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호 May 20. 2023

죽을 때까지 밝힐 수 없었던 이름

마르타 힐러스 (1911~2001) 독일의 작가, 저널리스트

마르타 힐러스 (1911~2001)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14년 후인 1959년에 독일에서는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사회적인 논란이 일게 된다. 독일어권 스위스 지역의 한 출판사에서 나온 그 책은 이상하게도 저자 이름이 없었는데 한 ‘무명 독일 여인’의 전쟁 기간 동안 회고록을 담은 내용이었다. 전쟁 기간이라 함은 2차세계대전의 종전 전후의 시기였고 회고록의 주 장소는 그녀가 거주했던 베를린이었다. 저자인 무명의 여인은 이 책을 통해 베를린 전투 및 종전 당시 승자인 소련군이 독일 여성들에게 자행했던 수많은 성폭력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독일 사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비평가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주된 비난의 내용은 이 책이 ‘독일 여성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저자가 소련군의 만행을 강조하여 반공 분위기에 편승하려 한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평 때문인지 독일 내 책의 판매는 매우 저조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고 만다. 저자인 ‘무명의 여성’은 5년 전에 이 책의 영어판이 미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과 비교하여 독일에서의 상반된 반응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해당 주제는 많은 독일인들이 잘 알고 있거나 실제로 경험했던 얘기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14년이 지났지만 독일인들은 아직 이러한 사실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주제에 대해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평생에 다시는 이 책을 출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그 결심을 지켰다. 이 책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저자의 사후인 2003년의 일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도시

인류 역사상 수많은 도시들이 흥망성쇄를 거듭 했지만 1940년대의 독일 베를린처럼 양극단을 경험한 곳도 드물 것이다. 1940년 6월의 베를린은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승리한 자국군의 승전 퍼레이드로 온 도시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시의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 (Unter Den Linden)’에는 환희에 넘친 군중들로 가득했고 인생의 정점을 맞은 히틀러가 보무도 당당한 그의 군대를 사열했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인 1945년 4월의 베를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과 활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시내는 포연이 가득한 회색 빛의 페허로 바뀌어 있었는데 사방을 둘러싼 ‘붉은 군대’의 포위망에 갇힌 체 도시는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베를린에는 약 150만명의 시민 및 피난민들이 남아 있었는데 많은 경우에 징병 연령을 벗어난 노약자, 청소년 및 여성들이었다. 또한 최후의 저항을 펼치는 군인들 외에 국민돌격대(Volksstrum)란 이름으로 고령자와 10대 청소년들까지 소집되어 의미 없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시내의 전투를 피해 주로 환기가 잘 안되는 지하 방공호에 머물러 있었는데 다가오는 소련군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베를린 시민들이 소련군을 극도로 두려워한 이유는 간단했다. 소련은 독일과의 지난 4년 간의 전쟁에서 무려 2500만 명 이상의 자국민들이 죽거나 학살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경험했던 것이다. 이제 ‘나치의 심장부’에 진입하려는 소련군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선전을 통해 대놓고 ‘복수’라는 자신들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미 1944년 10월에 최초로 독일 영토인 동프로이센에 진입했는데 이때 이들이 말하는 ‘복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소련군은 모든 눈에 띄는 여성들을 연령을 가리지 않고 성폭행했으며 반항하면 즉시 사살했다. 결사적으로 자신들의 어머니나 딸들을 지키려는 독일 남성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련군이 자신들의 여인들을 광장에서 대규모로 능욕하는 것을 강제로 지켜보아야 했다. 마치 성경의 계시록에 나오는 지옥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은 앞서 소련군이 점령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전투 중 중립국인 스웨덴 대사관 직원까지 성폭행 당했다.)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도 펼쳐졌고 이제 그 지옥이 베를린에서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베를린의 변호사들은 난데없이 유언장 집행 업무가 폭증했고 시민들은 자살용 독약을 구입하기 위해 엄청난 소동이 일기 시작한다. 한때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던 히틀러가 ‘천년을 갈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했던 제국이 종말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승자의 모습

1945년 4월 16일 약 250만 명의 소련군이 오데르 강을 건너 베를린을 향한 진격을 개시했다. 이를 방어하는 독일 수비대는 70만 명 정도였는데 병력 수는 물론 장비나 사기 면에서 쇄도하는 소련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4월 24일에 소련군은 베를린의 동북쪽과 서남쪽을 돌아 시를 둘러싼 포위망을 완성했고 무차별적인 포탄 세례가 이어졌다. 이때부터 시내의 골목과 건물 하나하나를 빼앗는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된다. 4월 29일이 되자 완강하던 히틀러조차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고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다음 날인 4월 30일에 전날 결혼한 신부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하며 그 생을 마감한다. 5월 1일에는 제국의사당(라이히스탁)이 점령되며 소련의 ‘적기’가 내걸렸고 베를린 수비대장인 ‘헬무트 바이틀링’ 장군은 독일군에게 모든 저항을 중지하라 명령하고 자신도 소련군에게 항복한다. 살아남은 소련군은 허공으로 마구 총을 쏘아 대며 베를린 정복을 기뻐했고 도시의 공식적인 점령에 들어갔다.    


