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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 호 Aug 23. 2022

불편을 다독여주는 여행

체스키 크룸로프

편안하고 따뜻하게

당일치기로 많이 찾는 체스키에서 1박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유독 가격이 착한 호스텔 때문이었다. 홈페이지 상위에서 우리에게 꼭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고민 없이 예약한 호스텔.

노란 벽에 귀여운 창문, 빨간 꽃으로 꾸며진 건물 앞에 도착했다. 호스텔 주인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가장 꼭대기 층에 달하자 그녀는 이곳이라며 찡긋 웃었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낡은 침대 두 개와 책상 하나가 보였다.

세모난 지붕으로 이루어진 천장은 벌떡 일어난다면 머리를 아주 세게 찧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격이 저렴했구나 싶었지만 처음 경험하는 독방이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문만 닫으면 옷을 마음대로 갈아입을 수 있고, 눈치 보지 않고 작은 즐거움에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추며 깔깔거릴 수 있었다. 짐을 아무렇게 널브러뜨려놔도 문만 잘 잠그고 나가면 누가 훔쳐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만의 공간.

배낭에 든 옷들을 모두 빼서 옷걸이에 걸어뒀다. 단 하루뿐이지만 배낭도 바람이 통해야 한다는 언니의 논리 때문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텅 빈 배낭을 보기 힘들기도 했다. 창문을 모두 열고 꽉꽉 눌려있던 소지품들에 바람을 쐬어 주었다.   

시계는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주방에서 타 온 어설픈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나란히 앉아 창밖을 봤다. 작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 덕분에 오전의 소란했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두 개 먹자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13세기부터 다양한 건축 양식을 담고 있는 체스키 크룸로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을 온전히 즐기자는 마음으로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예쁜 골목길을 걷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딸기 씨가 콕콕 박힌 것으로 보아 진짜 딸기가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언니는 맛이 없을 수도 있으니 한 개만 사보자고 했지만 확신이 있었던 나는 두 개를 외쳤다.

당연히 두 개를 사야 한다고 했지만 막상 아이스크림을 받자 솔직히 조금 긴장이 되었다. 맛이 없으면 언니의 구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유독 먹는 것에 예민한 언니였다.


'제발 맛있어라' 떨리는 마음으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었다. 다행히도.. 너무 맛있었다. 

"거봐 맛있잖아" 우쭐한 표정 뒤로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승자의 미소를 흘리며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벤치에는 많은 사람이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상큼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음미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아주 맑고 깨끗해서 눈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이 손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늘과 구름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봤다. 이런 여유를 느끼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오랜만에 평화로운 오후였다.






배를 움켜잡은 채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뱃속에 넣은 채 광장을 빠져나와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을 오르고 또 오르자 확 트인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주황색 지붕들, 그 옆으로 흐르는 블타바 강 모습은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마을 같았다. 그림 같은 풍경이 이런 것일까.

고요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배에서 심하게 '꼬오록..'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모여 앉는 공간이었다면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배를 움켜잡아야 할 소리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커피 두 잔과 빵 한 조각, 아이스크림만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가 지기 전 구경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배고픔을 잊게 만든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못 먹어본 음식이 이렇게나 많은데 겨우 커피와 빵이라니.. 여행에서는 먹는 것에 제한시간이 있단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제한된 시간 내에 '원하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성을 내려와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모터가 달린 듯 빨라졌다.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은 채로


메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격을 제대로 본 건지 다시 확인했다. "아니 잠깐만.. 폭립이 7,000원대라고...?"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은 채로 허니 립, 그릴 치즈, (사진엔 없지만) 서로인 스테이크까지 총 세 개의 메뉴를 주문했다.

설레는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일단 너무 좋아하지 말자고 언니에게 말했다.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양이 적거나 맛이 없거나 둘 중에 하나일 수 있는데,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 기대를 안 하면 실망할 일도 없다면서. 불안했던 하루 중 이 시간만큼은 지키고 싶어서 실망할 일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맛이 없어도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길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떤 음식이 나와도 실망하지 않을 마음을 지닌 채로 음식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식전 빵이 나왔는데, 로 주문한 빵처럼 굉장히 짐했다. 이것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연이어 나온 5,000원대의 서로인과 그릴 치즈는 보란 듯이 멋진 자태를 뽐내며 등장했다. 퀄리티가 좋아서 놀랐고 맛을 본 순간 눈이 커지고 말았다. 이거 너무 맛있는데 하던 차에 등장한 허니 립은 사이즈로 모두를 압도했다.

정말 컸다.. 우리나라였다면 5만 원은 훌쩍 넘길 만한 사이즈였다. 달짝지근하면서 부드러운 폭립은 육즙이 뚝뚝 흘렀다. 맛을 본 순간 이 가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말의 의심이 폭립과 함께 스르륵 녹아 없어졌다. 기대하지 않아서 더 크게 행복했다.

아침엔 버스를 놓쳤지만 저녁엔 이런 행운이 와줬다. 불편을 다독여주듯 삶은 균형을 유지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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