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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Jun 12. 2023

가해자에게 할 수 있었던 최대의 복수

알렉산더 페체르스키 (1909~1990) 유대계 소련군인

알렉산더 페체르스키

2019년 6월 4일 전세계 주요 언론들은 한 인물의 사망 소식을 타전한다. 해당 인물은 ‘세묜 로젠펠트’라는 이스라엘의 한 노인이었는데 향년 96세로 텔아비브 인근의 양로원에서 숨을 거둔 것이었다. 이스라엘 총리인 ‘벤냐민 네탄야후’가 즉시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무엇이 그리 특별했기에 이 노인이 고위 정치인 및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것일까? 그가 특별한 이유는 홀로코스트와 연관이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로젠펠트는 2차대전 중 나치에게 큰 타격을 준 한 사건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로젠펠트는 유대계 소련군 포로로서 폴란드의 소비보르라는 유대인 절멸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동료 소련군 및 유대인 포로들과 함께 대규모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이때의 탈출 인원은 수용소 내 잔존 수감자의 절반 이상인 300명 정도였고 이것은 독일군 치하에서 관리되던 모든 수용소에서 발생했던 것 중 최대 규모의 탈출 사건이었던 것이다. 로젠펠트는 이후 우크라이나 내 파르티잔 세력과 합류하여 대독 투쟁을 이어갔고 2019년 당시 기준으로 그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탄생한 진정한 영웅으로서 이스라엘 각계 각층에서도 많은 추모를 받았다. 사실 이 탈출에는 로젠펠트 외에도 여러 명의 영웅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부터 얘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이 탈출의 모든 과정에 누구보다도 깊이 관여했고 과감한 행동을 주도했던 또 한 명의 유대계 소련군 포로이다.      


소비보르: 죽음을 생산하는 공장

1942년 1월 20일 베를린의 반제(Wannsee)에서 벌어진 ‘특별한 회의’ 이후 나치 독일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Die endgültige Auflösung)을 결정한다. 그 해결책이란 유대 민족의 ‘완전한 절멸’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한다는 생각을 몇 십 명의 관료와 군인들이 모여서 기계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나치는 빠른 의사결정만큼 신속한 행동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유럽 각지의 유대인 거주지구(게토)에 모아 놓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동부 유럽(특히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치는 추가적인 수용소들을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폴란드 동부에 위치한 ‘소비보르 강제수용소’였다.


소비보르 수용소의 건설은 1942년 3월에서 4월 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는데 수용소의 목적이 유대인의 수용이 아닌 살해였기 때문에 그다지 대규모 공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수용소는 크게 4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우선 외부를 연결하는 철도가 앞에 있는 행정동 및 병사들의 숙소가 있는 관리구역(Vorlager)이 있었다. 이곳은 유대인들을 가득 채운 외부의 열차들이 도착하는 곳으로 수용소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장소였다. 나치는 막 도착한 수용자들에게 자신들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열차 정거장 및 관리구역을 마치 알프스 시골의 전원주택단지인 양 아름답게 장식하고 꾸몄다. 온갖 공포스러운 소문과 얘기를 듣고 수용소에 도착했던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에 한숨 돌리게 되었는데 불과 몇 시간 후에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알 길이 없었다. 특히 폴란드 외에서 장거리를 이동한 서유럽 유대인들은 화물열차가 아닌 일반 승객용 객차를 통해 도착하였기에 자신들의 처우에 대한 긍정적 희망이 더욱 컸다.


소비보르 수용소의 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곧장 선별 작업을 거쳤는데 통해 의사, 목수, 화가, 재단사 등 수용소 내에서 쓸 만한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분리되었다(통상 5% 미만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역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성별이 구분되어 샤워장(제3구역)으로 끌려가게 된다. 샤워장 양 옆은 목재로 된 담장이 처 있어서 주변에서 사람들의 이동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이전에 ‘T4계획(독일인 장애인이나 정신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나치의 안락사 계획)에서 사용된 방법으로서 사실 소비보르의 친위대 관리자들 전원이 이 계획에 참여한 바 있었다. 샤워장으로 가는 길은 천국로(Himmelstrasse)라고 불렸는데 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지는 곧 밝혀지게 된다.


