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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08. 2023

극한의 고통을 용서로 승화시키다

에릭 로맥스 (1919~2012) 영국의 군인, 작가

에릭 로맥스와 나가세 다카시

영국의 명장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는 1957년에 만든 전쟁 영화의 걸작이다. 영화의 배경은 태국의 정글에 위치한 일본군 포로 수용소인데 일본군의 학대와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미국, 영국 등 연합군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다양한 갈등과 충돌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극 중 영국군의 수장인 ‘니콜슨 대령’은 비록 포로이지만 군기를 유지하고 군인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최초에 그는 영국군 장교들을 노동에 투입하려는 일본군 사이토 수용소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갖은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건설 막바지에는 다리의 건설이 대령 자신은 물론 영국군들의 명예가 걸린 것으로 인식하고 조기에 다리를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처음에는 그토록 반대하던 영국군 장교와 환자들에 대한 노동을 본인이 직접 지시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실물 다리의 세트와 기차까지 동원해서 폭파장면을 찍었던 영화는 세계적인 성공과 흥행을 거두지만 많은 생존 포로들이 있었던 영국과 호주 내 참전용사들의 반응은 상당히 냉담했다. 특히, 극 중 포로들이 태업을 하기 위해 강으로 다이빙하거나 일본군과의 협상 장면 등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사실 이곳에서 철도를 건설했던 연합군 포로들의 생활 환경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노예 수준이었다. 만연한 굶주림과 전염병 속에 조금만 작업 속도가 느리기만 해도 포로감시원의 ‘스피도’ (스피드의 일본식 발음)라는 소리와 함께 채찍과 몽둥이가 날라 왔다.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사람도 이곳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견디며 겨우 살아 남았던 영국인 포로였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이 한가지 있었다.


기차를 좋아했던 소년

‘에릭 서덜랜드 로맥스’는 1919년 5월에 스코틀랜들의 중심 도시인 에딘버러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관심을 끄는 대상이 하나 있었는데 로맥스는 유난히 기차를 좋아했다. 유년 시절 그는 기차를 기다리며 선로 옆이나 역 앞에서 몇 시간씩 시간을 보냈고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다가오면 즐거움에 마구 뛰어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게 되자 로맥스는 선로를 따라 몇 시간이고 주변 지역 여행하는 것을 즐기게 된다. 더불어 자신의 철로 여정을 일종의 지도로 만들어서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순수한 개인의 취미이자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맥스는 고교 졸업 후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우체국에 취업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편 분류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곧 우체국에 있던 전신 기계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는 우체국에서 일과를 마친 후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전신기술을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보를 다루는 기사가 되었다. 이때만해도 자신이 배운 전신기술이 훗날 본인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 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39년 유럽에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시점에서 로맥스는 연인과의 결혼도 미룬 체 입대하게 되는데 그의 직업상 전공을 살려 육군 통신병과에 배치된다. 1년 간의 훈련 및 수습 기간을 거친 그는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고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통신장교’로서 해외파견 근무에 지원했다. 1941년 3월에 영국을 떠난 로맥스는 근무지인 인도로 가는 길에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거치게 되었는데 이곳 에서도 기차에 대한 그의 관심을 멈출 수 없었고 기항 중에 현지의 기차 박물관 등을 몰래 방문했다고 한다. 이후 도착한 북부 인도의 근무지는 아직 유럽이나 중동과 같은 직접적인 전장터는 아니었고 그는 시간이 날 때면 기차를 타고 인근 지역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여유로운 생활도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는 일본제국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포함한 30여 명의 통신부대는 1941년 말에 당대 최강의 요새이자 대영제국의 요충지로 평가받던 싱가포르에 배치된다. 항구에서 그들을 맞았던 군악대는 당대의 히트곡인 ‘영국이여 영원하라’ (There’ll always be an England)를 연주했다. 그리고 그 영원의 종말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게 된다.


