명의 폴란드인과 함께 2일 간의 임시 수용 절차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임시 수용소에서 갖은 구타를 경험한 후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필레츠키는 삭발을 당했고 대부분 즉시 처형되던 유대인들과는 별도로 수용되었다. 그는 대략적인 수용소 상황 파악을 한 후 바로 수용소 내 지하저항조직(ZOW)을 구성했다. 저항조직의 목적은 수감자들의 사기를 올리고 이들의 생존을 극대화하여 궁극적으로 탈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중요했던 것이 외부의 조력자를 포섭하여 생존의 핵심인 음식과 의약품 등을 몰래 들여오는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조직은 부품을 입수해 라디오 수신기까지 자체 제작했는데 이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전파하고 내부 정보도 밖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수신기는 상대적으로 감시의 눈이 소홀한 수용소의 병원에 숨겨 두었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5인의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전체 규모를 아는 것은 필레츠키를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40년 10월부터 외부로 정보를 빼돌리기 시작했고 11월에는 외부의 저항조직과 연결이 되었다. 필레츠키는 수용소의 목적이 단순한 교화가 아니라 수감자들을 서서히 죽이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인지했다. 수감자들은 굶주림, 질병 및 경비병의 구타와 생체실험 등으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감자들은 경비병에 인사를 안 하는 사소한 실수로도 즉결 처형을 당할 수 있었고 1942년부터는 가스실에서의 대규모 학살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수용된 집시들은 조직적으로 불임시술을 받기도 했다. 나치의 탄압이 거세지자 저항 활동 참가자도 증가했는데 1942년 봄이 되자 수용소 내 저항인원은 1000명에 육박했다. 게슈타포(Gestapo)가 눈치를 채고 몇차례 저항조직원들을 체포해서 처형했지만 결코 전체 조직을 알 수는 없었다. 필레츠키는 수용소 밖의 무장 지원을 통한 수감자들의 봉기와 탈출을 계획했지만 외부인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나 폴란드 저항조직으로부터 이를 도와주겠다는 어떠한 메시지도 접수하지 못했다. 사실 수감자들이 대규모로 탈출한다 해도 이후의 이동이나 생존은 또다른 문제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필레츠키는 무력을 통한 대규모 봉기나 탈출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43년 봄되자 필레츠키 조만간 다른 수용소로 이감 될것을 인지했고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한다. 4월 말에 필레츠키는 수용소 외부의 제빵소에 야간 사역을 나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다른 수용자와 함께 신속히 경비병을 제압한 후 통신선과 비상 사이렌을 끊고 도주한다. 동쪽 방향으로 몇 시간을 이동하다 보니 수용소가 있던 독일령 실레지엔에서 벗어난 폴란드 내 독일군 일반 점령지구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 지역 성직자나 저항군에 동정적인 여러 민간인들의 도움으로 100km에 이르는 탈출을 이어 가게 되었다. 도중에 검문하는 독일군으로부터 총상을 입기도 했지만 천운으로 치명상이 아니었고 재빠른 판단과 행동을 통해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필레츠키는 남부 폴란드의 보슈니아(Bochnia)에 있는 저항군의 안전 가옥에 도착했다. 필레츠키는 이렇게 2반 동안의 지옥 생활을 마치고 외부 세계로 나올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했던 많은 동료 수감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부터 그가 할 일은 분명했는데 아우슈비츠에서의 지옥 같은 생활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계속된 저항

안전가옥에 머무는 동안 필레츠키는 그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대략적인 요약본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1943년 8월에 바르샤바로 몰래 이동했고 이곳에서 본격적인 수용소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보고서에는 수용소의 일상적인 모습, 경비병들의 가혹행위, 저항조직의 구성 및 나치에 의한 생체실험 등이 적혀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 절차가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면 수용소의 의사가 나와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선별했고 죽을 사람들은 샤워를 한다는 구실 하에 가스실로 끌려갔다. 이후 이들의 시체는 하루 8천명의 처리가 가능했던 화장장으로 옮겨졌고 여기서 한 줌의 연기가 되어서야 수용소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폴란드 국내군(폴란드 지하저항운동가들이 하나로 뭉쳐 세운 폴란드 내 저항군 단체) 및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단편적인 소문으로만 접하고 있던 놀라운 사실들에 경악했다. 특히 학살과 관련한 부분은 내용이 크게 과장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고 필레츠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수용소에 잠입해 기록한 첫번째 기록물이었다. 이후 1943년말과 1944년 중에 필레츠키의 경험과 유사한 다른 탈출자들의 증언들이 지속적으로 보고되었는데 이를 통해 폴란드 망명정부는 1944년 11월에 아우슈비츠 리포트(Auschwitz Protocols)라는 종합적인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져서 전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Rudolf Höss) 등 많은 학살 관련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다.

