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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Jul 09. 2023

빌라 에르벨(Villa Air-Bel)의 방랑자들

나치로부터 탈출한 유럽 최고의 지성인들 (1940-1941)

빌라 에르벨에 모인 사람들. 배리언 프라이(기운데 안경쓴 남자)와 앙드레 브레통(오른쪽에서 두번째)

1953년에 8월에 설립된 이스라엘의 야드바셈(Yad Vashem) 기념관은 예루살렘의 헤르츨 언덕에 위치해 있는데 홀로코스트(Holocaust: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엄숙한 장소이다. 야드바셈 기념관에는 추모를 위한 다양한 조각과 기념물 및 관련 문서 등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의 전시를 통해 과거 유대인의 비극을 잊지 말고 미래에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 야드바셈 기념관은 고유 업무인 추모와 전시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인 발굴’ 사업이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한 ‘비유대인 사람들’을 발굴하고 포상하는 일을 말한다. 이렇게 선정된 사람들은 이른 바 ‘열방의 의인들(Righteous among the nations)’이라 불리며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최고의 감사와 예우를 받게 된다. 이 칭호는 우리가 잘 아는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영국 필립 공의 어머니인 앨리스 대공비(전쟁 시 그리스에 머물며 유대인들을 지원),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부영사로서 많은 유대인들을 구한 스기하라 치우네 등 약 28000여명에게 수여되었다. 선정된 인원들의 국적을 보면 나치의 학살이 극심했던 폴란드나 안네 프랑크처럼 많은 유대인들이 은신처에 숨었던 네덜란드 두 나라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은 모두 나치에게 발각되면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자국 내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던 의인들이다.

1994년에는 처음으로 한 미국인이 의인으로 선정되며 화제가 되었다. 당사자는 이미 1967년에 고인이 된 배리언 프라이(Valian Fry)라는 인물로서 그의 의롭고 열정적인 행동은 물론 그가 구한 사람들의 ‘상당한 특수함’으로 인해 더욱 세간에 회자되었다. 도대체 그가 구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에 대한 사연을 알아보기 위해서 1940년 여름의 남프랑스 꼬뜨다쥐르(Cote D’azur: 남프랑스 옥빛 해변)로 가 볼 필요가 있다.   

 

마르세이유, 방랑자들의 종착지

1940년 6월의 프랑스는 혼란의 극치였다.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6주만에 항복하게 되었고 전국에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극도의 쇼크 상태로 방랑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다시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문제는 프랑스인이 아닌 외국인들, 그것도 나치를 피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들의 대부분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였고 문화적으로는 나치가 혐오하는 모던하고 전위적 예술을 시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무조건 나치를 피해야 하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당시 북프랑스 및 대서양 연안은 나치에게 점령되었고 중부 및 남부 프랑스는 비시 프랑스라는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의 통치 구역이었다. 나치를 피한 많은 피난민들이나 정치인, 문화/예술인들은 우선 비시 프랑스 지역으로 넘어갔고 다음으로 유일하게 외국으로 갈 수 있는 통로인 남부 마르세이유 항구로 몰려 들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나 인근의 스페인, 포르투갈 또는 멀리 미국으로 가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당대의 최강대국이자 중립국이었던 미국이었는데 마르세이유에 소재한 미국영사관은 이러한 난민들의 쇄도하는 비자 요청으로 인해 직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염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중립국이었던 미국은 대규모 난민 유입의 부정적 파장을 우려했고 비자를 쉽게 발급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에 난민들은 마르세이유 여기저기의 허름한 호텔에 묶었는데 비상금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점차 자신의 귀중품들을 암시장에 내다 팔게 된다. 수중에 돈이 떨어진 난민들은 마르세이유 해변에서 굶주림 속에 노숙을 하며 지내야 했고 일부는 매춘도 했다. 검은색 제복의 비시 프랑스 경찰이 단속이라도 하는 날에는 재수없게 잡혀서 임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비시 프랑스 경찰에 끌려가면 독일과 프랑스와의 종전 협약에 따라 독일 측에 넘겨 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이 한치 앞이 안보이는 암울한 상황에서 미국이나 제3국으로 가기 위해 겨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육체적, 정신적인 한계에 다다르는 상황이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훗날 의인으로 선정된 베리언 프라이가 마르세이유에 온 것이 대략 이 즈음인 1940년 8월이었다.