많은 베를린 시민들은 방공호로 플래시 라이트를 비추며 들어온 소련군을 보며 점령군들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상기한 ‘무명의 여인’이었다. (이하 무명이란 뜻의 영어단어 Anonym을 따서 ‘A’라고 표현하겠다.) A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두운 방공호 안에 있었는데 그 안에는 평범한 소시민들과 동부에서 건너온 피난민들, 당 간부가족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온갖 계층의 베를린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긴장을 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그 순간 방공호의 문이 열리며 알 수 없는 언어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독일어가 아닌 러시아어였다! 사람들은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을 집중하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몇 명의 누런 카키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들어와서 사람들이 있음을 감지한 후 플래시로 신원을 확인하였다. 플래시 불 빛에 노출된 사람들은 너나 할 것없이 눈을 가리고 손을 위로 올렸는데 소련군은 젊은 여자들 몇 명을 거칠게 끌고 나갔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해 보였고 끌려가던 여자들의 비명이 들리자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게 된다. 30대 초반이었던 A는 뒤쪽에 있어서 잘 눈에 띄지 않았는지 끌려가지 않았다. 이후 모두들 방공호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페허가 된 거리에는 건물 창문과 베란다마다 저항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흰색 천이 걸려 있었다. 또한 거리 여기저기에서 소련군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이들은 모여서 담배를 피우거나 몇 명은 사람들로부터 시계나 보석 같은 귀중품을 빼앗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나 두렵고도 혼란스러웠던 A는 이후 다른 건물의 방공호로 숨게 되는데 하필 이곳에서 일단의 소련군에게 발각이 되었고 붙잡히게 된다. 과거 소련에 체류한 경험이 있던 A는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강하게 거부 의사를 피력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고 A는 여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어했던 끔찍한 상황에 마주치게 된다. 승자는 결코 천사가 아니었다.


끔찍한 기억

소련군들이 떠난 후 A는 방공호에 홀로 남겨졌다. 한동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멍하니 있었고 하염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빨리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건물 밖으로 나와보니 사방에서 여자들이 끌려가고 있었다. 일부는 소리를 질렀지만 소련군은 들은 체도 안 했고 대부분의 여자들이 저항도 포기한 체 축 늘어진 모습으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주변 건물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대문을 잠거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것은 거처가 없는 동부에서 온 피난민들과 집이 부서진 사람들이었다.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이 있었던 가정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딸들을 숨겼다. 소련군이 예외로 두었던 대상은 성홍열에 걸렸다고 판단된 여성들이었는데 이를 알아차린 독일 여인들은 립스틱을 이용해서 자신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소련군들은 여자들을 끌어내려 하며 프라우 콤(Frau Komm: 아가씨 이리와)이라는 두 마디의 어설픈 독일어로 소리질렀다. 승리한 소련군에게 ‘파시스트의 소굴’인 베를린은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루고 점령한 곳이었고 남아있는 여자들은 자신들이 즐길 권리가 있는 단순한 전리품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고 (스탈린은 실제로 전쟁터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군인들이 그럴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여 베오그라드에서 소련군의 강간에 항의하는 유고 공산당 대표를 경악케 했다.) 많은 소련군 장교들도 이들의 행동을 복수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방관했다.


A는 거리를 전전하다 과부가 된 옛 지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아직 부서지지 않은 그녀의 아파트 다락방에 임시 거처를 구하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이미 여러 명의 여자들이 와 있었다. 낮에는 소련군이 주는 배급 빵을 받으러 거리로 나가야 했고 극도로 조심하며 아파트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진짜 무서운 공포는 밤에 찾아왔는데 술 취한 소련군들이 때를 지어 아파트를 집집마다 수색했고 맘에 드는 여자들을 차지했다. 5월 8일 저녁에 독일이 항복하자 소련군은 술과 춤을 통해 자신들의 기쁨을 마음껏 발산했는데 결국 그 마지막은 힘없는 독일 여자들이 대상이 되었다. A도 이 과정에서 여러 명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는데 밖에서 지인을 만나면 ‘어떻게 지내?’(Wie geht’s? 비 게트?)라고 묻는 것이 아닌 ‘얼마나 자주 당했니?’ (Wie oft? 비 오프트?)라고 물어보는 기가 막힌 일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A는 더 이상 이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인근의 소련군 부대로 찾아가 부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장교 계급장을 단 사내에게 일련의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더 이상의 병사들의 비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속을 요구한다. 하지만 A의 절규에 대해 소련군 장교는 냉소적으로 웃으면서 자기 병사들이 매우 건강하다는 조롱 섞인 답변을 던진다. 베를린의 독일 여성들에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슬라브계 러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나 몽골계 소련인들을 열등 인간(Untermensch)이라고 주입 받았던 자부심 높던 독일 여성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죽음보다 더 한 수치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제로 성폭행의 후유증을 통해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자살했는데 대부분 집단 성폭행의 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세상을 등지게 된다. 당시 얼마나 많은 독일 여인들이 자살했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그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전후 베를린시의 조사에 따르면 성폭행의 피해로 치료를 받아야 했던 시민들의 숫자가 10만명이었다. 영국 역사가 엔터니 비버에 따르면 독일 전체로는 200만 명이 전쟁 전후에 집단 성폭행의 피해자였다고 한다. 전후 1946년에서 1947년 사이 독일 신생아의 3~4% 정도가 소련군의 성폭행에 의한 사생아였다.

