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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01. 2023

살아남을 운명이었던 불굴의 여인

비비안 불윙클(1915~2000l) 호주의 간호장교

비비안 불윙클

1997년에 ‘파라다이스 로드(Paradise road)’라는 제목의 한 호주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그 영화를 관람한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적지 않은 충격에 빠뜨리게 된다. 영화는 2차대전 당시 인도네시아에 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억류된 유럽계 여성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대부분 영국령 싱가포르와 인근에 거주하던 유럽 제국의 엘리트 출신들이었고 공격하는 일본군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 당했고 표류하게 된다. 가까스로 인근 인도네시아의 섬에 도착한 이들은 곧 일본군에 발견되어 억류되고 식량과 의약품 등 모든 것이 부족한 극도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음악과 합창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 의지를 키워 나간다. 영화는 일본군의 잔인한 구타나 처벌 등을 담아내며 당시 여성 포로들의 혹독했던 삶을 여과없이 조명해준다. 당시 이 영화는 일본군들의 여러 잔인한 행위가 부각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개봉 금지를 당했고 아시아인 여성 포로가 가솔린으로 화형 당하는 장면을 통해 ‘인종차별적’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파라다이스 로드는 당시 생존했던 몇몇 포로들의 증언과 회고록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사실 여기에는 영화 조차도 다루지 못했던 몇몇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인간의 가장 잔혹한 면을 드러내는 사례들이었는데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한 여인의 끔찍했던 경험과 관련이 있다.              


파괴된 낙원

1942년 2월 초의 싱가포르는 그야말로 혼란과 무질서 그 자체였다. 두 달 전에 진주만 기습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개시한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의 정글을 뚫고 대영제국의 보석 중 하나인 싱가포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또 하나의 보석이었던 홍콩은 전년 크리스마스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2월 8일이 되자 극동의 요새는 일본군에 완전히 포위당했고 수도, 가스와 전기 등 모든 기반 시설이 무너진 가운데 서서히 운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영국인들의 사교 장소이자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으로 유명한 ‘래플즈 호텔’에서는 더 이상 파티가 열리지 않았다. 대영제국의 ‘가장 좋았던 시절(Good old days)’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영연방 소속의 영국과 호주 군인들은 조호르 해협를 넘어 쇄도하는 일본군을 막으려 필사적인 방어를 이어가며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한편 싱가포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많은 반일 중국인들과 사실상의 지배 계급이었던 영국, 호주 출신의 잔존 백인 민간인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리게 된다. 이들 모두 도시를 탈출하기 위한 배편도 알지 못한 체 패닉 상태가 되어 무작정 항구로 모이게 되었다. 백인들은 대부분이 농장주나 식민지 관료 또는 군인들의 가족이었는데 본국보다 많은 급여에 넓은 주거환경과 이국적 풍경 등을 통해 여유로운 식민지 생활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유럽의 지브롤터와 더불어 대영제국의 가장 강력한 요새였던 싱가포르의 방어력을 믿고 잔류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국군의 거포는 남쪽의 먼 바다를 향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북쪽에서 공격 중이었다.


민간인들 모두 일본군을 극도로 두려워했는데 과거 일본군이 중국에서 벌인 여러 학살들이 이미 뉴스를 통해 전파되었건 것이다. 더불어 일본군의 홍콩 점령 시 영국 간호사들이 병원에서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퍼진 후 많은 여성 민간인들과 여성 간호부대원들도 우선적인 소개 대상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호주에서 파병 온 여성 간호부대도 있었는데 27세의 비비안 불윙클은 그 부대의 일원으로서 2월 12일에 ‘바이너 브룩(Vyner Brooke)’이라는 작은 배에 승선하여 싱가포르 항구를 빠져나가게 된다. 바이너 브룩호는 70미터 길이의 작고 낡은 민간 요트로 긴급히 영국 해군에 징발된 상황이었다. 배 안에는 정원을 3배가량 초과하는 300명 이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회색 유니폼에 적십자 완장을 찬 불윙클의 호주 여성 간호부대원 65명도 포함되었다. 갑판까지 사람을 가득 태운 배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싱가포르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승선자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싱가포르의 모습은 배에 승선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부두에서 서로를 밀치고 아우성 치는 가운데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지옥 같은 장면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대영제국의 ‘마지막 낙원’을 탈출했다.


