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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Jun 06. 2023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900일의 포위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생존자들 (1941~1944)

포위기간 중 배급받은 빵 한 움큼을 쥐고있는 레닌그라드 시민

1942년 8월 9일 밤 소련의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에서는 다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1924년에 사망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라 개명된 이 혁명의 도시(1차대전 이전에는 상트-페테르부르그, 대전 이후에는 페트로그라드로 불렸다.)는 당시 침공한 독일군의 공격을 사방에서 받으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예고 없는 독일군의 포탄공세가 이어졌고 식량배급이 줄어든 시민들은 매일매일 죽음과 마주하며 생존을 위한 극한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레닌그라드에 이날 밤은 우선 소련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있었다. 곧이어 독일군과 마주한 전선과 시내 곳곳의 라우드 스피커 및 라디오에서 동일한 음악이 흘러나오게 된다. 놀랍게도 이 음악은 당시 흔히 나오던 군가가 아니었다. 스피커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오케스트라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곡이었는데 연주 장소는 바로 레닌그라드의 중심부에 있는 ‘그랜드 필하모닉홀’이었다. 연주회장은 당간부부터 군인 및 일반 시민들까지 10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동그란 안경을 쓴 창백한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자 청중들은 숨죽이며 연주에 집중했다. 오케스트라 단원 대부분이 극도로 여위어 보였고 객석의 사람들이 연주가 끝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사실 객석의 사람들도 여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연주곡은 드럼 소리를 배경으로 반복되는 멜로디가 인상적이었는데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연주가 종료되자 일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탈진하여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당시 연주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연주가 실수없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청중들은 모두가 기립했고 한 시간 이상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감동에 겨워 서로 부둥켜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날의 교향곡은 소련의 유명 음악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것이었는데 독일군과의 투쟁을 이어가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다. 이 곡의 연주를 통해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자신들이 그리고 자신들의 도시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불어 그들의 불굴의 정신력과 무한한 투지를 독일군과 전세계에 보여줬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모든 고통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위기의 도시

1941년 6월 22일 작전명 ‘바바롯사’를 통해 소련을 기습한 히틀러의 300만 군대는 세개방면으로 나누어 소련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독일군들이 지난 여름 서유럽에서 거둔 승리를 다시 한번 재현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침공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은 수도인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그리고 북부집단군은 ‘유럽으로 향한 창문’인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진군한다. 특히 독일군 장군 중에서도 덕장이자 용장으로 유명했던 ‘빌헬름 폰 레프’ 원수 휘하의 북부집단군이 가장 큰 성과를 보였다. 북부집단군은 독일에게 우호적인 ‘발트 3국’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계속 북상하여 7월 중순부터 이미 레닌그라드 외곽까지 압박하게 된다. 더불어 2년 전 겨울전쟁에서 국토의 10%를 소련에 강제 병합 당한 핀란드군이 복수의 칼을 갈며 북쪽에서 레닌그라드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독일군의 기나긴 보급선은 한계치에 다다르게 되었고 북부집단군은 잠시 진격을 멈추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소련군은 이 틈을 이용해 시의 방어 시설을 결사적으로 강화하였고 2중으로된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더불어 시 당국은 시내의 많은 민간인들을 외부의 안전지대로 소개 시키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인근 지역에서 레닌그라드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숫자 역시 꾸준히 증가했고 결국 300만 가량의 소련 시민들이 시에 남게 된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군의 북서군관구 소속으로 스탈린의 절친한 술친구인 ‘클레멘트 보로실로프’가 그 방어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스탈린과 상스러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결정적으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무능한 인간이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욕을 하거나 싸움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스탈린도 이러한 옛 친구의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 2년 전 극동의 노몽한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바 있는 용장 ‘게오르기 주코프’를 9월 초에 레닌그라드로 급파한다. 주코프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했을 때에 레닌그라드는 이미 북쪽의 핀란드군과 남쪽의 독일군에 포위된 상황이었다. 레닌그라드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양쪽에서 밀고오는 추축군의 군대를 방어해야 했고 300만 이상의 시민과 또 다른 100만 이상의 병사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있어야 했다. 시 우측에 위치한 ‘라도가 호수’를 통한 수상 보급은 독일 전투기 및 급강하폭격기의 공격으로 인해 야밤에나 소량으로 가능한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립된 시에 있던 식량창고가 독일군의 폭격을 받으며 전소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시 당국의 고민은 깊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군은 포격의 수위를 높였고 사람들은 패배주의를 넘어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강인한 주코프로서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고 지휘관이었고 지극히 냉정하게 행동한다. 주코프는 쓰러져가는 ‘혁명의 도시’를 구하기 위해 탈영병이나 패배주의자 등을 대상으로 즉결처분을 실시할 정도의 극약 처방을 단행했다. 이후 도시의 운명을 결정 지을 몇 가지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정작 이러한 상황은 주코프도 몰랐던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 결정이 소련이 아닌 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주받을 운명에 처하다