일본제국의 포로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나치에게 항복한 이후 일본은 극동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호시탐탐 노렸고 결국 1940년 9월에 무주공산인 프랑스 식민지에 진주하게 된다. 중립국인 미국과 바로 인근에 자국 식민지가 있던 영국, 네덜란드 등이 일본의 행동에 강하게 반대했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 대한 자산 동결과 석유 수출금지로 압박하며 일본군의 철수를 주장한다. 이후 양 측은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강성 군부의 강한 입김에 따라 사실상 군대의 철수가 불가능했던 일본은 비밀리에 기습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의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군은 동시에 홍콩과 말레이시아의 영국 식민지에도 공격을 가한다. 비록 서류 상이었지만 영국 및 연방군은 10만명이었고 일본군은 3만명 정도였으니 영국군으로서는 해볼 만한 승부였다. 더불어 싱가포르 일대의 방어를 위해 해군성에서는 ‘Z기동부대’를 구성하여 영국 최강의 전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즈를 급파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경무장에 자전거를 이용하여 정글을 신속하게 이동했다. 또한 장갑이 얇을지라도 영국군은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전차 150대를 투입하며 영국의 방어 진지를 철저히 유린한다. 더불어 ‘F2A 버팔로’와 같은 구식 전투기 중심이던 영국군은 이미 일본군에 제공권도 상실했다. 제공권의 상실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12월 10일에 영국의 자랑인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일본 공격기에 의해 침몰하게 되는 경악할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부터 영국군은 말레이 전역에서 일방적인 후퇴를 거듭했고 급기야 이듬해 2월초에는 싱가포르의 좁은 지역으로 몰리며 포위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42년 2월 8일에 일본군은 영국군의 숨통을 끊기 위한 최후의 공세를 시작하는데 영국군의 예상과는 다르게 서부의 ‘망그로브 습지대’로 기습 상륙한다. 2월 13일에는 일본군이 시내의 상수도 저수지를 점령했고 전투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일본군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영국의 ‘아서 퍼시벌’ 장군과 시내의 포드자동차 공장 건물에서 항복을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우유부단한 퍼시벌은 우물쭈물하며 상황을 모호하게 끌고 갔는데 즉각적인 항복을 바랬던 야마시타는 퍼시벌을 다그쳤고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이렇게 극동에 있던 ‘대영제국의 아름다운 보석’이 일본군 손아귀에 넘어갔는데 무려 10만명의 영국 및 연방군 군인들이 포로 신세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기록된 영국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였는데 ‘불굴의 정치가’인 처칠 수상조차 이때만큼은 겁먹은 표정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영국군 포로들은 무장해제되어 양쪽 길가에 정렬한 체 승자인 야마시타 장군의 사열을 받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이 포로들 중에는 통신대 장교로서 직접적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로맥스와 그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동료들은 송수신기를 파괴하라는 상관의 명령 속에서도 만일을 위해 일부 부품들을 숨기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전개될 비참한 운명도 모른 체 ‘창이 수용소’로 터벅터벅 행진했다.       


