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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Jun 19. 2023

강요된 패장에서 최후의 승리자로

조너선 웨인라이트 (1883~1953), 미국의 군인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 맥아더와 함께한 웨인라이트 (우측)

1945년 9월 2일의 도쿄 만의 하늘은 다소 우중충했지만 바다는 태평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평온했다. 이 날 도쿄 만에는 여러 척의 연합군 군함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그 중 함수에 63번이라는 번호가 보이는 한 척의 큰 배가 눈에 띄었다. 이 배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함의 포탑에 앉거나 갑판에 부동자세로 서서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의 함수 쪽 갑판에는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고 베이지색 또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여러 군인들이 이를 둘러 쌓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의 마지막 장을 펼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배의 이름은 ‘미조리호’(USS Missouri)로서 미국의 전함 중 가장 거대한 ‘아이오와급’ 전함이며 이제 각 국의 대표들이 모여 일본 제국의 항복조인식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오전 8시에 미 해군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시작으로 귀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9시부터 약 23분간 실시된 행사를 진행하였다. 일본 측에서는 1932년 상해의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에 의해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게 된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가 대표로 나왔다. 맥아더는 행사의 주관자로서 인류 평화 및 미래에 대한 연설을 했고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테이블에서 서명하는 동안 두 명의 장군들이 부동자세로 맥아더의 뒤에 서 있었는데 그들의 제복으로 보아 한 명은 영국군, 또 한 명은 미군 소속이었다. 미군 소속 장군은 상당히 말라서 마치 해골처럼 보였는데 서명을 끝낸 맥아더는 여러 펜들 중 두개를 미군 장군과 영국군 장군에게 하나씩 건내 주었다. 그렇게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제2차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 피날레는 두 명의 장군들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들은 얼마전까지 일본군의 포로였다. 영국군 장군의 이름은 ‘아서 퍼시벌’이었고 앙상한 미군 장군의 이름은 ‘조너선 웨인라이트’였다.   


십자가를 짊어지다

1942년 1월 초 필리핀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부정적인 전황으로 인해 대단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일본군은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 직후에 필리핀의 카비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 기지를 공습했다. 이 공습에서 필리핀 內 미군 항공 전력의 절반 가량인 99대가 지상에서 피해를 입게 된다. 다음 날 일본군은 루손섬 북부 몇 군데에 상륙했는데 이것은 미군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일본군 주력은 12월 21일에 루손 섬 서쪽인 링가옌만에 상륙했고 다음 날에는 동남쪽의 라몬 만에 교두보를 마련한다. 주력 부대가 섬의 양쪽에서 협공하여 수도인 마닐라를 점령하고 미군을 포위, 격멸 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신속한 공격에 미군은 필리핀군과 맥아더 지휘하에 ‘미 극동지상군’을 구성해서 함께 적극적인 저항을 했지만 일본군에 밀리며 서서히 후퇴하고 있었다. 급박한 전황 속에 1월 2일에는 무방비도시로 선포된 마닐라가 일본군에 무혈 점령된다. 초기 루손섬 북쪽의 해안을 위주로 방어 계획을 세웠던 맥아더는 일본군이 섬 양쪽에서 협공을 하자 서남쪽의 ‘바탄 반도’로 신속히 병력을 후퇴시킨다. 이곳의 빽빽한 정글과 팜팡가강 등 자연지형은 진격하는 일본군에게 천연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배후에는 해안지역이 있어 이곳에서 몇 개월 버티고 있으면 미국 본토에서 대규모 증원군이 올 것이라는 것이 맥아더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탄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북부 해안지역에 비축해 놓았던 보급품의 상당수를 유기해야 했다. 이것은 바탄에서 장기간 버틸 탄약이나 식량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얼마 후에 치명적인 결과로 판명이 되었다.