샤워장에 도착한 이들은 옷을 탈의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남자 수용자들이 성별에 구분없이 사람들의 머리를 깎았고 음모까지 제거했다. 여성들의 탄식과 수치심이 점점 커져갈 즈음 입장한 샤워실은 바로 문이 잠겨 버렸다. 하지만 샤워실에는 물이 아닌 일산화탄소 가스가 내부로 살포되었다(아우슈비츠에서는 찌클론-B라는 다른 가스가 사용되었다). 그나마 가스의 독성에 즉사한 사람은 다행이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호흡곤란과 다른 사람들의 온갖 비명을 들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가스실에서는 10분 후면 모든 소리가 멈추었는데 죽어 있는 사람들의 몸에는 피와 인간의 배설물들이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이것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존더코만도’(Sonderkomando: 유대인 수감자로 구성된 시체처리반원)들이 최후의 작업을 실시했다. 이들은 시체의 금 이빨 등을 뽑아내고 매장지로 옮긴 후 화장을 진행해 일련의 살인 과정을 마무리했다. 소비보르는 ‘죽음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던 것이다.


이후 선택된 사람들은 수용동(제1구역)에 들어가게 되는데 막사의 침대는 형편없었고 제대로 된 위생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수용자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했는데 주로 수용소 주변의 숲에서 각종 벌목이나 건설 작업에 동원되었다. 대게 이러한 장소에는 가학적인 경비병들이나 유대인 카포(Kapo: 수용소 내 유대인 관리자)들이 함께 했는데 구타와 가혹행위는 일상이었다. 일부 인원은 노동구역(제2 구역)에 있는 각종 작업장에 가서 본인 고유의 업무를 하게 된다. 이곳에는 각종 작업소, 수리소와 보관창고 등이 있었고 외부로 작업을 나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업무 강도는 수월한 편이었다. 비록 이곳의 일은 수월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한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배고픔이었다. 아침에 200그램 남짓 되는 조그만 빵 한조각에 도토리 등으로 만든 대용 커피를 먹고 중노동을 한 후 점심에는 건더기가 거의 없는 멀건 수프가 나왔고 저녁도 비슷했거나 거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대개 3개월 이내에 건강을 잃었고 이질이나 티푸스 같은 전염병도 수시로 발생했다. 어차피 나치는 이들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으므로 이들의 생활, 건강 및 시설 개선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병에 걸리거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들은 즉시 사살되거나 ‘샤워실’로 보내졌고 새로 오는 다른 유대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곳에서 막사 수용자들은 그저 살해되기 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었고 이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거나 열심히 한다고 생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저녁에 수용동에 들어오면 참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여러 사람들이 이성 애인을 만들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잠시나마 육체적인 쾌락과 심리적인 안정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현실부정이라도 하듯이 실제적인 생존 자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이들은 독일군 휘하에 있는 소련군 출신 전향 경비병들에게 시계나 보석 등 뇌물을 주고 외부 음식을 반입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길어야 3개월 후면 이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길은 오직 화장터의 연기가 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사방에 오직 죽음만이 가득했다.


타고난 리더의 등장

1942년을 거치며 ‘살인 공장’은 나치 입장에서 볼 때 폴란드의 다른 강제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우수한 효율성을 보이며 가동하고 있었다. 이후 폴란드를 비롯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유대인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유대계 혈통을 가진 소련군 포로들도 다른 곳으로부터 이감, 수용되었는데 이러한 포로들 중 ‘알렉산더 페체르스키’라는 인물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크레멘추크 출신인 페체르스키는 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많던 청년이었다.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즉시 징집되었는데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와중에 페체르스키는 소련군 초급 장교로서 나름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독일군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1941년 10월 모스크바 공방전의 일환인 ‘비야즈마 전투’에서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페체르스키는 몇 군데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가 민스크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임이 발각된다.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독일군에게 유대인으로서 할례(종교적 이유로 받는 포경수술)를 받은 것이 들통난 것이다. 독일군이 페체르스키에게 유대인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즉시 시인했고 결국 1943년 9월에 소비보르의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끌려오게 된 것이었다.