태국-버마 철도 건설에 투입되다

수용소에 갇힌 초기에 로맥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통신 주특기 탓인지 일종의 수리창고에 배치되었는데 이곳에서 일본군의 여러 기계 및 공구들을 고치고 관리하는 역할을 보조하였다. 이곳의 일본군들도 장비 수리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영국군 포로들에 대한 특별한 괴롭힘은 없었다. 로맥스 역시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며 나름의 포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버마 (미얀마)로 진격했는데 순식간에 영국군을 몰아내고 랑군을 점령하게 된다. 일본군의 다음 진군 목표는 누가 보아도 서쪽의 인도라는 것이 분명했는데 사실 이것은 그리 단순한 이동의 문제가 아니었다. 방어하는 영국군을 상대하기 이전에 버마와 인도 사이의 험준한 강과 산맥을 돌파해야 했고 버마 주둔군 자체에 원활한 보급이 필요했다. 보급은 주로 시암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동부에서 ‘말라카 해협’을 돌아 인도 방향의 ‘안다만해’로 이어지는 해상 보급로를 이용했다. 하지만 1942년 중반이 지나면서 연합군 잠수함의 위협이 증대했고 보다 안전한 내륙 수송로, 특히 대량 수송이 용이한 철도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일본군은 태국 중부의 ‘반퐁’에서 버마 남부의 ‘탄뷰자야트’을 연결하는 400km 이상의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2년 6월, 로맥스를 비롯한 영국군 일행은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비좁은 화물열차에 태워져서 5일을 견뎠고 1,900km 떨어진 태국의 ‘칸차나부리’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도중의 숨막힐 듯한 더위와 타는 듯한 갈증은 이후 벌어질 운명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영국군 포로들은 일본군에 붙잡힌 이후 제대로 된 식량 및 의약품을 제공받지 못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포로가 잡히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포로가 된 연합군 병사들을 벌레처럼 경멸했다. 일본 군부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연합군 병사들은 ‘영미귀축’으로서 전세계를 지배하며 불쌍한 피지배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욕스러운 인간들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항복하는 것에 대해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일본군의 전통적인 시각이 더해져 연합군 포로들은 더욱 더 고초를 겪었다.


로맥스를 비롯한 영국군 포로들은 태국-버마 철도 구간 중에서도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지형 때문에 악명높았던 일명 ‘헬파이어 패스’ (Hellfire pass) 주변에 투입되었다. 그나마 로맥스와 몇몇 동료들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엔지니어로서 수리 관련 업무를 계속해서 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장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그렇지 못했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장교는 포로가 되었을 때 노동에서 배제되도록 규정되었지만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니콜슨 대령이 끝까지 투쟁했던 이유였다.) 일본군은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포로들은 음식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변변한 장비도 없이 바위산을 깎는 중노동을 수행했는데 일본군의 이유 없는 구타, 정글의 온갖 해충과 콜레라, 이질 등의 질병이 겹치며 한 달에도 수백명이 죽어갔다. 최종적으로 6만 명 이상의 서구 연합군 포로들이 투입되었는데 이 중 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25만 명이 투입되었던 말레이, 중국 및 인도계 노동자들은 3분의 일인 9만명 이상이 사망한다. 주변 아시아 식민지의 멀쩡한 기존 철로들도 뜯겨져 왔다. 모든 것이 일본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소모폼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이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의 실체는 태국-버마 철도 건설을 통해 여지없이 그 민 낮이 드러났다.


