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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20. 2024

8. 최후의 일인까지 희생하라!(上)

전쟁 말기 나치에 징집된 국민돌격대(1944-1945)

베를린에서 징집된 국민돌격대(Volkssturm)

“우리는 적이 발을 디디고 싶어하는 독일 영토 어느 곳에서나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야 하며 무장할 수 있는 모든 독일인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 히틀러의 국민돌격대 포고령 중 -


나치의 선전상인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전쟁 중 각종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1944년의 많은 시간을 한 영화의 제작에 미친 듯이 몰두했다. 영화의 제목은 ‘콜베르크(Kolberg)’로서 한 동부 독일의 도시 이름을 사용한 것이었는데 독일인들에게는 암울했던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된 콜베르크가 시장과 시민들의 일치단결로 포위를 견디어 내면서 마침내 해방되고 승리한다는 다소 프로파간다 냄새가 짙은 이야기였다. 괴벨스가 영화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선전 영화를 관장하는 주무 장관으로서 자기 역할을 한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 영화에 대한 나치의 지원 정도였다. 콜베르크는 괴벨스가 칭찬했던 선전영화 ‘유대인 쥐스(Jud Süß)의 파이트 할란(Veit Harlan)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는데 당시 필름으로서는 상당히 드물었던 총천연색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전시임에도 무려 18만 7천 명 이상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으며 관련 의상이 제작되었다. 제작비는 총 760만 라이히스마르크(Reichs Mark)였는데 이것은 요즘 가치로 3400만 유로(한화 약 500억 원)에 달했다. 이때가 독일의 전쟁 수행 기간 중 가장 심각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영화’ 제작에 이처럼 엄청난 물량과 자금이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콜베르크라는 영화는 제3 제국에게 중요한 프로젝트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독일에게 콜베르크가 더 이상 과거의 역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이제 독일 땅 전체에 ‘20세기판 콜베르크’가 현실화되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항전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콜베르크’는 바로 이 부분을 강조하며 독일인들에게 “모두 함께 최후까지 버티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장 하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한편 나치는 영화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적에게 맞설 ‘최후의 일인’까지 끌어 모으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나치의 선전영화 콜베르크의 한 장면 (1945)


제국의 종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소련군의 포로가 된 독일 병사들이 모스크바 시내에서 힘없이 행진하고 있다(1944)

2차 세계대전의 전 기간 중에서도 1944년 여름은 독일에게 있어 최악의 시기였다. 지난 5년간의 전쟁에서 한때 독일은 유럽 대륙과 북아프리카의 지배자였지만 1943년 중반 이후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적에게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마침내 1944년 6월에 독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개의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서쪽에서는 미군과 영국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며 ‘유럽 제2 전선’을 열었고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독일군의 핵심인 ‘중부집단군’ 자체를 궤멸시켜 버린 것이다. 독일군 15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이들 중 5만 7천 명이 모스크바에서 강제로 행진하며 소련인들에게 조리돌림 당했다. 연합군은 동과 서에서 하루가 다르게 진격해 나갔는데 소련군은 8월에 폴란드의 바르샤바 코앞까지 도달했고 미영 연합군은 8월 25일에 파리를 해방시킨다. 이제 이들의 다음 목표가 어디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바로 ‘제3 제국’의 본토였고 연합군 병사들 모두 자신들의 부대가 수도인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여 전쟁을 끝내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외부에서의 적들의 공격에 더해 7월 20일에는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히틀러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면서 독일 내부에서도 나치에 대한 저항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천년은 갈 것”이라고 장담한 제국이 이제 서서히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처럼 다급해지자 나치 수뇌부 및 독일군 내에서도 이제 국민총동원을 통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은 이미 국가총력전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전상인 괴벨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휘어잡는 자신의 ‘악마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스포츠 궁전(Sportpalast)에서 연설을 행했는데 독일 국민들에게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총력전을 수행할 것을 주문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로 ‘독일이라는 전쟁 기계’는 가동률을 최고치로 높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 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전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집단은 역시 독일군이었고 이들은 당장 필요한 병력 숫자를 50개 사단 이상으로 파악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병력을 보충할 길이 안 보였는데 독일군의 선택은 우선 부대의 편제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독일 보병 사단은 9개의 보병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숫자를 6개까지 줄인 것이다(사실 이런 임시변통의 방법은 1942년 이후 종종 있어왔다). 더불어 이전까지는 입대 대상이 아니었던 40세 이상의 일반인들을 추가로 징집한다. 또한 근무할 함정과 전투기가 사라진 후 육상에서 기약 없이 대기하고 있던 해군과 공군 병사들은 보병으로 전환시켰다. 나치는 이런 방식으로 1944년 가을부터 급조된 부대를 ‘국민척탄병(Volksgranadier)’이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며 일선으로 내몰았다. 비록 병력상으로는 부족했지만 국민척탄병은 독일군의 정식 사단으로서 일선의 전투에 참여했다. 병력이 줄어듦에 따라 화력이 약해지는 부분은 자동화기의 집중 투입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세계 최초의 자동돌격소총인 Stg-44(Sturmgewehr-44)가 보급되어 독일군 기본 소총인 볼트액션(Bolt action: 단발 장전) 방식의 Kar-98k를 대체했다. 또한 적 전차 격파에 유용했던 휴대용 대전차 무기 ‘판처파우스트(Panzerfaust)’가 보병 분대에 대량 보급되었다. 그나마 국민척탄병은 이렇게 무기와 군복이나마 갖춘 정규 군대였지만 상황이 다급했던 나치는 여기에서 멈출 수가 없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기 시작했다.