탈출을 기획하다

1907년 미국 동부의 뉴욕에서 태어난 프라이는 월스트리트 금융가에서 근무했던 아버지 덕에 남부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는데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았고 여러 언론사에서 근무했다. 프라이는 1935년부터 ‘리빙-에이지(Living age)라는 잡지의 특파원으로서 독일 베를린을 방문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및 반대인사들에 대한 폭력을 동반한 만행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일반 맥주집에서 나치 돌격대에 의해 유대인 노인의 손등에 칼이 꽂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나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가 나치에 항복했고 많은 난민들이 나치를 피해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진다. 특히 이들 중에는 프랑스에 오랫동안 거주하거나 이전부터 망명 상태였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있었다. 프라이는 미국에서 이들을 돕기 위해 긴급구조위원회인 ERC(Emergency Rescue Committee)를 설립했고 그가 구해야 할 수 백명의 명단을 가지고 마르세이유로 달려왔다. 그의 수중에는 다리에 몰래 묶어서 숨겨 놓은 $3000이 전부였는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의 중요도나 어려움에 비하면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이는 활동에 필요한 ‘확실한 자금줄’과 접촉하게 된다.


메리 제인 골드(Mary Jane Gold)는 1909년에 시카고 재벌가문의 상속녀로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난방 기기 사업에 성공한 그녀 집안의 엄청난 부로 인해 골드는 1930년대의 많은 시간을 젊은 미국인들이 동경해 마지 않던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생활했다. 이러한 생활을 통해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과 안목을 높였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 및 작가들과 대단히 친밀한 교분을 나누게 된다. 그러던 중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게 되었고 모든 미국인은 즉시 프랑스를 떠나라는 미국 대사관의 경고도 무시한 체 골드는 남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이동했다. 골드는 이곳을 근거지로 그녀와 친분이 있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돕기 시작한다. 그녀 집안의 방대한 재산이 큰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골드는 여러 난민들의 마르세이유 체류 중 자신이 묶으며 거점으로 사용했던 스플랜디드 호텔(Splendide Hotel) 투숙을 도와주었고 음식과 증명서 등을 제공했다. 이렇게 두 명의 미국인이 마르세이유에서 뭉치게 되는데 이들은 저명한 난민들의 탈출을 위해 그들의 온 힘을 모으게 된다. 프라이는 미국 영사관에서 긴급구조위원회의 대표로서 상주했는데 하루 평균 25통 이상의 편지와 수백통의 전화를 받았고 100건 이상의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골드는 온 마르세이유를 다니면서 새로 유입된 난민들을 찾아 보살폈고 필요 時 이들에게 즉각적인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


난민들의 주요 탈출 루트는 크게 두가지였는데 우선 미국이나 제3국으로 가는 화물선에 승선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를 위해 난민들은 도착하는 곳의 비자를 가지고 있어야 했고 비시 프랑스 당국의 의심을 받을 만한 사람들(특히 독일계 유대인들)은 (유대인 표시가 없는) 위조 증명서를 소지했다. 화물선에 타려는 난민들은 대부분 여비가 부족했는데 이때 다시 한번 재력가인 골드가 엄청난 힘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난민들을 몰래 승선시켰던 항구의 보트 브로커들은 한 몫 잡기위해 막판에 값을 올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인간의 추하고 비열한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배에 오른 난민들은 대부분 밀항자 신세였기 때문에 선실이 아닌 화물칸이나 갑판 등에 자리를 배정받기도 했는데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나치나 비시 프랑스 경찰의 추적으로부터 피했다는 사실이었고 이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대서양을 넘어 한달여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친절한 선장이나 선원들은 이들에게 보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난민들의 목적지는 대부분의 경우에 뉴욕과 같은 미국 동부의 주요 항구들이거나 쿠바 또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등 카리브해의 주요 섬들이었다.