개전 후 민스크, 스몰렌스크, 우만 그리고 키예프까지 소련의 대도시들을 점령한 히틀러는 1941년 10월에 그 수도인 모스크바 공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공격을 통해 독일군도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는데 이의 보강을 위해 북부집단군 소속의 제4기갑집단을 모스크바 공략에 동원하게 된다. 즉 북부집단군에는 레닌그라드 공략을 위한 ‘결정적인 주먹’이 없어진 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맹국인 핀란드는 레닌그라드로의 공격을 중단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2년 전 소련에게 빼앗겼던 자국 영토를 충분히 수복했다고 판단하였고 더 이상의 공격은 자제하고 있었다.(이러한 핀란드의 ‘전략적 선택’이 훗날 소련에 의해 다시 연합군으로 받아들여지고 전후 소련으로부터 크게 보복을 당하지 않았던 단초가 된다.) 이제 현실적으로 레닌그라드를 공략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독일 측은 레닌그라드를 굴복시킬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포위를 지속 함으로서 레닌그라드의 저항 의지를 꺾고 궁극적으로는 도시를 스스로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전에 벌어진 소련의 각 도시에서 벌어졌던 포위전을 생각하면 나름 타당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소련 도시들과 달랐던 점은 레닌그라드의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이었고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는 점이었다. 즉 소련측으로서는 부양해야 할 자국민이 많다는 것이었고 포위된 상태에서 이들에게 적절한 식량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다수의 시민들이 굶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략하는 히틀러 입장에서 ‘인간 이하’로 여기고 있는 러시아인 몇 명이 죽는 것은 아무런 고려 요소가 되지 못했다. ‘예술과 혁명의 도시’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시는 7월부터 본격적인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이 당시만해도 하루 인당 400그램 정도였던 빵 배급량이 이후 점진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시민들은 이 배급 마저도 대략 5시간 이상 대기줄에 선 후 받을 수 있었는데 종종 배급 행렬 주변에 독일군의 포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살기 위해 시민들은 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빵 배급을 기다렸다. 여기에 더해 10월 말부터 기온이 영하로 급강하하자 시민들에게 밖에서 장시간 서 있는 다는 것이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이것은 당시 방한복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식량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11월이 되자 배급량은 하루 인당 125 그램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의 양은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이 마저도 군인, 노동자와 비노동자 사이에 구분이 있었다. 이때부터 레닌그라드에서는 본격적으로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하루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길에 시체가 나뒹굴어도 사람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당시 소련은 수도인 모스크바로 쳐들어오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외된 레닌그라드는 이대로 굴복할 것처럼 보였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굶주림에 지친 시당국과 시민들은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우선 파괴된 바다예프 식량 창고에서 나온 설탕 및 밀가루를 최대한 긁어 모으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까지 먹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각종 재료들이 식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는 다양한 식물 중 식용이 가능한 것을 구분하여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배급된 빵에는 상당량의 톱밥이 갈려서 밀가루와 혼합되었다. 시의 많은 공원 및 마당들이 채소 경작을 위한 텃밭으로 활용되었다. 지금까지는 식용 대상이 아니었던 가축의 내장 등은 끓여서 역한 냄새를 제거한 후 식용으로 전용된다. 시중에는 심지어 가죽제품의 일부를 가지고 수프를 끓였다는 괴담 같은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후에 사람들의 타겟이 된 것은 애완동물들이었는데 거리의 개와 고양이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은 공원의 비둘기나 쥐와 같은 작은 조류나 설치류 그리고 곤충들 역시 단백질 공급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마저 충분치 않았던 사람들은 타인의 배급권을 빼앗았는데 시당국은 이것을 살인에 버금가는 행위로 처벌하였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욱 커지자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동시에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일부 시민들이 인육을 먹는다는 소름 끼치는 얘기였다. 사실 일부 사람들이 죽은 시체에서 일부 부위를 때어가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고 비밀리에 인육이 거래되고 있었다. 굶주림에 미쳐버린 사람들은 약탈의 대상을 기존의 죽은 시체에서 확장하게 된다. 병원에 간 아이 엄마들은 간호사들로부터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갈 때 항상 옆에 붙어 있으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의아한 조언은 인육을 목적으로 하는 납치의 가능성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NKVD(내무인민위원회: 훗날 KGB의 전신)에 적발되면 즉결 처형감이었고 소련 시절에는 ‘인육에 대한 언급’ 자체가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이러한 식인 행위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굶주림과 더불어 시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추위와 위생의 문제였다. 1941년 겨울은 북쪽에 위치한 레닌그라드 시민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추위였는데 영하 35도까지 내려갔다.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러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태워야 했다. 종이 및 책들이 난로 속에 들어갔고 너도 나도 주위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집안의 집기를 부수기 시작했는데 부엌의 서랍장들이 우선적인 대상이 되었고 이후 집 안의 각종 가구들이 하나, 둘 쪼개어져 난로 속으로 들어갔다. 살인적인 추위는 당연히 상하수도 상태에 영향을 미쳤고 배설물은 요령껏 버려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씻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사치였다. 죽은 이들의 시체는 추위와 묘지의 부족으로 매장조차 불가능했는데 유족들은 그저 집안에 있는 커튼을 활용하여 마치 미이라처럼 싸매고 외부로 끌고가서 버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일가족이 모두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는데 이중 가장 알려진 것은 당시 불과 11살의 소녀였던 ‘타티아나 사비체바’의 사례였다. 레닌그라드 출생으로 불과 6살 때 아버지를 잃었던 타티아나는 ‘안네 프랑크’가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일기를 쓴 것처럼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상황을 공책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의 공책 한 쪽에 가족 6명의 죽음을 순서대로 분단위까지 기록했다. 처음에는 언니가 그리고 할머니, 오빠, 삼촌들이 죽었고 마지막으로 1942년 5월 13일에 타티아나의 엄마가 죽었다. 이후 그녀는 다행히도 레닌그라드 밖으로 소개될 수 있었지만 오랜 영양실조에 따른 결핵으로 1944년 7월에 사망하게 된다. 타티아나의 일기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그녀 일기의 마지막은 “타냐(타티아나의 애칭) 혼자 남았다”라는 짧은 한 문장이었다.     


