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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Sep 06. 2023

제3 제국의 타이타닉

독일 유람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생존자들(1945. 1월)

나치의 호화 유람선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발트해의 겨울 밤 공기는 매우 차갑다. 특히 1945년 1월 30일 밤에는 더욱 그러했는데 당시 온도는 최저 영하 18도 정도로 대단히 쌀쌀했고 바다 곳곳에 작은 얼음 덩어리들이 떠다녔다. 독일군에 징발된 병원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함교에 있는 당직병들은 어두운 바다에 온 몸의 신경을 집중하며 부유하는 기뢰나 다른 선박 또는 장애물들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배에는 거의 만여명의 독일인 피난민들과 군인 및 부상병들이 타고 있었는데 복수심에 가득 찬 소련군을 피해 서부 독일 쪽으로 탈출하는 중이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이날 정오쯤 동프로이센의 고텐하펜(현재의 폴란드 그디냐)을 출발했는데 배에 있는 사람들은 잔인하고 무서운 소련군을 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안도감도 잠시, 배 안에 있는 수많은 부상병들과 거의 모든 재산을 잃고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들은 그들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른 체 강한 불안감 속에 휩싸였다. 특히 아무런 연고도 없이 무작정 서부 독일로 가야만 하는 피난민들이나 조상 대대로의 영지와 저택을 버리고 떠나는 프로이센의 융커(귀족) 출신들은 거의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사람들의 한숨과 울음이 배의 곳곳에 울려 펴졌는데 이들은 모든 선실은 물론 계단, 선박 내 연결 통로와 지독히도 추웠던 갑판에도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피곤에 지쳐 누워 있고 간간히 환자들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항해를 시작한 지 대략 8시간이 경과한 저녁 9시경, 배에는 엄청난 충격과 굉음이 잇달아 발생했는데 곧이어 강한 수압의 바닷물이 해일같이 선내로 밀려 들어왔고 배가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는 이렇게 발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즐거움을 위해 탄생한 배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독일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에 주목하게 된다. 이들 중 일부가 여전히 히틀러 및 나치에게 반감을 갖는 좌익 성향 노동자들이었는데 집권 후 모든 노동조합이 해체되면서 나치와 노동자 계층과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과 노동자들의 반발을 완화하기 위해 나치는 이들 계층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계획에 착수한다. 이 과업은 사실상 나치의 노동 정책을 총괄하던 독일 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의 수장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가 맡게 되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로 만들기 위한 종합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핵심이 되는 계획이 1933년 11월부터 시작된 ‘즐거움을 통한 힘(KDF: Kraft durch Freude)’으로 불리는 프로그램이었다. 단순한 용어만 들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기 힘든 이 프로그램은 사실 상당히 방대한 계획이었는데 ‘독일 노동자 계층’에 대한 일련의 획기적인 복지 정책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라이는 노동자들의 월급이 많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스포츠 및 여가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각 도시 및 직장에는 위생 시설이 개선되었고 다양한 콘서트, 전시회 및 공연들이 기획되었다. 노동자들은 퇴근 후 육상, 체조는 물론 축구, 수영, 승마, 테니스(특히 승마와 테니스는 전통적으로 상류층의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었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고 깔끔하게 설치된 샤워 시설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또한 국민차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당시 독일에서는 비싼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를 장기 저축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이 소유할 수 있게 한다는 놀라운 비전을 제시했다. 바로 국민차인 폴크스바겐(Volkswagen)의 탄생이었다. 또한 국민차들이 질주할 수 있는 아우토반(Autobahn)이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구간을 시작으로 건설되기 시작한다(이 과정에서 실업률 감소라는 추가적인 효과가 있었다). 더 나아가 나치는 국민들의 휴가까지 관장하기 시작했는데 노동자들이 주말의 열차 여행이나 여름 휴가 때 먼 해외로 크루즈 여행을 갈수 있게 만들었다. 행선지는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이나 먼 북쪽의 노르웨이 피요르드 같은 곳이었는데 해외여행이 일반화되지 않던 1930년대에 이러한 휴가 프로그램은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사실상 고대 로마에서 실시한 ‘빵과 서커스’ 정책을 현대판으로 옮긴 것이었다. 한편 크루즈 여행의 인기와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이를 수행할 선박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다. 나치는 여러 척의 호화 유람선 건조를 계획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배 중 한 척의 이름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였다.