일본군은 바탄의 미군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집요한 포격과 공습을 가했는데 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떠한 해결책도 보이지 않게 된다. 미국 본토에서 부대를 구성해 파병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릴 듯이 보였다. 지휘관인 맥아더는 바탄 인근 코레히도르섬 요새의 ‘말린타 터널’에 칩거하며 지냈는데 부하들은 그를 ‘방구석 더글라스’(Doug-out Doug)라 부르며 조롱한다. 미국 육군 사상 최연소 진급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던 전설적인 장군으로서 일생 일대의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말린타 터널에서 버티다가 일본군이 들어오면 자살할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위상과 능력을 알고 있던 마셜 육군참모총장이나 루즈벨트 대통령 등이 개입했고 맥아더에게 즉각적인 호주로의 철수 명령을 내린다. 1942년 3월 12일의 어두운 밤에 미 해군 소속 ‘PT어뢰정’이 천천히 시동을 걸며 코레히도르섬을 빠져나갔다. 그 배에는 맥아더와 그의 가족 및 참모들이 탐승했는데 호주에서 더 큰 임무 수행을 위해 필리핀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말 한마디를 남기는데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이라는 짧은 한 문장이었다. 맥아더는 코레히도를 떠나며 한 명의 미군 장성에게 지휘권을 넘겼고 그와 짧은 포옹을 한 후 배에 오른다. 큰 키에 다소 마른 그 장군은 맥아더에게 자신은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는데 이렇게 59세의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은 모든 십자가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강요된 패배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은 1883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대대로 군인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 모두 군인이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며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 장군과 함께 복무하기도 했다. 훗날 웨인라이트와 맥아더의 관계를 생각하면 2대에 걸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웨인라이트는 1906년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는데 이 또한 맥아더와 마찬가지였다. 이후 기병 병과를 선택하여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 복무하기도 했고 1차대전에는 사단 작전 참모로서 참전하였다. 사관학교 출신의 최우수 인재로서 그는 착실히 승진했고 일본군의 위협이 증대하던 1940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필리핀에 부임한다. ‘필리핀의 제왕’이었던 맥아더는 재능 있는 장군인 웨인라이트를 대단히 신뢰하였는데 그에게 미군 방어 부대의 핵심인 ‘북부 루손군’을 맡기게 된다. 하지만 뛰어난 지휘관인 웨인라이트조차 압도적인 해공군을 바탕으로 쇄도하는 일본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준 후 바탄으로 철수했고 이곳에서 떠나는 맥아더를 대신하여 지휘권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 있었다.


바탄 수비대는 12만 명으로 7만 5천명의 일본군 대비 숫자는 많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빈약한 보급이었다. 아무리 용감한 군대라도 식량과 탄약 없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월 이후에는 배급량이 평상시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말라리아나 이질 같은 질병 역시 만연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혼란 상황을 놓치지 않고 계속 포탄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맥아더가 야밤에 몰래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미군 병사들은 분노했고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특유의 털털함으로 장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웨인라이트는 ‘초인적인 설득’을 통해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었다.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불안해했는데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로, 버마(미얀마)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를 순식간에 점령한 무적의 일본군이었지만 필리핀만큼은 쉽게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군 총사령관인 ‘홈마 마사하루’ 장군은 초조함 속에 진군을 독려했고 4월 3일에 증강된 병력과 300문 이상의 대구경 포를 동원해 최후의 대공세를 실시한다. 일본군의 포격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이나 지속되었다. 미군은 핵심 방어선인 ‘오리온-바각’(Orion-Bagac)라인에서 몰려오는 일본군을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결국 방어선 측면이 뚫리게 되면서 모든 저항이 궤멸되었다. 현장의 미군 총 지휘관인 ‘에드워드 킹’ 소장은 코레히도르섬에 있던 상관 웨인라이트에게 상황의 불가피성을 설명했고 일본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총 7만 5천 명 이상의 미군과 필리핀군이 항복하며 포로가 되었는데 이것은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기진맥진했던 포로들은 식수도 식량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 체 북쪽의 오도넬 포로수용소까지 120킬로미터를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낙오하는 포로들은 가차없이 총검으로 살해했는데 만 명 이상의 포로들이 행군 도중 학살당하거나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는 이를 ‘바탄 죽음의 행진’(Baatan Death March)이라 불렀고 후에 관련자들은 도쿄 전범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바탄의 항복 소식을 들은 웨인라이트는 사실상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미군 최고 지휘관이었다. 바탄에서 바다로 3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코레히도르 요새 안에서 버틸 수 있는데 까지 조금 더 버텨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일본군 입장에서 마닐라만의 입구에 위치한 코레히도르 요새는 당장 점령이 필요한 눈엣가시였다. 이곳에는 아직 육해군 및 해병대로 구성된 만 3천명의 미군이 있었고 다수의 대구경 포대는 일본군의 마닐라항 사용을 방해하는 위협적인 요소였다. 일본군은 바탄이 항복하던 4월 9일부터 코레히도르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후 바탄으로부터의 포격과 하늘에서의 폭격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되었는데 일본군은 마침내 5월 5일에 새벽에 상륙부대를 보내고 공격을 개시한다. 미군은 가용한 모든 화포를 동원해 격렬히 저항했고 급기야 일부 해변에선 양 측간에 육박전까지 벌어질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린타 터널의 연기 가득한 사령부에서 상황을 점검하던 웨인라이트는 터널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모든 부상병들과 간호사들(당시 60명 이상의 미 여군 간호사들이 있었다)이 학살당할 것을 우려했고 곧 최후의 결심을 하게 된다. 웨인라이트는 백악관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투쟁했으며 이제 부득이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와 고별인사를 전달한다. 5월 6일 오후 1시 30분에 코레히도르의 미군은 백기를 내걸었는데 총 만 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최고사령관인 웨인라이트 중장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가 된 최고위 계급의 미군 장군이 된다. 웨인라이트는 이후 필리핀 내에서 일본군에게 끌려 다니며 잔여 병력의 투항 방송을 했고 7월부터 본격적인 포로 생활에 들어간다. 일본군이 동남아 전역에서 가장 고전했던 필리핀 전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전투 후 일본군 총사령관 홈마 마사하루는 필리핀에서의 졸전을 이유로 강제 예편 당했다(그는 종전 후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다).