11월 말이 되자 마침내 라도가 호수가 두껍게 얼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화물트럭을 이용한 식량 및 연료가 반입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많은 인원들을 레닌그라드 밖으로 탈출 시킬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길을 ‘생명의 길’이라고 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를 독일군이 가만히 놓아 둘리 없었다. 라도가호의 보급 행렬은 안전상의 이유로 느리게 움직였고 독일군이 노리는 공격 목표가 되었다. 독일 공군의 폭격 이후에는 호수의 얼음이 박살 났고 트럭과 사람들이 빠지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도시에 남아있었거나 혹은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 모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1941년 겨울에서 이듬해 봄 사이가 레닌그라드 포위 기간 중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이 모든 어려움과 위험 속에서도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굳건히 버티며 생존했고 병사들은 밀리지 않고 전선을 지켰다. 이후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우다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그)는 피터 대제가 1703년에 도시를 건설한 이후로 유럽의 다양한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대외적인 창구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은 문화-예술적으로 대단히 수준이 높았고 더불어 남들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반골 기질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레닌그라드 출신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신동으로 불리며 소련에서 상당한 지명도를 갖춘 음악가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자 대공감시원 및 의용소방대원으로 활약하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게 된다. 또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시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고자 했는데 이렇게 해서 하나의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교향곡을 작업하는 도중인 1941년 10월에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으로부터 시를 떠나라는 공식적인 명령을 받게 된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 동부에 위치한 임시 수도 쿠이비셰프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에서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7번 교향곡’을 완성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은 1942년 3월 5일에 쿠이비셰프에서 ‘볼쇼이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이후 악보가 마이크로 필름에 옮겨졌고 이란의 테헤란을 거쳐 영국과 미국에도 보내진다. 한달 후 런던과 뉴욕에서도 연주된 그의 7번 교향곡은 순식간에 미국과 영국민들에게 독일에 대항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인들의 상징으로 각인된다. 그는 연합국들 사이에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다는 혈맹으로서 동질감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이러한 기여에 따른 관심으로 쇼스타코비치는 1942년 7월 20일자 타임지의 표지로 등장한다). 비록 이 교향곡에 별도의 제목은 붙지 않았지만 작곡자인 쇼스타코비치의 의도와 활동을 고려할 때 암묵적으로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이후 소련 당국도 공식적으로 레닌그라드 교향곡으로 부르게 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정작 이 교향곡의 배경이 되는 레닌그라드에서는 아직도 연주가 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이 ‘불굴의 도시’는 여전히 히틀러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를 엘리아스베르크’는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그 역시 다른 레닌그라드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1941년의 끔찍했던 겨울을 견뎌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지인들을 잃게 되었는데 그의 오케스트라도 연주를 중단했다. 이듬 해 봄이 되자 소련 당국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중의 하나가 연주 및 음악방송의 재개였는데 쇼스타코비치의 제7교향곡은 그 중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엘리아스베르크는 즉시 교향곡을 연주할 단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지만 곧 엄청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많은 단원들이 굶주림 및 질병으로 사망했거나 거의 아사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모은 단원들이 15명이었는데 이들이 얼마나 쇠약했는지 연습장 계단을 올라갈 힘도 없었다. 엘리아스베라크는 드럼을 쳤던 한 단원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시체공시소에 갔다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고 그를 즉시 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고 연주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오케스트라는 군에 입대한 사람들 중에서도 차출을 했고 무엇보다도 효과가 있었던 ‘추가적인 음식’을 보장하며 연주자들을 모집했다. 최종적으로 30명이 모이게 되었고 이들은 1942년 3월부터 리허설에 들어갔다. 문제는 이 사람들조차 한 시간 이상 되는 긴 곡을 집중하며 연주한다는 것이 체력적으로 엄청난 무리였고 심지어 연습 중 사망하는 사례도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주 6일 이상 피나는 연습을 강행했고 연주를 준비한다. 이것은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자 한 명의 레닌그라드 시민으로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치르는 전쟁이었다. 모두가 죽을 각오를 하고 연주에 임했다.