비록 수용소에 왔지만 페체르스키는 처음부터 운이 좋았는데 같이 끌려온 2천여명의 일반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들 중 그를 비롯한 80명 만이 수용동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나머지 1900명 이상의 사람들은 곧장 가스실로 직행했다. 페체르스키를 비롯한 소련군 포로들은 자신의 군복을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민간인 신분이었던 수용자들은 이들의 등장에 묘하게 복합된 감정을 느꼈다.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던 수용자들에게는 군대 경험을 갖춘 리더가 절실히 필요 했는데 지금 그들 앞에 그 비슷한 누군가가 등장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상호 신뢰를 쌓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수용소 내 폴란드계 유대인과 서유럽 출신 유대인간에도 상호 불신이 대단히 컸는데 페체르스키가 속한 소련군 포로 출신 유대인들은 이들이 처음 접해보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페체르스키를 비롯한 소련군 포로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했지만 이 불확실함을 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용소에 온 첫발 밤에 페체르스키는 기존 수용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소비보르 수용소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가 해야 할 일이 탈출임을 뼈 속 깊이 자각한다. 사흘째가 되던 9월 21일에 그는 야외에 벌목 작업을 나가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 날의 독일인 감독자는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던 ‘카를 프란첼’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수용자들의 작업을 감독하며 자신의 심심풀이 희생자가 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한 유대인이 작업 중 쓰러졌고 프란첼은 그에게 마구 채찍질을 가하였다.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페체르스키였다. 채찍질에 몰두해 있던 프란첼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고 페체르스키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자신을 쳐다보던 당당한 소련군 포로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프란첼은 사실 페체르스키에게 기선제압을 당한 상황이었다. 그는 페체르스키에게 나무 그루터기 하나를 5 분 내 없애면 포상하겠다고 했는데 페체르스키는 4분이 조금 지나서 그 일을 뚝딱 해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음을 감지한 프란첼은 그에게 포상으로 담배를 주려 했다. 그런데 이때 페체르스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프란첼에게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사양하며 말했던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페체르스키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 감독관을 압도했다. 자리를 떠난 프란첼이 잠시 후 다시 돌아오며 빵과 버터를 가져다 주었다. 이때 페체르스키는 목숨이 두 개가 아니라면 감히 할 수 없는 발언을 했는데 자신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당당하게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다. 잠시 후 프란첼은 말없이 사라졌다. 이 소설 같은 영웅담은 수용소 내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면서도 쉽게 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목격자가 많이 있었고 페체르스키는 순식간에 ‘수용자들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그날 밤 군인 출신의 유능한 리더를 애타게 찾고 있던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난 것이었다.     


저항의 준비

수용소 내 일반인 수감자들의 다수가 폴란드계 유대인이었고 이들의 대표는 ‘레온 펠트핸들러’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수용소 내 물품분류소에서 일하면서 나름의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었고 여분의 음식을 얻어서 생존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와 리더그룹은 8월경 에는 나치가 인근의 베우제츠(Belzec) 강제수용소를 폐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우제츠가 폐쇄된 후 소비보르로 옮겨져 살해된 유대인이 몰래 남긴 쪽지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모두가 다음 차례는 소비보르가 될 것으로 직감했다. 무언가 과감한 행동이 벌어져야 할 시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탈출을 지휘할 적당한 리더가 없었던 것이다.