     

어느 날 A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한 중년의 병사에게 성폭행 당했는데 이 사람은 A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이를 통해 그녀의 인간적인 존엄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 A는 구토를 했고 무너져 버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체 그저 방 구석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러던 중 A의 마음 한 구석으로부터 조금씩 퍼져 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작지만 강한 울림이었다. 그렇게 A는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 남기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생존을 위하여

정신을 차린 A는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소련군에게 강제로 당 할 바에는 여러 명이 아닌 한 명만 접촉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었고 그 사람이 지위가 높다면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생각이 정리되자 A는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갔고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그 한 명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리에서 아나톨이라 불리는 한 중위를 만나게 된다. 그는 큰 키와 덩치의 소유자였는데 거칠고 예의 없던 다른 병사들과 달리 대체로 친절했다. A는 그와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고 아나톨은 밤마다 그녀를 찾아왔다. 소련군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는지 이후 A는 다른 사람에 의해 공격당하지 않았다. 아나톨과 그 일행은 A의 아파트에서 식사와 나름의 파티를 했고 아파트의 여인들과 마치 친구인 양 다양한 대화를 즐겼다. 어떤 소련군은 전쟁 중 자신의 가족이 독일군에게 끌려가거나 학살당한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어떤 이는 음악과 정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아주 잠시지만 소련군들과 독일 여인들 간에 인간적인 교감이 흘렀고 이들이 가지고 오는 음식 덕분에 배고픔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게 된다. 한편 A를 비롯한 모든 여인들의 한 구석에는 이러한 소련군의 호의가 과연 ‘매춘의 대가’인지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엄청난 사치였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고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소련군 애인을 만든 것이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 지라도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그것 만이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한 소련군 장교가 찾아오게 된다. 수줍어 보이는 얼굴에 발을 절고 있던 금발의 장교는 A를 범하게 되는데 이후 A에게 황당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상관인 다른 장교와 만나 달라는 것이었다. 평시라면 상대방의 뺨을 후려갈길 만한 어처구니없는 얘기였지만 A는 자신의 선택지가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그 제안을 수락한다. 그 상관은 소령이었는데 이전에 마주쳤던 어떤 소련군들보다 A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 소령은 진심으로 A를 좋아했고 아파트의 모든 독일인들 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유부남이었는데 자신이 소련에서 살아온 얘기를 해줬고 독일 여인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고 사과했다. 어느 순간 A 역시 소령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소령 역시 아나톨과 마찬가지로 많은 음식과 생필품을 갖다 주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병사들에게 A의 아파트를 지키도록 명령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소령과의 관계가 당분간 계속되었고 적어도 배고픔과 병사들에 의한 마구잡이식의 공격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흘러갔는데 시내의 잔존 독일 병력도 완전히 소탕되자 소령과 그의 부대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소령은 떠났지만 A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와 지내면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지옥 같은 시간들을 넘길 수 있었다. 사실 당시의 베를린에서 A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들 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고 이것은 독일인들 서로가 피하고 싶어하는 주제였다. 중요한 것은 생존했다는 것이었다. 전직 언론인 출신이던 A는 이 모든 것을 담담히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소련군들이 거주지에서 물러나고 남아있는 시민들은 페허를 치워야 했다. 대부분이 여성들인 이들 ‘페허청소부들’(Trümmerfrauen)은 머리 위에 스카프를 질끈 메고 거리의 와륵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노동자 출신부터 프로이센 귀족 가문의 여성들까지 온갖 계층의 독일 여인들이 일을 같이 했는데 비록 힘은 들었지만 이들은 서로 격려하고 농담도 해가며 돌 무더기를 치웠다. 온갖 험한 일들을 당했지만 이들 사이에는 살아 남았다는 강한 공감대가 흐르고 있었고 A도 이러한 감정을 공유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마음 속엔 피눈물이 흘렀을 지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같이 웃으며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베를린에는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군 군대들도 들어오며 상황이 호전되었고 부서졌던 식당과 까페들도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직 전쟁 전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베를린이란 도시는 그렇게 다시 소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A의 약혼자 게르트가 전선에서 돌아오게 되었고 이들은 몇 년 만에 다시 해후하게 된다.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는데 전선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돌아온 약혼자도 많이 변해 있었지만 A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러한 A의 모습에 게르트는 ‘막연하지만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되는데 어느 날 A는 자신의 일기를 그에게 말없이 건내 주게 된다. 그 안에는 A가 지난 몇 달 동안 여자로서 겪었던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그날 밤이 되자 게르트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게 된다. 다음날 A가 일어났을 때 그는 더 이상 옆에 있지 않았다. A가 겪은 일은 게르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는 그렇게 떠나 버렸다. A는 이러한 상황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 자위했고 홀가분하게 느꼈다. 그녀는 이후 언론계에서 다시 일자리를 잡았고 삶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전후 독일의 수많은 ‘A와 게르트’들이 살아 남았지만 엄청난 슬픔을 간직한 체 ‘영년’(Stunde Null: 전후 독일의 모든 것이 제로상태가 된 시점을 일컫는 말)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전후 ‘라인강의 기적’의 주역들이다.