소련군도 8월 9일의 연주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되는데 우선 산발적으로 쏟아지는 독일군의 포격을 잠재워야 했다. 소련군 포병 사령관인 ‘레오니드 고보로프’ 장군은 사전에 은밀히 특임대를 파견해서 독일군의 포대 일부를 파괴했고 연주 시작 전에는 휘하의 포병화력을 독일군 포대 방향으로 일제히 집중시켰다. 독일군 포병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방해하지 못하기 위한 사전 예방 조치였던 것이다. 전방의 독일군들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포격에 이어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라이브 연주를 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어이없어 했고 곧이어 전율을 느끼게 된다. 훗날 여러 독일군들이 이때를 회상하며 “우리의 적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며 우리가 전쟁에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당히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이 순간은 마치 성경 속의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은 기적의 순간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은 그렇게 레닌그라드 전장터의 전설이 된다.   


최후의 승리와 해방

레닌그라드 교향곡이 연주될 즈음 독일군은 최고의 전략가였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투입하여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세바스토폴 요새의 정복자인 이 천하의 명장도 소련인들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독일군이 일부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점령을 거부하는 레닌그라드는 거대한 ‘불침 전함’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1943년이 되고 남쪽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북쪽의 레닌그라드 전선 자체에 큰 변화는 없었다. 소련군은 1월에 작전명 이스크라(불꽃)을 통해 독일군의 일부 포위망을 약화시켰지만 끝내 포위망 자체를 뚫을 수는 없었다. 이후 전장의 관심은 러시아 중부로 옮겨 갔는데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가 소련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전장에서 소련의 우세가 확실해 졌다. 소련군은 이후 독일군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며 베를린을 향한 머나먼 여정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이제 독일군은 더 이상 공격자가 아니었고 레닌그라드에서도 포위망만 구축했을 뿐이지 오히려 소련군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어에만 치중하기 시작한다.


다시 시간이 흘러 1944년이 되자 이제 레닌그라드도 오랜 굴레를 벗어 던질 시간이 다가오게 된다. 다른 전선에서 아군이 다 밀려 나는 상황에서 독일 북부집단군도 마냥 레닌그라드를 고수할 수 만은 없었다. 결국 만반의 준비를 갖춘 소련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1월 14일 2개의 소련 전선군이 서진을 개시했고 레닌그라드 자체의 부대들과 함께 독일군 방어선을 뚫기 위해 협공을 개시했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18군 사령관인 ‘게오르그 린데만’ 장군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부하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히틀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방으로 철수를 명령한다. 그리고 1944년 1월 27일 마침내 협공하는 소련군이 연결되며 레닌그라드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900여일의 시련을 겪으며 레닌그라드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전쟁 전 거주했던 300만의 시민들 중 거의 삼분의 일인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독일군의 포위기간 동안 사망하였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군사적 포위’에 의한 사망자로서는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는 극한의 상황 속에 너무나도 무서운 희생을 치렀지만 다시 불사조와 같이 살아남았다. 이것은 생존과 승리에 대한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불굴의 의지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훗날 ‘제3제국’을 무너뜨린 승리의 씨앗은 이미 1941년 가을에 레닌그라드에서 뿌려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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