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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10. 2023

태평양 전쟁 제1호 포로

사카마키 가즈오(1918~1999) 일본의 군인

사카마키 가즈오

1941년 12월 8일 아침의 하와이는 더 이상 ‘태평양의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전날 일본 제국 해군항공대에 의해 진주만이 기습 공격을 당했고 무방비 상태이던 미 태평양 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일본군의 공격이 멈추었고 이미 일본 함대는 기수를 자국 쪽으로 향해 신나게 귀환하고 있었지만 패닉 상태에 빠진 미군은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진주만 주변에는 공격받은 전함으로부터 여전히 검은색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와이의 전 해안선에 주방위군, 육군 및 해병대 소속의 병사들이 혹시라도 다시 올지 모르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12월 8일 아침에 오아후 섬에 근무 중이던 주방위군 228연대 소속의 데이비드 아쿠이(David Akui) 상병은 소대장과 함께 하와이의 가장 큰 해변 중 하나인 와이마날로 일대를 순찰중이었다. 해변을 순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쿠이는 해변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동양인 남자로서 짧은 머리에 상의에는 해군 닻 모양이 부착된 카키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제복과 겉모습에서 판단해 볼 때 기습을 감행했던 일본군의 일원인 것이 확실했다. 아쿠이 상병은 곧장 다른 부대원들을 불렀고 남자를 후송시켰다. 치열했던 태평양 전쟁의 제1호 포로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특공 임무에 선발되다

1941년 중반 이후 아시아의 정세는 문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전 해에 나치가 서유럽을 휩쓰는 가운데 일본은 허수아비가 된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립국인 미국으로서도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일본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에 대해 금수 조치를 실시한다. 중국과 동남아 일대에 군대를 진주시킨 일본으로서는 석유 없이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음이 명백했고 군대를 철수 시킬수도 없었다. 양 측간에 평화를 위한 물밑 협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시간만 흘러가며 타결은 요원했다. 일본군은 이미 어차피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면 신속한 선제 공격을 통해 미국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입안한 이 작전의 핵심은 미국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하와이 진주만을 제국 연합함대의 항공모함으로 기습하여 미 해군의 숨통을 끊어 놓는데 있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해군항공대가 공격의 주력이었지만 일본군은 또 하나의 비밀 무기를 동원한다.


사카마키 가즈오는 1918년에 시코쿠 섬 동쪽인 도쿠시마현에서 태어났다. 서민 집안의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한때 교사를 꿈꾸기도 했다. 성장하는 가운데 사카마키는 당시 한창 팽창하고 있던 일본 제국 해군에 매력을 느꼈고 1937년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다. 그가 졸업하던 1940년에 전세계는 이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였다. 해군 소위로 임관한 사카마키는 항공모함에서 해군 전투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을 지망했는데 조국 일본을 위해서 당장이라도 임무를 부여 받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게 된다. 일본 해군 지휘부는 항공기에 의한 공격 외에도 보다 파괴적인 대구경 어뢰 장착이 가능한 소형 특수잠항정 투입을 결정한다. 잠항정이 미군을 피해 진주만에 침투만 할 수 있다면 항공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미국 전함에 추가적인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군은 작전 투입을 위해 10인의 패기 넘치는 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선발하였다. 사카마키도 그 중 1인이었는데 그가 위험한 임무에 선발된 데에는 비록 그가 죽어도 집안에 다른 형제가 많이 있다는 점도 작용을 했다. 어찌됐든 사카마키는 정예 요원으로 선발되었고 이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들이 탑승하게 될 잠항정은 갑표적(甲標的)이라고 불리었는데 길이 24 미터의 소형급 잠항정이었다. 갑표적은 수중에서 19노트(시속 37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였고 보다 큰 모함인 I-24 잠수함에서 발사되었다. 각 잠항정은 2인 1조로 가동되었는데 함의 전방에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450미리 어뢰를 두 발 장착할 수 있었다. 좁은 실내 환경으로 인해 잠수함의 생활은 다른 수상함 대비 상당한 인내력과 집중력을 요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잠항정은 함의 내부가 훨씬 더 비좁았기에 탑승자들의 체력과 극도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장비였다. 사카마키는 하사관인 ‘이나가키 기요시’와 한 팀으로 배치되었고 출항 전까지 에히메현(愛媛県)의 미츠쿠에만에서 작전을 위한 부단한 연습을 실시하였다. 철저한 보안 속에 1941년 11월 중순 이후 연합함대 기동 부대가 하와이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카마키의 잠항정도 모함인 잠수함과 함께 출발했다. 이제 거대한 또 하나의 전쟁이 태평양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혼란과 실패의 연발