해상 루트와 더불어 난민들이 이용했던 루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하는 육상 루트였다. 사실 이 루트를 자신만의 노하우를 통해 확립한 사람은 골드의 지원을 받아 탈출했던 독일계 유대인 알베르트 히르쉬만(Albert Hirschman)이었다.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와 이태리 등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던 히르쉬만은 스페인 국경 근처의 바이율쉬르메르까지 이동한 후 누이와 함께 험준한 피레네의 산길을 걸으며 밤새 이동한다. 언제 프랑스 경찰이나 국경수비대가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역의 포도밭 농사꾼이나 양치기 몰이꾼으로 위장해서 여정을 이어갔고 결국 국경을 넘어 스페인에 도달했다. 이후 히르쉬만은 같이 탈출한 누이를 먼저 미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다시 마르세이유로 돌아와 골드 일행과 합류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아는 이 ‘피레네 루트’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며 다른 이들의 안전한 탈출을 도왔다. 무척이나 힘든 여정이었지만 히르쉬만 덕분에 많은 이들이 국경을 넘어 탈출하였고 나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훗날 뉘르베르크 전범 재판에 독일어 통역으로 참여하며 나치의 단죄에 참여한다) 이 탈출 루트를 이용하였던 가장 유명한 사람은 독일의 유대계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었다. 나치의 일급 수배자였던 그는 1940년 9월에 지친 몸을 이끌고 스페인의 국경 도시인 포르트보우(Portbou)로 넘어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정식 비자가 아닌 ‘통과 비자(Transit Visa)’를 소지하고 있었고 마침 프랑코 총통이 모든 통과 비자를 취소시켜 버리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월경 직후 스페인의 호텔에 억류 상태로 있었던 벤야민은 스페인 당국에 의해 다시 비시 프랑스로 송환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안타깝게도 다량의 모르핀을 복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그의 시신 옆에 놓인 출판을 기다리던 원고뭉치들은 일련의 소란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벤야민의 자살로 인한 영향이 있었는지 스페인 당국은 그와 함께 입국했던 다른 난민 일행을 포르투갈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기는 했지만 난민들의 탈출은 흔들림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탈출작전 전반에 큰 타격이 가해지는데 비시 프랑스 경찰이 주요한 난민들의 거점인 스플랜디드 호텔을 급습해서 많은 난민들을 잡아갔다는 점이었다. 이 호텔은 난민들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프라이의 임시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다. 더불어 프라이는 항구에 가까운 이 호텔에서 부두와 배들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이점이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프랑스 경찰도 프라이와 골드의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모른 척 내버려 두었던 이들의 행동이 점차 성공적으로 확대되면서 독일 측의 상당한 불만을 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독일 측의 반협박을 받은 프랑스 당국은 지배자에게 무엇인가 자신들의 성과를 보여줘야 했고 결국 호텔을 급습하게 된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탈출기획자들에게 마르세이유 시내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프랑스 감시자들의 눈에서 벗어날 다른 곳을 필요로 했다. 프라이와 골드는 난민들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적극적으로 물색했는데 그러던 중 1940년 가을에 마르세이유 동부 외곽의 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빌라 에르벨(Villa Air-Bel)에 모인 사람들

‘빌라 에르벨’은 20세기 초에 지어졌는데 고풍스러운 느낌의 거대한 3층 저택이었다. 연한 밤색의 건물에는 녹색의 창문이 있었고 야외 수영장과 함께 정원 밖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두 그루가 마치 경비병인 양 서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아름다운 숲과 비포장 도로가 있었고 멀리 남프랑스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더불어 빌라의 이름처럼 공기 또한 매우 깨끗하고 청량했다. 당시에는 인근에 건물이나 주거지도 많지 않아서 이곳은 프라이와 골드의 은밀하고 위험한 목적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이들은 이 저택을 렌트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부잣집 상속녀인 미스 골드의 금전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격자 무늬의 체스판 같은 흑백 바닥이 보였고 좌우로 수십 명이 모일 수 있는 응접실과 식당이 있었다. 응접실에는 다양한 양식의 클래식한 의자나 소파들이 놓여있어 사람들에게 안락한 휴식을 제공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면 침실 여러 개와 그리스 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책들을 소장했던 넓은 도서관이 있었다. 3층은 전체가 침실로 되어 있었는데 피곤에 지친 난민들에게 최고의 피난처가 될 곳이었다.