 이후 폴란드 국내군과 합류한 필레츠키는 주변의 숨어있는 유대인들을 도우며 활동을 지속한다. 한편 폴란드 국내군은 나치에 타격을 입힐 때를 기다리며 무기와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1944년 여름이 되자 소련군이 폴란드 인근 벨라루스를 점령하며 독일 중부집단군을 괴멸시켰고 마침내 공격의 시기가 무르익었다. 1944년 8월 1일 수도 바르샤바에서 대대적인 ‘反나치 봉기’가 발생하게 된다. 폴란드 국내군은 비록 독일군의 철모를 사용했지만 적백의 폴란드 국기 색을 두른 피아식별띠를 메어 자신들이 폴란드 정규군임을 분명히 하였다. 필레츠키 역시 국내군에 합류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한다. 초기에 폴란드군의 기습에 허점을 보였던 독일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섰다. 독일군은 전차와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해 바르샤바 시내의 많은 건물들을 쓸어버렸는데 이때 거의 모든 바르샤바 구시가지 건물들이 파괴된다.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폴란드군의 상태는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무기, 탄약 및 의약품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항공기 등을 통해 지원이 가능했던 소련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련 측은 자유 성향의 폴란드 국내군이 소련의 폴란드 점령 시 적으로 부상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필레츠키는 시의 북부와 중심가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의지만으로 독일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10월 초에는 폴란드군의 모든 저항이 종식되었고 그는 폴란드 장교로서 포로가 된다. 독일 바이에른의 무르나우(Murnau)에 있는 폴란드 장교수용소로 옮겨진 필레츠키는 이곳에서 수용생활을 하다가 6개월 만인 1945년 4월 말에 미군 12 기갑사단에 의해 해방된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된 기쁨도 잠시였고 그에게는 또다른 중대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성격상 과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이 임무가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임무 그리고 복권

유럽에서 공동의 적인 독일의 항복과 함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서방 연합국들과 소련에게 다른 형태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로 이념이 다른 양 진영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서히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동유럽의 군소국가인 폴란드 역시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서방에는 영국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가 존재했고 폴란드 본토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대리 정권을 세우려 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필레츠키에게 소련군이 점령한 폴란드 내 정보 수집 임무를 맡기는데 그는 1945년 12월에 몰래 바르샤바로 들어오게 된다. 망명 정부 입장에서는 과거 나치를 상대로 같은 일을 했던 필레츠키 만한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존 수용소 출신 부하 및 조직원들을 규합하여 비밀정보망을 구축했고 최대한 주목을 안 받기 위해 평범한 노동자나 외판원 등으로 위장했다. 처음 6개월 간은 그럭저럭 정보를 수집하며 지나 갔는데 소련 측도 바보는 아닌지라 폴란드 망명정부 측으로 들어가는 정보에 대해 눈이 혈안이 되어 조사 중이었다. 1946년 여름이 되자 필레츠키는 그의 정체가 탄로 났으니 즉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필레츠키는 아직 폴란드를 위해 할 일이 많다고 판단했고 단호히 명령을 거부한다. 소련 측의 체포망이 좁혀져 오는 가운데 해가 바뀌었고 나치가 항복한 정확히 2년 뒤인 1947년 5월 8일에 필레츠키는 폴란드 보안 당국에 체포된다. 그는 체포된 후 극심한 고문을 받게 되는데 자신의 정보망과 동료 조직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요구에 일절 답하지 않는다. 수개월 간의 고문과 감옥 생활을 통해 필레츠키의 육체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 졌지만 그의 정신만은 아무도 꺾지 못했다. 필레츠키는 모든 강압과 회유에 결연히 대항하고 있었다. 이후 해를 넘겨 열리게 된 재판은 문자 그대로 보여주기식의 ‘연극 재판(Show trial)’이었는데 필레츠키는 무단 월경, 무기 소지, 요인 암살과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여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그를 위해 탄원서를 내었지만 모두 기각당하고 만다. 오히려 그 자신이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당시 폴란드 수상 ‘요제프 치란키에비치(Józef Cyrankiewicz)는 필레츠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며 단호한 처벌을 촉구하였다. 결국 필레츠키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8년 5월 25일에 목 뒤에 총을 맞는 방식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이러한 방식은 소련의 NKVD가 주로 했던 것인데 소련의 ‘카틴 학살’ 時 2만 명의 폴란드 장교들이 이렇게 살해되었다). 그렇게 필레츠키는 죽었고 그의 이름은 공산 폴란드에서는 ‘카틴 학살’과 더불어 금기어가 되어 수십년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강제로 잊혔다.        


시간이 흘러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권이 몰락한 이후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폴란드에 자유 선거에 의한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과거 공산 정권에서 부정되었던 폴란드 망명정부 측 인사들이 하나, 둘 복권되기 시작한 것이다. 망명 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Władysław Sikorski)’나 필레츠키에게 정보 활동을 지시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Władysław Anders) 장군 등이 다시 폴란드의 애국자로 돌아왔다. 필레츠키 역시 전쟁 영웅으로서 모든 권리가 회복되었고 ‘부활 폴란드 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을 추서 받게 된다. 또한 폴란드의 여러 거리들이 그의 이름을 따라 다시 명명되었고 바르샤바와 크라코프 등 대도시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지며 전쟁 중 가장 용감했던 폴란드 영웅을 기리게 되었다.


과거 필레츠키가 행했던 일련의 행동이나 작전들은 ‘전설’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너무나도 용감했고 때로는 지나치게 무모했던 그의 행동들은 자신의 목숨이나 안위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초인의 행위’였다. 그렇게 필레츠키는 폴란드인들에게 별이 되었고 가장 험난했던 시기에 가장 용감했던 폴란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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