16세에서 60세까지

국민돌격대에 소집되어 사열 중인 독일인들

연합군이 사방에서 몰려오며 독일의 패배는 확정적이었지만 총통인 히틀러는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배반한 무능한 독일인들이 짊어져야 했고 스스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제 히틀러는 독일인들의 최후의 일인까지 끌어내려하고 있었다. 그는 1944년 9월에 자신의 충복이자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Martin Bormann)에게 최후의 전쟁 자원으로서 독일인 600만 명을 추가 징집하도록 지시한다. 징집 대상은 국민척탄병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실상 거동이 가능한 독일인 남성(성인과 미성년을 안 가리고) 모두가 해당되었다. 16세의 새파랗게 어린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 단원들부터 1차 세계대전의 노병인 60대의 노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연령 범위가 무려 40년으로 1884년부터 1928년생까지 해당되었다. 총참모장인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은 1813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싸운 프로이센 민병대를 상기하여 그 명칭을 ‘향토돌격대(Landsturm)’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 이름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국민돌격대(Volkssturm)라고 명명되었다. 문자 그대로 전 국민의 총동원이었기에 당시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 있던 41개의 관구(Gau: 현재의 ‘주’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에서 관구지도자(Gauleiter)들이 동원의 행정적인 책임을 맡았다. 각 관구는 그 아래에 있는 ‘크라이스(Kreis: 독일의 행정 단위로 우리의 군/구와 유사하다)’의 동원을 책임졌는데 독일 내 920개의 모든 ‘크라이스가 국민돌격대의 소집 대상이었다. 나치는 각 크라이스가 자신의 고향을 방어하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제공할 것으로 계산하였다. 정확한 최종 소집 인원은 파악되지 못했지만 히틀러가 지시한 600만 명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일부 여성들은 보조부대로서 의료 봉사대원으로 징집되거나 총기류의 사용 교육을 받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친위대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er)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돌격대의 창설을 독일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 날은 131년 전 라이프치히에서 프로이센(독일)을 포함한 연합군들이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날이었는데 전황은 다시 독일 편이 승리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직 지역별로 소집해야 할 인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에게 제공할 피복과 무장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당시 나치에게는 정규군에 줄 보급품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군복의 경우 경찰관, 소방관이나 히틀러유겐트처럼 기존에 제복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입으면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군복조차 배급받지 못했다. 문제는 이 상태로 전쟁터에 뛰어들었을 때 적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군복이 없기 때문에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나 테러분자로 오인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해당 인원들이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 되지 못하고 적에게 즉결처형 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이에 대한 임시방편의 대안으로 팔에 ‘독일 국민돌격대(Deutshcer Volkssturm)’라고 쓰인 완장을 대량으로 제작해서 부착시켰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은 당시의 군복을 입고 나오기도 했고 정식으로 국민돌격대의 군복과 계급장을 받은 일부 인원들도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계급장이 악명 높은 ‘친위대’의 그것과 비슷하여 후에 포로로 잡힐 경우 오히려 적군에게 친위대로 오해를 받고 심하게 대우받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장비와 무기에 있어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는데 사용할 철모가 부족하여 많은 이들이 개인 모자를 썼고 심지어 노획한 프랑스군의 아드리앙(Adrian) 헬멧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총기류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소련 등 전 유럽의 소총과 기관총 등이 총동원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19세기에 나온 것으로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구식 무기도 있었다. 