고난이 시작되다

비록 탈출했다고는 하지만 불윙켈 일행의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미 싱가포르와 인접한 수마트라 섬에도 상륙하여 작전을 개시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지원하는 일본 군함이나 비행기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출발한 지 이틀 후인 2월 14일에 배는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사이의 방카섬 인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티타임을 가지며 여유를 찾고 있던 승객들은 오후 2시경에 선내의 긴급 사이렌 소리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바로 우려했던 일본군 중형폭격기 편대의 습격이었다. ‘바이너 브룩호’에는1차대전때 사용했던 두 정의 루이스 경기관총이 있었는데 이것들이 가용한 대공무기의 전부였다. 사실 이 구식 기관총으로 빠른 적기를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배는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십 발의 폭탄이 투하되고 기총소사를 받은 후 엔진이 파괴된 바이너 브룩호는 곧 조타 불능이 되었으며 15분 만에 침몰하기 시작한다. 구명조끼가 있건 없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열대의 바다인지라 수온이 그리 낮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구명 조끼가 없고 수영을 할 줄 모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익사하기 시작했다. 이때 불윙켈은 물이 새어 반쯤 가라앉은 구명보트를 발견했고 과감하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 작은 구명보트에 열두명의 간호원(그 중 세명이 부상을 입었다)과 세 명의 민간인 그리고 한 명의 해군장교가 가까스로 올라탔다. 멀리 육지가 보였지만 반쯤 가라앉은 보트를 기진맥진한 생존자들이 조정하는 것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이들은 무려 여덟 시간이 경과한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겨우 방카섬의 ‘라지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지만 음식도 의약품도 없던 일행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목표로 해안을 걸었다. 이들은 곧 또다른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런 와중에 다른 생존자 그룹들도 속속 해안에 도착했다. 해변에는 100여 명에 달하는 영국 민간인들과 해군 수병들이 있었는데 해군 장교의 지휘로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음식을 구하기 위해 출발했다. 인근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인들에게 간단한 음료를 주었지만 일본군의 보복이 두려워 더 이상의 음식을 주는 것은 거부했다. 마을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섬 안에는 이미 일본군 선발대가 들어와 있었고 이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라지 해변에 다시 모인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인식했고 결국 일본군에 항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해군 장교를 비롯한 몇몇이 일본군 본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문톡(Muntok)까지 도보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항복하려 했다. 이후 해변에는 일본군의 공습을 막기 위해 적십자 표시를 펴 놓은 상태에서 생존자 일행들이 뒤섞여 있었다. 간호원들의 수장인 아이린 드러먼드는 식량이 없는 상황에서 어차피 항복할 것이라면 걸을 수 있는 민간인들은 신속하게 문톡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불윙클을 비롯한 호주 간호사들은 부상병들을 남기고 떠날 수 없었고 이들과 함께 해변에 남게 된다. 이후 영국인 해군장교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돌아왔는데 20여명의 남루한 카키색 군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병사들이 함께 보였다. 일본군이었다.