이곳에 하나, 둘 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프라이와 골드가 데려온 이들은 유럽, 아니 세계 최고의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작가이자 예술가들이었고 다수가 유대인들이었다. 식당에서는 독일 출신의 유대계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훗날 예루살렘으로 잡혀온 친위대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며 ‘악의 평범성’에 대한 책을 저술한다)가 그녀의 글을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있었고 저택 앞의 야외 수영장에서는 독일인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가 나체로 수영을 즐기곤 했다. 초현실주의의 창시자 격인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레통(Andre Breton)은 2층의 서재에서 사색하고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역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나 스페인 화가 오스카 도밍게스(Oscar Dominguez)의 모습도 보였고 쿠바 출신의 중국계 화가인 위프레도 람(Wifredo Lam)도 사람들과 정원을 거닐기를 좋아했다. 더불어 훗날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나 베스트셀러 작가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과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이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강렬한 색채로 유명했던 러시아 출신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은 인근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부인과 함께 종종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이 모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난민 신세였지만 자신들의 존엄을 잃지 않았고 신세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더불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집안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그녀 집안이 유대계였다)이 직접 이곳에 와서 이들과 합류한다. 그녀는 예술가들을 구하고 이들의 걸작들을 최대한 많이 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방문한 것인데 이곳에서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매주 일요일이면 앙드레 브레통과 그의 부인 재클린이 주도하는 모임이 열리곤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잡담을 하며 차나 마시는 모임이 아니었고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의 ‘지적 유희장’이자 ‘토론장’이었다. 이러한 모임에서는 현장에서 시와 대사가 만들어졌으며 즉흥적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마치 심포지움 또는 뮤지컬 공연장에 온 것 같은 분위기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의 컨디션과 사기를 올리기 위해 때때로 파티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저마다 자신만의 개성이 가득한 즉흥 복장을 만들어 참여하곤 했다. 특히 화가들이 초현실주의적인 복장으로 등장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상을 도와주었다. 술과 담배 연기가 이들의 지적 대화와 웃음 소리에 어우러지면서 ‘초현실주의 파티’의 긴 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은 빌라 에르벨에서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나름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긴장을 풀면서 자신들의 정신과 육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빌라 에르벨은 절망의 시대에 진정한 유머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함께 머물던 러시아 출신의 혁명가이자 시인이었던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는 빌라 에르벨 저택을 ‘비자를 기다리는 성(Château Espère Visa)’으로 장난스럽게 불렀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의 시간도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비시 프랑스 경찰이 프라이와 골드를 주시하는 가운데 빌라 에르벨의 존재와 목적을 알게 되었고 호시탐탐 이곳을 급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이 저명한 VIP 난민들을 프랑스 밖으로 탈출 시켜야 했는데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오게 되었다.


마침내 마르세이유를 떠나다

1940년 12월 초 비시 정부의 페탱 원수가 마르세이유를 방문하는 가운데 프랑스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도시 내의 난민이나 불순분자 등 비시 정부 관점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험요소 제거의 일환으로 프랑스 경찰은 빌라 에르벨을 급습하게 되고 모든 남성 난민들을 항구 앞에 있는 배에 단기간 수용하게 된다. 프라이나 골드 등의 격렬한 항의와 노력으로 이들은 곧 석방되지만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아니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비자가 없는 모든 난민들이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러한 가운데 해가 바뀌었고 프라이는 한가지 희소식을 듣게 되는데 화물선 한 척이 1941년 3월 24일에 마르세이유에서 출항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배의 선장은 프라이의 오래전 지인이었는데 300명 정도의 난민을 위한 자리를 만들 수 있음을 약속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난민들 모두 적법한 비자를 가진다는 전제였다. 종합적인 비자 발급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한달 여 남은 시간에 300명을 위한 비자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였다. 이때 또다른 조력자가 나타나게 된다.