북부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건조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1937년 5월에 취항했는데 길이 208미터에 높이 56 미터, 만재 배수량 2만 5천톤 이상의 엄청난 체구를 자랑했다. 동시에 날렵한 선체 모양으로 사람들이 탑승을 선망하는 대단히 아름다운 유람선이었다. 원래 배의 이름은 총통의 이름을 따서 ‘아돌프 히틀러호’로 지으려 했다. 하지만 1936년 2월에 스위스의 열혈 나치 지도자 빌헬름 구스틀로프가 유대인 학생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의 죽음을 애석해한 히틀러가 직접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로 이름을 변경할 것을 지시한다. 배 안에는 쾌적한 객실, 레스토랑, 극장, 실내외 수영장과 각종 연회장, 놀이방 및 도서관 등 온갖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 난생 처음 해외로 나가는 대부분의 승객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선내 489개의 객실은 2인승과 4인승의 두 종류였는데 모든 독일인들이 평등하다는 취지로 같은 인승의 방은 동일한 사이즈로 만들어졌다. 노동자 계층에 어필하려는 나치의 영악한 제스처였다.


취항한 배의 초기 항해는 본래 목적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이었는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1938년 4월에 휴양지가 아닌 영국으로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Anschluss)하였는데 이를 합법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양국 국민들의 투표를 추진 중이었다. 이때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영국 에섹스주 틸버리 인근 해안에서 5.6km 떨어진 공해상에 정박하였다. 이후 2000명 남짓한 영국 거주 독일과 오스트리아인들이 소형 보트로 이동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선상에서 투표를 실시하였다. 초기에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된 거대 유람선은 이후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독일 노동자들을 해외로 실어 나르게 된다. 평생 자기 고향이나 도시 외에는 벗어난 적이 없던 독일 노동자들이 유람선을 통한 해외여행이라는 달콤한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이 여행 프로그램은 독일인들에게 나치에 대한 호감을 증대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그 중심에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 같은 8척의 호화 유람선들이 있었다.


전쟁에 동원되다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던 1939년 5월에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다시 한번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임무에 투입된다. 당시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을 지원하던 독일은 스페인에 주둔하던 자국의 ‘콘도르 군단’(주로 공군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폭격기들이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한 게르니카를 폭격했다)을 철수시키게 되는데 이때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비롯한 KDF 프로그램의 유람선을 투입했다. 스페인 북서쪽의 비고(Vigo)항을 출발한 배는 대서양을 돌아 독일의 모항인 함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온 배와 귀환병들은 함부르크 부두에서 헤르만 괴링 공군 총사령관 등이 참석한 개선 행사를 통해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이후 독일은 본격적인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인 1939년 8월부터는 모든 해외 유람선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 이제 모든 독일인들에게 과거의 좋았던 날들은 가버리고 6년 간의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1939년 9월부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해군 소속이 되어 다른 KDF유람선들과 함께 병원선으로 전용되었다. 독일의 전역이 넓어짐에 따라 폴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의 지역을 순회하게 되었는데 수많은 부상병들에게는 마치 해상의 호텔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내부의 훌륭한 시설과 바다 풍경은 전쟁에 지친 부상병들이 회복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1940년 11월 이후 빌헬름 구스틀로포호는 천여명의 유보트 훈련생들을 위한 해상 병영으로 사용되었는데 폴란드 북쪽의 고텐하펜에 닻을 내리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정박해 있었다. 비록 해상 병영이라고 해도 평온한 발트해의 바다에 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게 전쟁은 먼 나라의 얘기였는데 1944년 하반기가 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소련군이 동쪽으로부터 물밑듯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동프로이센의 독일 국경에 도달하게 된다. 복수심에 불타던 소련군이 최초로 점령한 독일 영토는 네메스도르프라는 마을이었는데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최악의 시간을 경험한다. 남자들은 문이나 마차에 산 채로 못이 박히고 여자들은 집단으로 성폭행 당한 후에 아이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비록 독일군이 빠른 반격을 통해 소련군을 몰아냈고 다시 마을을 재점령 했지만 이들 앞에 펼쳐진 것은 수많은 시체가 널 부러진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학살의 소문이 퍼지게 되었는데 나치 정권은 독일인들의 저항 의식을 높이기 위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에 이용한다. 이후 동프로이센의 독일인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서쪽으로 탈출하려 했다. 다시 한번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그 역할을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니발 작전

1945년 초 소련군이 진격해 옴에 따라 독일군 수뇌부의 고민도 커지게 된다. 이미 전쟁의 대세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더 이상 물밀듯이 몰려오는 붉은 군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독일 육군은 수도 베를린이 코앞인 ‘오데르-나이세’ 강 앞에서 방어선을 친다고 해도 문제는 260만명에 이르는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일대의 후방에 남겨진 독일 민간인들이었다. 복수심에 눈이 먼 소련군의 지독히도 잔인했던 일련의 행위들이 아직 서쪽으로 탈출하지 못한 수많은 민간인들에게 발생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무엇인가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했다.


