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안 마시던 술이 들어간 탓일까, 누군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반쯤 눈을 떴을 때 호스텔 주인이 서 있었다. '응..? 뭐지'
시선이 시계로 향했을 때 깜짝 놀란 나머지 침대에서 몸이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암막 커튼 때문에 아직 한밤중이라 생각했는데 해는 이미 떠 있고 나는 언니에게 소리쳤다. "헐 우리 큰일 났어, 일어나!!!!!!"
옆 마을로 떠나야 하는 날이었다. 약속한 체크아웃 시간에 나오지 않은 우리를 깨우러 와준 주인 덕분에 겨우 일어난 것이다. 예약해둔 버스를 타기 위해 남은 시간은 고작 30분뿐이었다.
배낭에 모든 짐을 무작정 쑤셔 넣고 서둘러 체크아웃을 한 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 모든 게 10분 안에 일어났다.
우리는 추노처럼 머리가 산발인 채로 지하철을 향해 달렸다.
"아 왜 알람 안 울렸지??" "몰라 일단 뛰어!"
지하철에 도착하자마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거친 숨을 헐떡이던 언니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물었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오른쪽!" 하고 외쳤다. 마침 열차가 들어오는 중이었고 서둘러 올라탔다.
시계를 봤다. 예약해둔 버스 시간에 늦지 않을 것 같아서 긴장이 한순간 스르륵 풀렸다. 시계에 머물던 시선이 오른쪽으로 옮겨지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지하철 유리창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비쳐서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문지른다고 변하는 건 없지만 그럼에도 의미 없는 행위를 이어갔다. 언니는 그런 나를 보고 '푸웁' 하고 웃었다.
긴박했던 순간 뒤로 웃음이 나오는 건 그 상황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푸웁 하고 웃던 언니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얼굴에 번지던 웃음기도 싹 가셨다. "잠깐, 이 열차 지금 반대로 가는 거 아니야??"
동공이 커진 나는 지하철 노선을 다시 확인했다. 진짜 반대로 가고 있었다. "일단 내려!!" 우리는 허둥지둥 다음 정거장에 내렸다. 지금 다시 반대쪽 열차를 탄다고 해도 예정된 버스 시간까지 도착하기는 무리였다.
화살은 곧바로 내게 돌아왔다. "아까 오른쪽이라며..?" 언니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긴박한 상황에 내몰린 뇌는 간혹 잘못된 선택을 하곤 하는데 그때의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무슨 확신으로 "오른쪽!"이라고 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오른쪽인 줄도 모르면서 오른쪽이라 외치다니. 그렇게 체스키 크룸로프행 버스를 놓치고야 만 것이다.
놓친 버스 티켓은 예산을 아끼기 위해 한국에서 아주 저렴하게 예약해둔 표였다. 버스당 딱 두 자리만 나오는 초특가 좌석. 언니가 끊어둔 금쪽같은 티켓을 잘못된 판단으로 홀라당 날려버리다니. 나는 죄인이 되고야 말았다.
지하철에서 내린 언니 눈알은 충혈된 채 눈물이 쏟아졌고, 그걸 본 나도 눈물이 났다. 가까운 사람의 감정은 금방 옮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은 죄책감으로 크게 번졌다.
특이한 눈썹을 가진 언니는 화날 때 나타나는 이 모양(•́ •̀)의 눈썹으로 수많은 식빵을 쉴 새 없이 구웠다. 아무 말 없이 듣다가 한계에 달할 때면 예매해서 좋아했던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잠깐 딴생각을 했다. 그러면 조금 참을만했다.
식빵이 구워질 때마다 내 손에는 짐이 하나씩 생겼다. 잠자코 받다 보니 모든 짐이 전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짐꾼으로 전락한 죄인 한 명은 울상이 된 채 성난 눈썹 뒤를 천천히 따랐다.
타고 남은 재처럼 까매진 마음을 탈탈 털어내며 우리는 다시 반대쪽 지하철을 탔다. 터미널에 겨우 도착했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혹시나 했던 일말의 기대가 10분 차이로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직원에게 표를 구입하려는 순간, 혼란에 빠지는 말이 이어졌다. 체스키 크룸로프행 티켓은 이곳에서 구입할 수 없다는 것. 지하철을 타고 멀리 떨어진 다른 버스 터미널에서만 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버스 타는 곳은 이곳인데 다른 곳까지 또 다녀와야 하다니.
불안한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던 내 시선은 이내 바닥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여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보는 것만이 따가운 눈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버스 티켓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언니가 지하철을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둘보다 혼자가 나을 것 같아서 나는 제자리에 남기로 했다.
일 저지르는 사람, 수습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 눈에 보이지 않는 책임감을 어깨 위에 올린 언니가 점점 멀어져 갔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무겁게 고여있던 공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언니가 안전하게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티켓 두 장을 든 언니가 멀리서 걸어왔다. 미리 사둔 커피와 빵을 뒤쪽에 숨겨두었다가 짜잔! 하고 건넸다.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한 상태였고 언니는 배고프면 더 예민해진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뱃가죽이 들러붙어 쪼글 해진 언니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고 그걸 본 나도 막 웃었다. 잠시 까만색으로 변했던 색은 다시 주황색으로 돌아왔다. 탑승 전 남은 시간 동안 정류장에 앉아 배를 채우고, 여유롭게 버스에 올라 3시간을 달려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부에 들어서자 쨍한 햇빛이 골목 깊은 곳까지 내리쬐고 있었다. 맑은 날씨는 우중충했던 마음을 환기시켜 주었다. 날씨가 주는 힘은 이렇게나 크구나. 밝은 하늘 아래 환해진 마음은 또다시 나아갈 용기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