죽음의 해변

해변에 도착한 일본군은 제식 화기인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착검을 한 상태여서 총이 더욱 길게 보였다. 이들은 우선 대다수가 군인이었던 남성들과 민간인, 간호사들이 섞인 여성들을 분리했다. 부상자를 제외한 남성들은 일본군들이 이끄는 대로 해변을 따라 걸었다. 여러 영국인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이동했는데 일본군의 의도가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백미터를 걸어간 후 여성 일행들이 보이지 않을 즈음 일본군은 사격자세를 취하며 남성들에게 일제 사격을 개시했고 일부는 총검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이미 분위기를 감지한 일부 군인들이 바다 속으로 달려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맞고 무더기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해변에 남아있던 여성들은 총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극도의 공포와 혼란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여성들은 잠시 후 돌아온 일본군들이 피에 젖은 총검을 바닷물에 씻는 걸 보면서 남성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알아 차리게 되었다. 이후 이 무력하고 불운했던 여성들에게는 전시에 여성에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해변에는 22명의 호주 간호사들과 한 명의 민간인 여성이 있었는데 부상자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유린당하고 말았다. 이중에는 불윙클도 포함되었는데 자신들의 더러운 욕구를 채운 일본군은 총검을 들고 여성들이 바다 쪽으로 걸어 가도록 지시했다. 서서히 바다로 걸어 가면서 물이 허리까지 잠기게 되자 불윙클을 비롯한 여성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 차렸다. 이들의 리더인 드러먼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동료들을 바라 보았고 “여러분 모두가 자랑스럽다!”고 말한 뒤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군의 일제 사격이 개시되자 동료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고 불윙클은 좌측 상복부에 통증을 느끼며 바다 속으로 쓰러졌다. 총알은 불윙클의 몸을 관통한 상태였는데 물속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총알들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그녀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살기위해 죽은 척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파도에 떠밀려 불윙클의 몸이 흔들렸지만 서서히 해변으로 밀려왔고 그녀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느덧 총소리도 멎게 되었고 약 십 분의 시간이 흐르자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불윙클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고 일본군이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해변에서 벗어나 내륙 쪽의 망그로브 밀림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군의 총알은 그녀 몸속의 주요 장기를 간발의 차이로 비켜갔고 이미 관통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글에 들어온 불윙클은 의식을 잃은 체 쓰러져서 이틀을 누워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배가 고픈 가운데 이동할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는데 다행히도 상처는 의도치 않았지만 소금기를 띈 바닷물에 의해 어느 정도 소독이 된 상태였다. 불윙클은 깨끗한 물을 찾아 이동했고 계속 상처를 치료하던 도중 해변에서 살해당한 줄 알았던 영국군 병참부대 출신의 킹슬리를 발견한다. 킹슬리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검으로 공격당했지만 끝까지 죽지 않았고 일본군이 떠난 후 불윙클처럼 정글로 도망쳤다. 그녀는 간호사로서 킹슬리의 상처를 돌보아 주며 정글에서 12일을 버티었다. 하지만 음식과 의약품도 없는 이곳에서 더 오래 버틸 수는 없었는데 결국 둘은 일본군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어 포로가 되고 만다. 이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던 킹슬리는 부상이 악화되어 며칠 후에 사망했다. 수마트라 팔렘방의 수용소로 이송된 불윙클은 다른 해변에서 살아남은 그녀의 호주 동료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였고 자신에게 발생했던 학살에 대해 어떠한 얘기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불윙클이 겪은 일들이 조금이라도 알려지는 순간 일본군이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불윙클은 3년 6개월에 이르는 지옥 같은 일본군의 포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생존을 위한 투쟁

그녀와 함께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여성 민간인들과 동료인 호주 출신 간호사들이었다. 본국으로부터 선망의 근무지였던 해외 식민지에서 주인으로 살던 이들의 처지는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우선 먹을 식량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수용소에서 배급했던 식재료는 대부분 벌레가 기어 다닐 정도의 부패한 쌀과 기타 부식거리 였다. 일본군은 마치 돼지우리에 먹이를 주듯이 땅에 식재료를 내동댕이쳤는데 여성들은 한 알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앞다투어 뛰어갔다. 남성 포로들은 육체 노동을 통해 각종 공사라도 투입되었지만 아무런 쓸모없는 여성 포로들은 일본군 입장에서는 식량이나 축내는 관심 밖의 하찮은 존재들이었다. 적십자사의 구호품은 창고에 쌓여 있었지만 수용소장은 의도적으로 분출하지 않았다. 여성 포로들은 여러 형태의 모욕을 강요 받았는데 수용소에서 일본군과 마주칠 때는 무조건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야 했다. 또한 맨손으로 화장실 배설물 처리 등에 동원 되었고 매일 벌어지는 ‘텡코(일본어로 점호라는 뜻: 同名의 BBC 드라마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에서 방송되었다)’에서 천황이 있는 도쿄 쪽을 향해 인사했고 “일본은 일등이며 영국과 미국은 꼴등”이라는 식의 유치한 구호를 반복적으로 주입 받았다. 포로들은 자조 섞인 농담으로 “일본군은 죄수와 여자를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자신들이야 말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최악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시간 가운데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포로들은 청소, 정리정돈 및 취사 등에 나름의 규율을 가지고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 갔고 네덜란드 수녀들과 더불어 신앙심을 굳게 이어 나갔다. 동시에 몇몇 여성 포로들은 살아남기 위해 경비병들과 음식이나 담배를 댓가로 매춘을 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비열하게도 극한의 상황에 처한 여성 포로들에게 장교들을 위한 클럽의 위안부로 종사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불윙클을 포함한 많은 포로들이 이러한 강요를 거부했고 굳건한 의지를 통해 끝까지 버티며 무너지지 않았다. 불윙클은 어느 순간 호주 출신 동료들에게 자신이 목격했던 ‘방카섬의 학살’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녀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경악했고 동시에 이 비밀을 굳게 지켜 주리라 다짐한다. 결국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포로들은 연합군의 비행기가 다시 활동함을 감지하였고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났는데 막연하게 나마 일본군이 밀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수용되었던 수마트라섬은 맥아더 장군의 태평양 섬 건너뛰기(Shoe string) 공략의 리스트에 들어있지 않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외부와 단절된 체 조용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45년으로 넘어가자 일본의 패망은 시간 문제였고 결국 동년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다. 수마트라섬의 오지에 있던 수용소에 종전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8월을 넘긴 9월초였다. 바이너 브룩호에 탑승했던 65명의 호주 간호사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던 것은 24명뿐이었는데 그 중에는 불윙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해방했던 영연방군 병사들은 수용소의 열악한 상태와 수용자들의 뼈만 남은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불윙클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종전과 생존을 자축했으며 얼마 후에 호주로 가는 귀국선을 타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미완의 정의