이 와중에 사태를 지극히 냉정하게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독일 해군의 수장 ‘칼 되니츠’ 제독이었다. 전쟁 기간 중 독일 유보트 부대를 최고의 효율성으로 가동하여 연합군 상선들을 괴롭혀온 되니츠는 이제 자국 민간인들을 최대한 많이 살리는 것이 자신의 남겨진 책무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기 휘하의 모든 해군 함선과 가용한 선박들을 동원하여 ‘한니발 작전(포에니 전쟁 시 로마에 진군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자국이 로마군에 역습을 당하자 급히 배를 모아 카르타고로 돌아온 역사에서 차용됨)’이라 불리는 해상 철수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발트해의 가용한 모든 항구에서 서부 독일이나 독일군 점령하의 덴마크로 피난민들과 군 병력을 해상으로 탈출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5년 전 영국군이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도버 해협을 횡단하며 벌였던 해상 철수작전의 독일판이었다. 문제는 30만 명이 철수한 됭케르크 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거리도 훨씬 길었다. 압박하며 들어오는 소련 육군은 물론 공군과 잠수함 또는 부유하는 기뢰의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 되니츠는 1월 23일을 기점으로 작전을 개시했는데 자국 함선 및 유보트들이 사용할 마지막 비축유마저 다 동원하여 사용할 것을 명령하였다. 한 마디로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진을 친 것이었다. 이때 많은 인원의 수용이 가능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같은 대형 유람선들이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해상 피난 작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비무장 상태로 고텐하펜에 정박해 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도 3 문의 대공포와 8문의 기관포가 설치되었다. 고텐하펜 일대에는 이미 수많은 독일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각자의 고향을 등지고 혹독한 겨울 추위와 소련군을 피해 사선을 넘은 사람들이었다.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항구에 온 피난민들을 위해 하루에도 수십 척의 배들이 출발했고 다시 피난민들을 싣기 위해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임무에 투입할 차례가 되었는데 그 운명의 날자는 1945년 1월 30일이었다.