하이럼 빙엄 4세(Hiram Bingham IV)는 2년 전인 1939년부터 마르세이유의 미국 입국비자 담당 부영사로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빙엄은 직업 외교관으로서 중국의 베이징, 영국의 런던 및 폴란드 바르샤바 등에서 근무했는데 마르세이유에 배치된 후 난민들의 딱한 처지에 깊은 동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급을 해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 비자 신청 대기자와 비시 프랑스와의 중립관계를 중요시해 난민에 대해 소극적으로 나서는 미국무부의 태도를 보며 그는 상당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코네티컷 주지사이자 상원의원이었던 하이럼 빙엄 3세(Hiram Bingham III)였는데 모험심 가득한 미국인 탐험가로서 페루에 있는 마추피추 유적을 최초로 발굴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열정적인 아버지를 닮았던 빙엄은 좌절하지 않았고 프라이와 협력하여 난민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우선 빙엄은 무국적자들에게 미국 비자는 물론 더욱 유용한 ‘난센 여권(Nansen passport: 노르웨이의 탐험가이자 활동가인 난센의 이름을 따서 만든 무국적자용 여권)’을 발급해 주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프라이가300명 분의 비자를 필요로 했을 때 빙엄은 아버지의 모험가적인 기질이 다시 발현되었는지 상당히 무모한 시도를 한다. 그는 프라이와 함께 미국 총영사나 본국 국무부 허락도 없이 본인의 사인 만으로 비자를 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비자가 하나 둘 완성되어 갔지만 여전히 발급 숫자는 충분치 않았다. 특히 정치가 출신 중 좌익/공산주의 계열 인물들의 미국 비자 발급이 쉽지 않았는데 빙엄이나 골드 등이 인맥을 동원하여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영사관에서 사정한 끝에 이들의 비자를 받아낸다. 이렇게 피를 말리는 비자 발급 전쟁을 통해 마침내 300명의 빌라 에르벨 및 추가 난민들의 비자 발급이 완료되었고 이들은 3월 24일에 화물선 ‘까삐딴 폴 르메를’에 탑승하게 된다. 앙드레 브레통, 레비 스트로스, 윌프레도 람 등 빌라 에르벨의 핵심 투숙객들이 함께 있었는데 아마도 이 배에 탔던 사람들 만으로 한 나라의 정신세계를 충분히 변화시킬 만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배는 한달 여의 항해를 거쳐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에 도착했고 이후 최종적으로 뉴욕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 난민들의 도착을 통해 세계의 지성의 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는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탈출시키기는 했지만 아직 남은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자신을 프랑스인이라 여기고 있었던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이었다. 그는 3월 말에 떠나지 않고 버텼으나 프랑스 경찰이 자신의 집을 수색하고 나서야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며 프라이를 찾아왔다. 프라이는 샤갈 부부의 비자를 얻기는 했지만 문제는 더 이상 떠날 배가 없었다. 고심 끝에 프라이는 다시 한번 일탈을 하게 된다. 미국 영사관에 있는 외교관 번호판의 차량을 몰래 빌려서(사실상 훔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 시도한 것이다. 한편 샤갈은 떠나기 직전의 긴박한 순간에 자신의 작품 없이는 갈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사실 예술가로서는 당연한 고집이었다). 결국 샤갈의 집에서 많은 작품들을 가져온 후 에야 스페인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국경에서는 다행히도 외교관 번호판을 단 차를 크게 조사하지 않았다. 샤갈 일행은 무사히 스페인으로 입국할 수 있었고 이후 배편으로 미국에 도착한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바로 다음날인 1941년 6월 23일이었다.    


이제 프랑스에 남은 것은 프라이, 골드와 빙엄 정도였는데 프라이와 골드는 1941년 9월 비시 정부로부터 프랑스를 떠나도록 명령을 받았고 귀국하게 된다. 빙엄 역시 동년 가을에 국무부의 명령에 따라 귀국한다. 이들 마르세이유 삼총사가 1940년과 1941년 사이에 긴급구조위원회를 통해 구한 사람들은 무려 2200여명에 달했다. 구조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최고의 지성인과 예술가로서 가히 인류의 보물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체 지나가는 듯했지만 전후 1945년에 프라이가 회고록 형태로 출판을 하면서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부와, 열정 그리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일면식도 없었던 타인을 위해 송두리째 퍼부었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적 노력을 통해 생존한 사람들은 후대를 사는 우리에게 보다 차원이 높은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모든 것이 1940년 여름에 마르세이유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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