사카마키 등이 탑승한 갑표적 잠항정 5척은 본격적인 진주만 기습이 실시되기 3시간 반 전인 1941년 12월 7일 새벽 3시 반에 모함으로부터 출발했다. 승무원들은 결의를 다지기 위해 흰색 무명 천에 ‘필승(必勝)’이라고 적힌 일장기를 군모 위에 둘렀다. 또한,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루 듯이 하얀색 장갑까지 착용한체 작전에 들어갔다. 모선을 출발한 잠항정들은 서서히 하와이 바다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진주만을 향해 접근하였다. 그 중 한 척은 수중에서 잠망경을 올린 체 잠항 하던 중 인근을 지나던 미군 수송선 안타레스호(USS Antares)에 발견된다. 수송선의 함장은 즉시 인근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 중이던 구축함 워드(USS Ward)에 이를 알리게 된다. 워드함의 함장인 아우터브릿지 소령은 진주만에 갓 도착한 신참 부임자였는데 잠수함의 잠망경 항적이 있는 것을 주의 깊게 관측한 후 적 잠수함이라 판단다. 그는 함에 장착된 76 미리 함포 사격을 명령했고 이후 잠수함에 치명적인 폭뢰 수 발을 투하한다. 함포와 폭뢰 공격을 받은 일본 잠항정은 잠망경과 선체에 큰 타격을 입었고 그대로 침몰하게 되었다. 아우터브릿지 소령은 이러한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고 즉시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보고했으나 ‘허즈번드 킴멜(Husband Kimmel)’ 제독이 지휘하던 본부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진주만의 미군에게 천금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카마키는 자신의 잠항정인 HA-19호의 잠망경을 올리며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의 잠항정은 진주만에 도달하기 위해 3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이로스코프(Gyroscope: 선박과 항공기의 평형 측정 기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카마키에게는 큰 임무를 앞두고 재앙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와 기요시 하사관은 자이로스코프의 수리를 위해 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사카마키 일행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섬 인근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는데 이 때가 일본기들의 공습이 막 시작되고 있던 오전 7시경이었다. 사카마키는 잠망경으로 몇 척의 미군 소해정 및 구축함을 발견했지만 항공모함과 전함이 최우선 공격 목표라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정찰을 하며 계속 이동하던 그의 잠항정 하부에 철판이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더 이상의 가동이 불가능해 졌다. 잠항정이 산호 위로 올라간 것이다. 산호 위에서 꼼짝 못하고 있던 사카마키의 잠항정을 불바다가 된 진주만에서 벗어나고 있던 미군 구축함 헬름(USS Helm)이 발견했고 즉시 포격을 퍼 붇는다. 미 구축함의 격렬한 포격의 여파로 산호초에 걸려있던 잠항정이 산호초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카마키는 좁은 선내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게 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사카마키는 다시 진주만으로 진입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를 했는데 구축함의 포격과 폭뢰가 그의 잠항정 인근을 때리면서 함의 양쪽 어뢰 작동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상황을 종합해 본 사카마키는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고 모선과의 집결 장소인 남동쪽 방향의 라나이섬으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잠항정은 이미 조종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사카마키는 최대한 인근의 해안으로 접근시켜 상륙해 보려 한다. 조류에 밀려 이동하던 중 잠항정은 와이마날로 해변 인근의 산호에 다시 한번 좌초하게 된다. 사카마키는 기요시에게 탈출하라고 지시했고(이것이 그가 살아서 기요시를 보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본인은 배를 자폭 시키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서 시한폭탄을 가동 시킨다. 이후 해치를 통해 밖으로 나온 사카마키는 험한 파도와 싸우며 죽을 힘을 다해 뭍 쪽으로 헤엄쳤고 그렇게 해변에서 정신을 잃게 되었다. 사카마키는 몰랐지만 일부만 부서진 그의 잠항정은 폭파되지 않았고 산호초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미군의 포로가 되다