운명의 날

유보트 U-56호의 함장 출신인 빌헬름 찬(Wilhelm Zahn) 소령은 해군으로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공동 함장에 임명되었다. 한때 대서양을 누비며 연합군 함선들을 공격했던 그는 비록 어뢰 불발로 실패하긴 했지만 처칠이 승선했던 영국 전함 넬슨호를 직접 공격해서 거의 수장시킬 뻔했다. 이제 거대한 발트해의 유람선에 배치된 그는 기존의 함장이던 프리드리히 페터르젠(Friedrich Petersen)과 함께 배를 운항 하였는데 해군 전문가 관점에서 배의 항로와 운항 제반에 대한 공동 의사결정을 했다. 문제는 처음부터 두 사람의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유보트 함장으로서 찬은 먼 바다의 소련 잠수함의 위협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피해 수심이 얕은 연안으로 돌면서 항해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페터젠 함장은 빠른 속도로 먼 바다로 나아가 신속히 이동할 것을 주장한다. 결국 페테르젠의 주장이 수용되어 배는 1월 30일 정오 경에 차가운 발트해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에는 7000명 이상의 피난민들과 900명의 유보트 훈련생들, 373명의 해군간호보조원 및 162명의 부상병들을 합쳐 총 만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이는 배의 정상적인 승선 가능 인원 1500명의 거의 7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는데 배의 출항 직전에 파악이 안된 불특정의 인원들이 몰려들며 승선 인원에 추가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출항한 후 야간의 적 잠수함 공격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독일군 선박과의 피아식별을 위해 녹색과 적색의 항해용 비상등을 켠 체 이동한다. 해군 소속의 어뢰정인 뢰베호가 유람선을 호위했지만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소련군 잠수함 S-13은 발트해의 차가운 1월 바다를 이동하고 있었는데 함장인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는 모항인 핀란드만의 항코로 돌아오라는 본부의 명령을 차일피일 미루며 먹이감을 노리고 있었다. 출항 후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 못한데다 사실 그는 일련의 군기문란 행위로 인해 처벌 직전이었기 때문에 굳이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S급 잠수함은 독일의 설계도와 자재로 만들어진 잠수함이었다. 히틀러 집권 이전부터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이 금지하고 있는 잠수함의 건조 장소를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해당 기술이 부족하던 소련과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독일이 전략적 제휴 측면에서 설계도를 공유했고 일부 부품을 넘겨주며 건조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폴란드 앞바다를 이동하던 1월 30일 저녁 7시경 마리네스코의 잠수함은 녹색과 적색의 불 빛을 목격하게 되었다. 독일 선박임을 직감한 마리네스코는 두어 시간 동안 배 주변을 돌면서 근접 관찰을 하였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저녁 9시경 S-13잠수함으로부터 21인치(533mm) 구경의 어뢰 4발이 독일 선박을 향해 발사되었다. 어뢰가 발사된 이후 목표물에 도달하기까지 수분의 시간이 흘렀는데 손에 땀을 쥐고 결과를 기다리던 소련 잠수함 승무원들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차가운 날씨 속에 옷을 있는 대로 껴입으며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함교에 있던 선원들은 야간 항해 중 온 신경을 집중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의 좌현 측에서 엄청난 충격과 폭발이 일어났다. 소련 잠수함에서 발사된 4발의 어뢰 중 3발이 명중하였던 것이다. 이는 즉시 선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첫번째 어뢰는 측면에 있던 비번의 선원들을 직격 했고 두번째 어뢰는 해군여성간호원들의 선실에서 폭발했다(이들의 피해가 가장 커서 373명 중 3명만 생존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게 된다. 세번째 어뢰는 배의 가운데에 있는 기관실 쪽을 타격했는데 절름발이가 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더 이상의 조타가 불가능했다. 이후 배에는 지옥도가 펼쳐 졌는데 선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수압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헤치며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신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부상병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다수는 차오르는 물 속에서 아무런 탈출 시도도 못한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정원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명보트와 구명조끼 모두 턱없이 부족 했는데 그 와중에 어뢰 폭발의 영향에 따라 구명보트의 일부가 파괴되고 바다로 유실되었다. 최종적으로 9정의 구명 보트가 사용되었다. 어뢰 피격 후 1시간이 지난 상황에서 배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서서히 어둠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 겨울의 매서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던 사람들은 옷이 물을 빨아들여 제대로 수영할 수 없었고 하나, 둘 익사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 바다에 떠있다고 해도 당시 섭씨 4도 정도에 불과했던 얼음장 같은 수온이 사람들을 빠르게 죽이기 시작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호위했던 뢰베호와 인근의 모든 독일 선박들이 조난자들의 구조를 위해 달려왔다. 대부분 어뢰정과 소해정 또는 화물선이었는데 총 9척의 배들이 겨우 현장을 벗어난 구명보트들을 수습하고 필사적으로 물에 떠있던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독일측 공식 기록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1252명의 사람들이 구조되었다. 이것은 승객의 9할인 9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차가운 발트해에 수장되었다는 의미였다. 과거 타이타닉호의 희생자수인 1514명을 6배 이상 뛰어넘는 경악할 만한 숫자였다. 비록 사람들이 죽는 일이 다반사인 전시에 벌어진 일이긴 했지만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가 되었다. 배의 함장이던 페테르젠과 찬 소령은 생존자에 포함되었다. 저녁 10시 10분경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선체가 세동강이 나며 발트해 해저 60미터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공격자인 소련 측도 자신들의 행위가 비난 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판단했는지 대외적으로는 독일 친위대 부대가 탄 수송선을 격침했다고만 짧게 발표했다.


독일군 수뇌부는 배의 침몰과 그 희생자 숫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빠져 있는 피난민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니발 작전은 계속되었는데 해군이나 유람선 승무원들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소련 측도 나름대로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지 않았고 선박들에 대한 무차별 공세를 강화하게 된다. 2월 10일에는 또다른 여객선인 ‘게네랄 폰 슈토이벤(General von Steuben)’호가 소련 잠수함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해당 잠수함은 바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침몰 시켰던 S-13이었다. 4500명의 독일 민간인 및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희생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 작전은 지속 실행 되었고 1945년 5월 종전까지 누계 200만명 이상의 독일 민간인과 35만명의 군인들을 서부 독일의 안전지대로 이송 시켰다. 불행히도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60만 명 이상의 독일인들은 소련군에 의해 말로 형언하기 힘든 고초를 겪었고 이후 대부분 독일로 추방되었다.


독일인들에게 최상의 편의와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승객들과 함께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만다. 엄청난 비극이 벌어진 가운데에서도 신생아 한 명을 포함한 1252명은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생존자들은 상당수가 동부 출신 피난민들(Ostflüchtling: 한국에 비교하자면 이북 출신 피난민)이었는데 훗날 독일 사회에서 귀환 전쟁포로(Kriegsgefangener), 전쟁미망인(Trümmerfrauen: 원래 의미는 폐허를 치우는 여인들) 및 외국인 노동자(Gastarbeiter)와 함께 50년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한 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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