펠트핸들러 등은 페체르스키와 통성명을 시작했는데 상호 언어가 통하지 않아 러시아어 통역자를 사이이에 두고 대화가 이루어졌다. 페체르스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그가 알고 있던 전황에 대해 공유해 주었고 빠른 시간 내에 소비보르를 탈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더불어 그가 생각하는 탈출 방식을 설명했는데 한, 두 명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숫자의 수용자들을 탈출 시키고자 했고(어차피 남는 사람은 죽을 운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과 경비병들에 대한 적극적인 복수도 생각 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탈출, 아니 봉기의 방식에 대해 합의를 보았고 일자까지 점검하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점호 전에 친위대 감독관들을 유인하여 대거 살해한다. 이후 오후 5시 점호 때 야외 작업이 있다는 거짓 명령을 내려 가스실 작업 인원은 빼고(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모든 인원들이 다같이 수용소 밖으로 걸어서 나간다는 것이었다. 페체르스키는 친위대 감독관들만 없다면 경비병들이 지휘관 없이 우왕좌왕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일견 말도 안 되는 미친 계획처럼 보였지만 앉아서 가만히 죽는 것보다는 나았고 사실 더 좋은 다른 대안도 없었다. 거사의 시기는 대략 10월 중순으로 잡았고 이후 10월 14일로 결정되었다.


계획이 세워지자 핵심 인물들에게 각자의 역할이 배분되었고 모두 긴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친위대 감독관들을 소리 없이 죽이려면 칼과 같은 무기들이 필요했다. 이것은 수용소 내 작업장과 수리소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이 만들거나 조달해 주었다. 칼, 낫 및 도끼들은 독일군과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보관되었고 독일군과 경비병 막사에 접근이 가능했던 사람들을 통해 소형 총기와 수류탄 등이 몰래 반입되었다. 페체르스키는 루카라 불리던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을 만난다는 핑계로 여성 수용동을 자주 방문했는데 사실 이를 통해 거사를 준비하기 위한 모임을 가지려 한 것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10월 14일이 밝았다. 자신들의 수용소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시킬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해방의 날이 오다

1943년 10월 14일 소비보르 수용소의 일과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점심 시간 이후 수용자들은 독일군 감독관들을 한 명씩 부르기 시작했는데 주로 제2 구역 내 작업장에서 그들을 위한 물건들을 가져왔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대게 가죽제품, 보석 등의 값비싼 사치품이었고 나치 감독관들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첫번째 목표는 외부 일로 부재중인 수용소장을 대신해 대리 임무를 맡고 있던 ‘요한 니만’(Johann Niemann)이었다. 그를 제거하면 전반적인 수용소의 지휘 체계가 무너질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니만은 가죽 재킷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작업장으로 왔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죽 재킷이 아닌 복수의 도끼날이었다. 이렇게 봉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니만의 시체를 치운 수용자들은 그의 피스톨을 챙긴 후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오후 5시 점호 이전까지 독일군 감독관의 절반인 총 11명이 살해되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군과 경비병 숙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숙소 정리를 하는 척하면서 소총과 탄약을 모포에 말아서 가져왔다. 소총은 총을 다룰 줄 아는 소련군 포로들에게 전달되었고 작전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해 본 페체르스키는 조만간 자신들의 행동이 발각될 것으로 보았고 점점 조바심이 났다. 그는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고 바로 본 게임에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페체르스키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 나팔수는 5시 점호 시간보다 빠른 시간에 집합 나팔을 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던 수용동과 작업동의 유대인들은 이른 나팔 소리에 어리둥절하며 건물에서 기어 나왔고 서로 비슷한 상황에 있던 다른 수용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펠트핸들러는 사람들을 모아 대오를 갖추게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점호 장소로 행진을 이끌었다. 점호 장소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거사가 진행 중이라는 귓속말이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비독일인 경비병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당황하는 그 순간 몇 명의 소련군 포로들이 일단의 경비병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수용자들과 다른 경비병들은 그제서야 사태 파악을 하게 된다. 페체르스키는 혼란에 빠진 수용자들에게 모두 탈출할 것을 외쳤고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을 것을 부탁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수용자들이 출입문 및 철조망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한 감시탑의 기관총이 탈출하는 수용자들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지만 총을 가진 수용자들이 응사하자 곧 침묵했다. 사방에서 뛰어가는 수용자들과 이들을 향해 뒤에서 사격하는 경비병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독일군 감독관들까지 수용소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뛰어갔고 철조망에 막혔지만 사람들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철조망 밖에는 무서운 지뢰밭이었고 숲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비록 앞에서 지뢰가 터져 죽을지라도 이들은 쉬지 않고 달려갔으며 그렇게 300여 명의 사람들이 숲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페체르스키와 펠트핸들러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지면서 계속 도망쳤다.