비록 웨인라이트가 높은 장군의 신분이었지만 일본군이 포로를 대했던 최근의 사례를 볼 때 앞으로 어떤 고난이 전개될 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다

6월 9일 웨인라이트는 마닐라 북쪽에 있는 ‘타를라크’의 장교 수용소로 옮겨졌다. 장교 수용소라고 해서 무엇인가 대우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는 최고위 미군 장군 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경비병에게 목례를 해야 했다. 긍지 높은 군인가문 출신이자 현역 장군으로서 이는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를 거부할 시 즉각적인 구타의 대상이 되었다. 이곳에서 두 달 간 일본군 포로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체험한 웨인라이트는 본격적인 수용 생활을 위해 대만 동부의 카렌코(오늘날의 화렌)로 이감된다. 이곳도 이전의 수용소처럼 미군들에 대한 적의를 보이는 가학적인 경비병들로 가득했다. 구타도 간간히 발생하는 가운데 정말로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극심한 배고픔이었다. 쌀밥의 양은 극도로 적었고 같이 배식되는 스프(국)에는 건더기도 없이 약간의 소금에 멀건 물만 있을 뿐이었다. 웨인라이트를 비롯한 포로들 모두가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해골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웨인라이트 관점에서 일본군은 포로에 관한 ‘제네바 협약'(Geneve convention, 1929년)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겉으로는 자발적으로 일 할 포로를 원한다고 했지만 지원자가 없을 시 포로들의 배급을 줄였다. 사실상의 강제노동이었다.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많은 소포와 음식들이 수용소로 보내 졌지만 대부분의 경우 포로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경비병들이 이를 가지고 장사를 할 때도 있었다. 일부 경비병이나 포로감시원(주로 한국인과 대만인이 동원됨)들을 매개체로 암시장이 있었고 약간이나마 음식이나 의약품 등이 거래되었지만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포로들 사이에는 ‘일본군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삶의 의지를 유지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웨인라이트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1943년 4월에 웨인라이트와 다른 117명의 고위 포로들은 일본 남쪽의 가고시마 인근의 수용소로 옮겨진다. 이곳에서 다행스러웠던 것은 도착 후 당분간은 구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식량 배급에 관련한 큰 변화가 없었고 포로들은 여전히 굶주렸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본국에 편지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군 검열관이 내용을 세세하게 감독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을 전한다는 것 만으로도 포로들의 기쁨은 컸다. 웨인라이트는 그의 부인 아델에게 자신의 체중 감소를 우회적으로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여보! 나는 잘 지내고 있소. 내 몸무게는 우리가 결혼했을 때 수준으로 양호하오.”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외부 소식이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숨겼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의도치 않게 자신들의 상황을 드러냈는데 수용소 내에서 공습 경보 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 본토가 연합군 폭격기들의 공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포로들은 연합군이 점점 일본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기뻐했다.


일본에서 두어 달을 보낸 후 다시 대만 동부의 수용소로 옮겨진 웨인라이트는 일본군의 선전선동 교육을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이곳은 사병 포로와 고위급 포로들이 서로 분리 되었는데 사병 출신들은 구타와 육체 노동부터 시작해서 이루 말도 못할 고생을 하고 있었다. 웨인라이트는 이러한 상황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했다. 고위급 포로들은 육체노동은 면제되었지만 식사 배급량이란 점에서는 다른 포로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군 대령이 웨인라이트와 고위급 포로들을 야외 나들이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웨인라이트는 지난 2년 동안 없었던 이러한 대접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의 결론은 일본군이 전쟁의 경과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44년 가을이 되자 웨인라이트는 다시 한번 수용소를 옮기게 된다. 이번 목적지는 다른 어떤 곳보다 멀었는데 극한 북쪽의 만주였다. 수용소는 고비 사막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는데 이전과는 다른 고통이 포로들을 괴롭혔다. 이곳의 겨울 날씨는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극한지였고 지금까지 열대 지방에서 생활했던 포로들에게 이것은 또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12월에는 마지막 목적지였던 봉천(오늘 날의 센양) 인근의 고위장교 전용 수용소로 옮기게 되었는데 포로생활 중 세번째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포로들은 상당히 우울해 졌다. 2년 반 이상의 힘든 포로 생활을 견뎌 왔지만 언제 해방될 것이라는 어떠한 정보나 예측도 어렵다는 것이 포로들을 더욱 절망케 했다. 1945년 봄이 되었고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수용소 내 공습 대피 훈련 빈도가 매우 잦아졌다. 포로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는데 연합군이 일본군을 쳐부수며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였다. 문제는 그 정확한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도적같이 오게 된다. 불과 몇 개월 후인 1945년 8월 19일의 일이었다.