다양한 총기는 여러 가지 구경과 종류의 탄약을 공급해야 함을 의미했는데 보급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대전 말기의 물자가 제한된 상황을 감안하여 부품을 극도로 단순화한 ‘VG-1-5(국민총: Volksgewehr-1-5)와 같은 보급형 기관단총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충분치 못한 수량이 문제였다. 운 좋게 총이 보급되었다 쳐도 30발 이상의 총알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한편 ‘연합군 전차 킬러’였던 대전차 병기 판처파우스트 정도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원활히 공급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고 이런 이유로 많은 국민돌격대원들의 사진에 판처파우스트가 등장한다. 판처파우스트를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0~50미터까지 근접해서 발사하는 것이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공격 후 자신의 생명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돌격대원들은 소집되면서 다른 독일군들처럼 히틀러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해야만 했다. 당시 독일인들은 주 6일 근무하던 상황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국민돌격대의 훈련을 위해 하루 있는 일요일 휴일마저 반납해야 했다. 이들은 일요일에 지역 일대에서 6시간 이내의 단거리 행군을 하거나 무기의 사용법을 익혔는데 극히 소수의 몇몇 사람들 만이 해당 무기를 직접 사용해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훌륭한 전투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현실이 이러다 보니 독일 국민들 사이에 국민돌격대에 대한 블랙 유머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는 국민돌격대야 말로 독일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이라고 강변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에게는 금(노인들의 금니)이 많고 은이 많으며 (노인들의 백발을 비유) 납(부상자들에 몸에 박힌 파편)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짧은 유머가 국민돌격대의 현실을 신랄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한편 국민돌격대로 차출된 사람들의 각오는 싸우는 지역에 따라 상이했는데 서부 독일의 국민돌격대원들은 가능한 싸움을 피하고 싶어 했고 미군이나 영국군이 하루빨리 와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반면 동부 지역의 사람들은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소련군을 맞아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을 지킨다는 절실한 사명감으로 굳게 뭉쳐 있었다. 지난 3년 반 동안 벌어진 독일과 소련의 전쟁은 민족 말살의 처절한 전쟁터였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며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던 과거가 이제 소련군에 의한 복수로 다시 독일 땅에서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1944년 10월 동프로이센의 접경 마을인 ‘네머스도르프(Nemmersdorf)’를 일시 점령했을 때 현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여성들은 보이는 대로 강간했다. 독일군이 즉시 반격을 통해 마을을 재탈환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지옥 같은 장면에 경악했는데 마을에는 소련군에 의해 옷이 벗겨진 채 학살된 수많은 남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치는 이를 영상으로 만들어 독일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동했는데 이를 본 (특히 동부지역) 독일인들은 경악을 했으며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간다. 이러한 배경으로 소련군을 막는 임무가 주어졌던 동부 독일의 국민돌격대들은 비록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남은 가족들을 서쪽으로 도망치게 하고 살리겠다는 비장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나치는 ‘승리 아니면 시베리아행(Sieg oder Siberien)’이라는 극단적인 구호로 국민들을 자극했다. 1944년 11월 16일 베를린에서 괴벨스 주재로 국민돌격대 사열 및 행진이 벌어졌는데 민간복과 군복을 섞어 입은 국민돌격대들이 우중충한 늦가을의 날씨 속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갔다. 참석자 중 누구 한 명 웃거나 미소 짓는 사람조차 없었는데 자신들 앞에 닥칠 험난한 미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종적으로 국민돌격대는 서부 지역에서 15만 명, 동부 지역에서 65만 명 정도의 인원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들이 적과 마주쳐야 할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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