수용자들 절반 이상이 탈출한 후 남은 독일군 감독관들과 경비병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자신들의 분노를 쏟을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수용소에는 탈출하지 않은 수용자 175명이 있었는데 화장장 근처로 끌려간 후 전원 사살당한다. 탈출 과정에서도 150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지뢰와 기관총 사격의 희생자였다. 이후 독일군들은 증원 병력을 불렀고 본격적인 추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50명 이상의 탈출자들이 붙잡혔고 추가로 사살당한다. 하지만 아직도 생존하여 탈주중인 12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탈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지만 그간 도살장의 소처럼 당하고 살던 유대인들에게 소비보르의 봉기는 통쾌한 복수이자 승리였다. 동시에 독일군들에게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노한 친위대 수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10월 19일에 소비보르 수용소의 파괴를 명령한다. 이후 가공할 살인수용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려는 듯이 나무가 심어졌다.


1942년 5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소비보르 수용소에서 약 20만명으로 추정되는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불굴의 정신과 의지

소비보르를 탈출한 페체르스키는 이후 50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며 인근의 파르티잔을 찾아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떠나 소련군 포로들로 이루어진 소수의 그룹으로 따로 움직였다(사실은 음식을 구해온다고 얘기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페체르스키는 적은 무리로 움직여야 추격하는 독일군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생존의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었다. 최종적으로 ‘세묜 로젠펠트’를 포함한 9명의 소련군 포로와 함께 부그 강을 도하했고 벨라루스 지역에서 숨어 지냈다. 이후 그의 그룹은 지역 內 유대인 파르티잔을 만나게 되었고 한동안 그들과 같이 행동하며 독일군과 싸우게 된다. 6개월 이상을 숨어 지내던 페체르스키는 1944년 봄에 마침내 소련군 본진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웅 대접을 받을 줄 알았던 그는 스탈린의 부조리한 ‘명령 270호’(소련군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야 하며 독일군에 항복한 자는 처벌한다는 내용)와 관련하여 죄수 부대에 배치 받고 최전선에서 다시 싸우게 된다. 페체르스키는 1944년 8월에 라트비아의 ‘바우스카’에서 싸우게 되는데 이곳에서 지뢰를 밟고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세옹지마였던지 치료를 받는 병원에서 미래의 부인이 될 간호사 올가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결혼하여 페체르스키의 집이 있는 돈 지역으로 이주한다.


전후 페체르스키는 지역의 극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소비보르 탈출 시 알고 지내던 서유럽 거주 생존 유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문제는 이러한 서방 측 거주자와의 서신 교환이 냉전 시기 소련 당국의 의심을 사게 되었는데 그는 일시적으로 체포되기도 하였고 결국 직장에서 해고된다. 당시 진행 중이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는 소비보르 학살이 중요한 의제 중 하나로 다루어졌는데 법정은 페체르스키를 증인으로 요청했지만 소련 당국은 이를 거절했다. 시간이 흘러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에서야 그는 예술교사로서 직업을 구할 수 있었고 마침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련 당국은 서방 측의 인터뷰나 재판 참석 요청에 대해서 일관되게 페체르스키의 출국을 막았다. 소련 당국이 마지막으로 그의 출국을 막은 것은 1987년이었다. 당시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그의 소비보르 탈출을 다룬 영화가 출품되었고 페체르스키 역할을 맡았던 네덜란드 출신 배우 ‘룻거 하우어’가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끝내 해외로 갈 수 없었다.


이제 페체르스키는 노쇠한 소련이란 나라만큼 늙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해체가 임박한 1990년 1월에 자택에서 사망하게 된다. 페체르스키의 죽음은 전세계로 타전 되었고 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영웅적 행동은 더욱 더 그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폴란드와 러시아 등지에서 그에게 사후 훈장을 추서 했던 것이다.


소련에서의 페체르스키는 비록 그 영토 밖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수용소에서 그가 보여줬던 강인한 정신과 의지를 통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더불어 이러한 정신과 의지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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