사카마키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의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공식적으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것도 태평양 전쟁의 제1호 포로가 된 것이다! 그가 있던 곳은 호놀룰루 안에 있는 샌즈섬의 특별 관리 구역이었는데 여러가지로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이 사카마키의 온몸을 파고 들었다. 당시 일본군의 기준에서 본다면 사카마키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황국의 군인’으로서 목숨을 바쳐서 임무를 수행하고 이것이 불가능 하다면 자결을 통해 끝까지 충성을 다해야 했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본인 뿐만 아니라 가문과 국가에 대한 배반이자 지독한 수치로 여겨졌다. 그를 감시하는 미군 관계자들이나 경비병들은 딱히 구타나 가혹행위 등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카마키에게는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미군 측에 정식으로 자살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군 담당자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는데 사카마키가 정신이 나갔다 생각하며 그저 웃었을 뿐이었고 당연히 그의 자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이후 몇 달 동안 일본 본토는 자국의 승전보를 통해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였다. 야마모토 제독은 “잠자는 사자를 깨웠다”고 내심 걱정했지만 연 이은 일본군의 승리 소식에 이러한 걱정도 잊혀지고 있었다. 한편 사카마키와 함께 출항했던 5척의 잠항정은 모두 임무에 실패하고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는데 10명의 요원들 중 사카마키를 제외한 9명이 전사하였다. 일본 당국은 이들을 ‘아홉 군신(軍神)’으로 부르며 신문에 대서특필 했는데 당연히 사카마키는 그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그의 가족에게는 전투 중 사망했다고 짧게 통보하였다. 이후 당국은 그의 가족에게 사카마키가 행방불명 되었다고 애매하게 전달 하였다. 일본 해군은 미군의 포로가 된 그의 정확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비정하게도 끝내 종전시까지 가족에게 조차 정확한 상황을 함구했다.


미군의 포로로서 사카마키의 생활은 전쟁 중 다른 나라 포로들이 겪어야만 했던 비참했던 일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충분한 음식과 휴식을 보장받았고 장교로서 그에 걸 맞는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때 사카마키는 하와이에 있는 일본 거류민 중 그 자신이 러일전쟁 시 러시아군의 포로 생활을 했던 ‘나고 시노부’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불교에 귀의했던 나고는 사카마키를 비롯한 다른 포로들에게 자신의 포로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절대 삶을 포기하지 말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을 것을 강조한다.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사카마키는 샌프란시스코, 위스콘신, 테네시,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미국 전역의 포로 수용소를 옮겨 다닌다. 그는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영어를 배우며 미국인들과 소통하게 되었고 폐쇄적인 일본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미국인들의 사고 방식과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사카마키는 모범적인 포로 생활을 통해 미군 경비병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일본인 포로들과 문제가 생기면 통역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주는 완충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활 태도를 통해 미군도 그를 존중해 주었고 상호 간에 어느 정도의 신뢰를 쌓아가게 되었다. 어찌 보면 사카마키는 다른 일본군들이 ‘옥쇄 돌격’이나 ‘카미카제 특공’을 통해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제국 일본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열렬 군국주의자였던 사카마키는 참전과 포로 생활을 통해 어느덧 나름 확고한 신념을 가진 평화주의자로 변모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미국의 원자폭탄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통해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 사카마키를 비롯한 일본군 포로들에게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자신을 극복하다