한때 로맥스가 미친듯이 열광했던 철도가 이제 죽음의 장소로서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로맥스와 그의 동료들은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악전고투하고 있었는데 서로 간의 동료애와 유머를 통해 생존의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로맥스는 철도 매니아로서 철도노선에 대한 간이 지도를 제작하게 되고 이를 수용소 막사 파이프 속에 숨겨 놓는다. 또한 그와 동료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통신 주특기를 발휘했는데 바로 몰래 숨겨 두었던 부품들을 모아 라디오를 제작하려 한 것이다. 라디오를 통해 전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포로들의 바람이었지만 이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일본군 포로수용소 내 라디오 소지는 즉결처형으로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극심한 위험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품들을 하나하나 모아 결국 1943년 초에 라디오를 완성하게 된다. 로맥스는 일본군 트럭 뒤에 숨어서 연합군의 뉴스를 몰래 듣게 되는데 소련군이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몰아냈고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했다는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그들은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은밀하게 해당 소식을 전파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포로들의 사기가 올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용감한 행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43년 8월 수용소의 일본군은 포로들을 집합시키고 이들의 물품을 철저하게 검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침상에 숨겨져 있던 라디오 수신기와 철도 지도가 발각된다. 소지자로 지목된 로맥스를 포함한 5명의 포로들이 끌려 나온 가운데 일본군은 자백을 강요한다. 이들은 하루 종일 햇볕에 서 있은 후에 초 죽음이 될 정도로 몽둥이 구타를 당하게 되는데 (이중 두 명은 구타 중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로맥스는 자신이 라디오의 소지자이자 이를 제작한 사람이라고 밝히게 된다. 이후 이어지는 무차별 폭행에 로맥스는 정신을 잃게 되고 ‘겜페이타이’ (일본군 헌병대)의 오토바이에 손이 묶인 체 비참하게 이들의 취조 장소로 끌려간다. 당시 그를 돌보았던 네덜란드인 의사에 따르면 로맥스의 전신에 수백 개의 맞은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헌병대의 취조 장소는 낮은 회색 건물 안에 있었는데 로맥스는 어두운 조명속에 극도의 불안과 초조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불안과 초조한 느낌조차도 끝없는 헌병대의 구타 속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그저 모든 것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만 들게 된다. 이후 이어지는 물고문은 그 어떤 생각조차도 지워 버렸는데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은 반복적으로 그의 숨과 의식을 막아 버렸다. 그 와중에 일본인 통역은 그가 어떤 스파이 짓을 했고 수용소 안 밖의 조력자가 누구인지 밝히라고 죽일듯이 달려들었다. 사실 그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만 로맥스의 귀에 들리는 ‘딱딱한 일본 억양의 영어’는 그의 귓가에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가혹한 취조가 끝난 후 로맥스는 무릎을 꿇고 들어갈 만한 마치 짐승의 우리와 같은 곳에 갇히게 되는데 이미 여려 군데의 뼈가 부러져 있었고 누운 체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온 몸에 자신의 분비물이 뒤섞인 체 거의 정신을 잃었는데 인간으로서의 존엄 같은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극악한 고문이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로맥스는 끝까지 스파이 혐의를 부인했고 태국의 방콕에서 벌어진 군사재판에 넘겨지게 되었는데 5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그는 다시 싱가포르의 수용소에 죄수로서 수감되는데 그가 겪었던 이전의 시설이나 환경과 비교한다면 이 곳은 천국이었다. 사실 여기도 지옥이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싱가포르의 ‘오우트람 로드 감옥’와 창이 수용소에서 다시 1년 이상의 시간을 버티던 로맥스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종전을 맞게 된다. 그는 마침내 해방되었다.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

조국에 돌아온 로맥스가 맞이한 것은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우선 그의 어머니가 전쟁 중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로맥스가 좋아하지 않는 여성과 재혼을 했다. 고향에서 조용히 안착하고 싶었던 그는 1945년 11월에 전쟁 전에 약혼했던 아그네스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 영웅으로서 귀환해 남들에게는 그저 행복할 것만 같던 그의 생활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신혼 첫날 밤에 로맥스의 등에 있는 수많은 상처를 본 신부는 기절할 것 같았지만 함께 약을 바르는 것으로서 그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로맥스는 다시 사회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그가 경험했던 과거의 수많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들은 이것을 어렵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로맥스는 다시 한번 그가 좋아했던 것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가능성은 바로 철도였다. 그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골드 코스트’ (현재의 가나)에 식민지 공무원으로서 건너가게 되었고 이 곳에서 1955년까지 철도 부설하는 일에 종사한다. 이후 영국에 돌아온 로맥스는 경영학 등 학업을 이어갔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영국 중산층으로서 외견 상으로는 평범했을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전쟁 시의 상처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그의 가족에게도 미쳤고 이들과의 대화와 관계를 어렵게 했다. 로맥스의 이러한 괴로움은 지속적으로 그의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했고 결국 그는 부인 아그네스와 이혼하게 되었다. 이후 로맥스는 우연히 캐나다 출신의 간호사인 ‘패티 월래스’를 열차에서 만나게 되는데 둘은 첫 눈에 사랑에 빠졌고 1983년에 결혼하게 된다. 로맥스는 재혼한 17세 연하의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그에게 내재된 ‘지독한 트라우마’를 감출 수 없었다. 남편의 고통과 극단적인 완고함을 무력하게 지켜보던 패티는 그의 과거에 대해 두루 수소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로맥스가 가지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중심에 있던 유령 같은 인물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맥스는 동료 전우가 건내 준 신문을 통해 한가지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 신문 기사는 한 일본인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과거 태국-버마 철도 건설에 통역병으로 참여했다. 그 일본인은 이 곳에서 자신 및 동료 일본군의 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연합군 포로들의 시신 수습을 도와주고 있으며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불교 사원도 건설한다고 했다. 로맥스는 신문에 있는 일본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온 몸이 굳어 버렸는데 그 남자야 말로 로맥스가 고문을 당할 때 통역을 전담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분노로 온 몸이 떨렸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분노를 삭이면서 자신의 방에서 아무 말도 없이 침묵할 뿐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내 패티는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고 마침내 남편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위대한 용서