끝내 밝힐 수 없었던 이름

전술한 바와 같이 1954년 A는 자신의 기록을 책으로 내게 되는데 미국과 영국에서는 반응이 좋았지만 1959년에 나온 독일어판에는 독일 사람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A의 책은 해적판으로 카피된 일부가 독일에서 유통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고 그렇게 잊혀져 갔다. A는 2011년에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듯했다.


2003년 독일에서 한 권의 책이 재발매 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베를린의 한 여인’(Eine Frau in Berlin)이었는데 바로 A의 과거 책이 재출판 된 것이었다. 이 책은 당시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전후 자신들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끔찍한 생존기를 읽으면서 독일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은 너무나 무서웠던 당시의 상황을 지극히 담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했고 그래서 더욱 더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책은 19주 동안 독일에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왔고 대문호 ‘귄터 그라스’의 작품들과 함께 독일인들을 전쟁의 피해자로 묘사한 작품으로 분류되며 대중에게 회자되었다. 이후 독일에서는 이 책의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추적에 의해 저자의 신원이 밝혀지게 된다. 저자는 바로 1945년 당시 34세였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출신의 ‘마르타 힐러스’ (Marta Hillers)란 여성이었다. 그녀는 서부 독일에 위치한 크레펠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유학을 하기도 했던 당대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전쟁 전부터 해외에 대한 여러 글들과 사진을 통해 언론인으로 활동했는데 전쟁 말기 베를린에 갇히게 되며 여자로서 감당치 못 할 경험을 하게 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힐러스는 결혼을 했고 스위스로 건너가서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결코 독일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2003년 책의 재출간 때 그녀는 이미 사망을 한 상태였는데 결국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에필로그

2001년 7월 독일 사회는 한 여인의 죽음으로 술렁이게 되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는데 사망자는 독일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수상의 부인 한네로어 콜 여사였다. 그녀는 척추에 문제가 있었고 계속되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고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척추를 다친 이유였는데 2차대전 시 베를린에 거주했던 그녀는 소련군이 도시를 점령하자 그녀의 모친과 함께 성폭행을 당했고 창문 밖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콜 여사는 당시의 사건을 통해 정신적 트라우마와 척추의 고통을 안고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러시아의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44년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을 공략할 때 포병 장교로 참전했다. 당시 소련군은 거의 광란에 가까운 행동으로 독일 주민들에게 복수했는데 솔제니친이 소련 체제에 환멸을 느낀 시발점이 바로 이러한 복수를 목격한 이후였다. 그는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프러시아(프로이센)의 밤이라는 장편시에 담았다. 시의 구절 중에는 “모두 소녀에서 여인이 되고 여인은 다시 시체로 변한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당시 흉폭했던 상황을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다. 솔제니친은 몇 년 뒤 반체제 사범으로 수용소에 갇힐 때 시의 내용을 비누에 몰래 새기고 외워서 작품을 써 나갔다. 그 역시 이때의 복수극을 목격하며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군의 이러한 복수는 독일인들의 극심한 공포를 야기했고 많은 사람들이 서부 독일로 피난을 가도록 만들었다. 전후 동독의 인구가 서독의 4분의 1 수준이 된 것도 이러한 상황에 그 주된 원인이 있다.


비록 A는 죽었지만 2차대전 이후에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도 여전히 제2, 제3의 A가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일이 반복되어야 하는가? 수많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우리가 아는 것 만큼 선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극이자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이전 01화 극한의 고통을 용서로 승화시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