최후의 승리자

일본의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5일 소위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이 연합군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을 밝혔다. 다소 난해한 표현으로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것이 뜻하는 것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의미했다. 이후 해당 내용이 도쿄의 대본영에서 각 사령부를 통해 수용소 별로 전달되었지만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포로들에게 해당 내용을 바로 알리지는 않았다. 일본군 통역의 전달을 통해 해당 내용을 들은 웨인라이트와 다른 포로들은 엄청난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웨인라이트는 포로들의 끊임없는 웃음소리를 잊지 못했는데 어느덧 자기 자신도 그렇게 웃고 있었다. 일본군은 떠나 버렸고 수용소 창고에는 적십자에서 보낸 비스킷, 땅콩 버터, 고기 통조림, 캔디, 커피 등 식료품들이 쌓여 있었다. 포로들은 근 3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된다. 또한 미제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도 많이 있었는데 웨인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굴뚝에 연기를 때듯이’ 자국산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수용소에 소련군이 도착한 후 미군 OSS(전략사무국)에서 급파된 요원들이 그와 영국군의 ‘아서 퍼시벌’ 장군 등 다른 포로들을 인수해서 중경의 연합군 사령부로 이동시켰다. 이동 중이었던 8월 23일은 마침 웨인라이트의 생일이었는데 훗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생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 웨인라이트의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다. 미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당한 그를 본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웨인라이트는 포로 생활 중에도 이 생각만 하면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를 호송하던 미군 장교의 말은 예상외였다. 그 장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모두들 웨인라이트를 영웅으로 생각한다고 했던 것이다. 중경에 도착한 웨인라이트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 미군 점령군 사령부가 있던 도쿄로 날아갔다. 그는 9월 2일에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조인식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도쿄의 제국 호텔은 연합군최고사령관이자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거처였다. 맥아더는 ‘필리핀의 제왕’에서 이제 ‘일본의 제왕’으로 등극하려는 찰나였다. 8월 31일, 이 호텔의 입구에서 한 깡마른 미군 장군이 서 있었는데 그 장군은 바로 웨인라이트였고 옛 전우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웨인라이트는 맥아더가 필리핀을 떠날 때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했고 이에 대해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후 카키색 군복을 입은 맥아더가 나왔는데 뼈만 앙상한 웨인라이트를 보자마자 둘은 뜨겁게 포옹을 한다. 코레히도르 요새의 선착장에서 헤어진 지 정확히 3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 카리스마 있던 맥아더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연신 의기소침해 있던 웨인라이트에게 한마디를 건 내게 된다. “이봐! 자네는 다시 자네의 군대를 지휘하게 될 거야!” 9월 2일에 웨인라이트는 미조리호 함상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조인식에 참석했으며 그 다음날에는 퍼시벌 장군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로 날아가 필리핀 주둔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끼’의 항복을 받는다. 운명의 장난인지 3년 전에는 퍼시벌 장군이 싱가포르에서 야마시타에게 항복했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웨인라이트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태평양 전쟁의 모든 것이 종료되었고 최후의 승리자가 된 웨인라이트는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족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9월 5일 웨인라이트는 육군대장으로 진급한다. 또한 9월 13일에는 뉴욕시에서 전쟁 영웅에 대한 예우로서 카퍼레이드를 실시했다. 이제는 웨인라이트도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미국인들은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는데 그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미군 최고의 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은 것이다. 그의 훈장 수여는 9월 19일에 이루어 졌고 그 공적서에는 웨인라이트를 “코레히도르의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탁월한 용기와 리더십을 보여 병사들을 이끈 용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후 웨인라이트는 미 본토 텍사스에 있는 제4군을 지휘하게 된다. 그의 부대는 전투부대가 아닌 사실상 후방의 예비군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감내했던 순교자에 대한 조국의 배려가 담긴 인사 조치였다.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열린 지 정확히 8년 후인 1953년 9월2일에 웨인라이트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디어 내며 최후의 승리자가 된 불굴의 사나이는 그렇게 미국인들의 가슴에 별로 남으며 영원히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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