‘나가세 다카시’는 1918년에 혼슈에 있는 오카야마현의 쿠라시키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쿄로 옮기게 되는데 ‘미국 감리교 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일본인 치고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영어 회화가 가능했던 나가세는 통역병으로 차출되었고 로맥스가 수용되었던 태국-버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헌병대 소속 통역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헌병대 복무를 통해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의 심문과 고문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많은 수감자들과 고문 희생자들을 보았지만 그에게 유독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영국군 소위로서 라디오 수신기를 소지하여 스파이 혐의를 받던 자였는데 가장 가혹하게 구타 및 고문을 당하였던 것인데 그 기억은 가해자인 그에게도 악몽으로 다가왔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군에 포로가 된 나가세는 자신의 영어 능력을 적극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였고 끝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불교에 귀의하는 동시에 영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생활을 이어 나갔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막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이러한 후회는 반성으로 이어졌고 나가세는 수십 차례 태국의 철도 건설현장에 가서 연합군 포로들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며 인근에 불교 사원을 건설을 후원했다. 더불어 1969년에는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며 자신 및 동료 일본군의 행동에 대해 공개하며 참회한다.


나가세는 어느 날 한 통의 영문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발신인은 영국에 거주하는 한 여성이었고 그녀는 일본군의 포로였던 남편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편지에는 한 영국인의 사진이 동봉되었는데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사진 속의 남자가 바로 나가세에게 고문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편지의 발신인은 바로 로맥스의 아내 패티였는데 그녀는 나가세에게 로맥스와 만날 것을 제안했다. 나가세는 패티의 편지에 마치 뒷머리를 가격당한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즉각적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그녀에게 ‘감사의 회신’을 보냈다. 사실 그의 내면속에서 유령같이 배회하던 로맥스야 말로 그가 과거 수십년 동안 찾고자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로맥스와 나가세는 둘의 악연이 시작된 태국의 철교에서 50년 이상이 지난 1993년에 다시 재회하게 된다. 처음에 둘은 매우 어색하게 악수했는데 로맥스와의 만남을 통해 나가세는 “이제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나지막이 얘기했다. 나가세의 진심 어린 마음이 전해졌던지 결국 로맥스는 그를 용서하게 된다. 이듬 해 도쿄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함께 여행을 하며 친구가 되었고 이 우정은 이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에릭 로맥스는 2012년 10월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용서받은 나가세’가 죽은 지 일년 후의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영국군 전쟁포로들 역시 죽어갔고 상당수는 전쟁 때의 트라우마에 사로 잡힌 체 말년까지 고통을 받았다. 로맥스 역시 전쟁포로로서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는 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 해방이 자신의 ‘위대한 용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로맥스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 구원은 자신은 물론 가장 증오했던 적에게도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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