호주로 돌아온 불윙클은 군과 정부 당국에 방카섬 학살 관련 증언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증언을 들은 호주군 및 정부 관계자는 경악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군에 의한 성폭행 부분이 그러 했는데 이것은 살해당한 간호사들의 명예와 관련이 있었고 이미 슬픔에 빠진 유족들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더구나 1942년초 시점에 이미 홍콩에서 일본군이 영국 간호사들에게 벌인 만행을 알고 있었던 호주 당국으로서는 자국 간호사들을 싱가포르에서 늦게 철수시킨 것에 대한 대중의 예상되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불윙켈은 1946년4월부터 열린 도쿄 전범재판에 참석하여 방카섬 학살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겪은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었는데 호주 당국이 숨진 간호사들의 명예와 당국에 대한 비난 등을 고려하여 불윙클에게 성폭행 부분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녀는 당국의 지시를 따랐고 이 부분에 대해서 일체 얘기하지 않았다. 불윙클이 진술했던 성폭행 관련 기록은 보고서 내 해당 부분이 잘려 나갔다. 재판에서 밝혀진 사실은 방카섬 학살 당시 관련되었던 일본군 부대는 보병 229연대 1대대였는데 후에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에게 패하며 부대가 해체된 이후 어느 특정인을 기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대대장이었던 오리타 유우 소좌는 종전 시 관동군 소속으로 소련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고 시베리아에서 수용 생활을 했다. 아후 1948년6월에 일본으로 석방되자 마자 신분을 확인한 미군 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전범들을 수용한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오리타 소좌는 석 달 후인 9월에 감옥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로서 방카섬 학살에 대한 일본군 피의자들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사건은 이대로 종결되었다. 최종적인 희생자는 60명의 영국과 호주 병사들, 22명의 호주 간호사들과 한 명의 민간인 여성 등 총 83명에 달했고 이들에게 가해자에 대한 정의구현은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호주로 돌아온 불윙클은 1947년에 육군에서 전역을 하게 되었고 멜버른의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동시에 방카섬에서 희생된 동료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업에 자신의 여생을 바치게 되었다. 불윙클은 생전에 방카섬 학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은 육성 기록을 남겨 놓았고 2000년에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간이 흐른 2017년 이후 영국과 호주의 언론 및 여러 사학자들이 방카섬 학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이 담긴 자료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었다. 많은 호주와 영국 사람들이 드러난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가해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호주에서는 방카섬 학살이 벌어진 매년 2월 16일 경에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한다.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호주인들은 학살을 기억하면서 고인들의 비참했던 희생을 생각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을 함께 다짐한다. 비록 ‘미완의 정의’였지만 이 모든 것이 ‘비비안 불윙클’이라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한 명의 생존자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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