전후 일본을 점령하러 가는 연합군, 특히 미군은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많은 걱정을 했다. 과거 태평양의 여러 섬과 오끼나와, 이오지마 등에서 죽을 때까지 (또는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죽은 이후까지) 미친듯이 저항하던 일본군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극히도 순종적이고 협조적인 일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예상과 다른 일본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대단히 혼란스러워 했다. 한편 1946년 중반에 고향으로 돌아온 사카마키에게는 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이미 그의 신분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몰론 그의 가족들은 무척이나 기뻐했고 죽은 줄 알았던 사카마키의 귀향을 반겼다. 동시에 태평양 전쟁 1호 포로로서 주변의 비아냥과 냉랭한 눈총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의 집에 여러 차례 칼이 든 무기명 소포와 함께 “자살로서 국민에게 사죄하라”는 편지가 전달되는 등 한동안 섬뜩한 협박이 계속되었다. 비록 같은 동포였지만 일본인들이 점령군과 포로 출신에게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달랐다. 전후 일본에서는 식량이 매우 부족했는데 오히려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넉넉한 배급을 받았던 사카마키는 이제 다른 모든 일본인들처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 1950년대가 되면서 사카마키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도요타 자동차’에 입사하게 된다. 그의 근무 기간 중 도요타는 일본 경제의 부흥과 함께 사세를 전세계로 엄청나게 확장했다. 이때 포로 시절에 배운 사카마키의 영어 실력이 큰 장점으로 작용했는데 이 외국어 능력 때문에 그는 해외영업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었고 차근차근 업무 경력을 쌓아 나갔다. 사카마키는 1969년부터 도요타의 브라질 법인장으로 상파울루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제2의 고향’이라 부를 정도로 사랑했다. 사카마키는 브라질에 많이 뿌리를 내렸던 거류 일본인들의 상공회의소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이어가던 중 69세인 1987년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4년 후인 1991년 중반 사카마키는 텍사스의 프레더릭스버그(Fredericksburg)에 있는 ‘태평양전쟁 국립박물관’을 방문했다.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군 해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전쟁 관련 경험을 나누고 강연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후 박물관을 돌아보던 사카마키는 검은색으로 도색된 한 전시물을 보고 온 몸이 굳어 버렸다. 그 전시물은 바로 50년 전에 그가 진주만을 공격할 때 탔던 갑표적 잠항정이었다. 하와이의 산호초에 좌초한 그의 잠항정은 미군에 의해 예인 되었고 이후 미국 전역을 돌며 미국인들의 전쟁 채권 구매를 독려하는 전리품으로 널리 선전 되었다. 그리고 이제 태평양의 승자인 니미츠 제독의 고향, 프레더릭스버그에 하나의 비석처럼 전시된 것이다. 사카마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잠항정을 보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시물에 손을 대고 마치 자신의 아들을 끌어 앉듯이 잠항정을 어루만졌다. 이것이 잠항정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고 이후 사카마키는 별다른 대외 활동 없이 칩거했는데1999년에 아이치현 도요타시에서 81세로 눈을 감는다.


사카마키의 장남인 기요시는 아버지 사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았다. 그가 어릴 때에 매년 진주만 기습일인 12월 8일(미국과의 시차로 일본은 7일이 아닌 8일에 기념한다)만 되면 온갖 언론사에서 사카마키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며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을 사카마키는 모두 거절했는데 어린 시절의 기요시로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아버지의 전후 썼던 비망록 노트를 보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세상에서 조롱 받으며 수차례 ‘자살과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버지의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기요시는 그 내용을 통해 세상에서 잊혀지고 싶었던 사카마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자살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의문이었던 자신의 이름이 기요시가 된 이유도 비망록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기요시는 바로 사카마키의 잠항정 전우였던 ‘이나가키 기요시’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카마키는 전쟁 관련한 기억을 모두 잊고 싶어 했지만 그 와중에도 먼저 보낸 동료 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이름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이에게 붙인다는 것은 그제서야 전쟁의 모든 기억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자신만의 의지 표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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