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호스텔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숙소라 그런지 6인 도미토리에한국인4명이 있었다.
타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낀다. 분주한 하루 중 시작과 끝에 잠깐씩 마주칠 뿐이지만, 낯선 곳에서 만난 뜻밖의 익숙함은 호스텔 매력이기도 했다.
식탁으로 모이는 시간
조식이 포함된 호스텔은 시리얼, 식빵, 쨈, 버터, 우유,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알린다. 모두들 식탁 앞으로 모이는 시간.
언니는 그릇에 시리얼 두 개를 가득 담았다. 하나는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언니 꺼였다. "시리얼을 이렇게나 많이 떠? 다 먹을 수 있어?" 이 정도는 껌이라는 듯 언니는 우유를 말아 유유히 자리로 사라졌다. 바삭한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눅눅해진 한 그릇을 연달아 즐길 수 있다며 매번 같지만 다른 두 종류의 시리얼을 먹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국과 맛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음식들이지만, 그 나라 사람들의 손길이 쌓여 만들어진 식료품을 마주한 것만으로 새로운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 먹어온 콘플레이크와 이곳의 시리얼. 비슷하지만 그 안에서 작은 차이를 찾아내려는 소소한 순간이 다시금 여행자의 존재를 느끼게 해 주었다. 덕분에 식탁은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려는 대화로 풍성했다.
한정된 크기의 배낭
한정된 크기의 배낭은 내가 무엇을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무게와 부피 때문에 옷은 가장 먼저 빼야 할 품목이기도 했다. 넉넉히 챙겨 오지지 못했던 옷은 추워진 날씨와 부다페스트의 부담 없는 물가를 이유로 늘어날 기회를 엿보며 우리를 유혹했다.
아무 정보 없이 들어간 쇼핑몰은 외관과 달리 꽤나 괜찮은 가격의 옷들을 팔고 있었는데, 이곳저곳 구경을 할수록 쇼핑 카트에는 많은 옷이 담겼다.
양손이 무거워져서야 배낭 무게가 생각났다. 앞으로 모두 짊어져야 할 짐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가다듬고 이 중 딱 한 벌씩만 고르기로 했다. 언니는 2995 포린트(11,000원)의 티셔츠, 나는 3990 포린트(15,000원)의 니트를 샀다.
착한 가격에 재질이 좋아서 맛있게 잘 입은 옷. 언니의 티셔츠는 꼬질꼬질해질 때까지 함께 했고, 나의 니트는 시간이 지나도 짱짱한 재질 덕분에 변형 없이 서랍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변함없는 줄무늬 니트를 볼 때마다 부다페스트가 문득 떠오르곤 한다.
소중한 굴라쉬
가끔 맛이 어느 정도 보장된 블로그 맛집보다 순간의 감을 믿어보곤 한다. 설령 맛이 없어도 "먹어봐서 안 거야" 하고 쉽게 털어내는 마음을 지닌 채로. 헝가리 전통 음식 굴라쉬를 점심으로 정한 뒤 테라스가 예쁜 식당으로 들어갔다.
먼저 나온 식전 빵을 뜯으려는 내게 언니가 말했다. "이거 굴라쉬에 찍어 먹어야 해"
... 아하! 빵에 머물던 손이 머쓱하게 무릎 위로 향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과 의도치 않게 아이 콘택트를 몇 번 하자 금세 음식이 나왔다. 고기와 야채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굴라쉬는 헝가리 특산품인 파프리카 가루가 더해져 우리나라 육개장과 비슷한 맛이 느껴졌다. 아껴둔 빵을 집어 수프에 콕 찍어 먹으니 흰쌀밥 생각이 절로 났다.
처음 먹어본 음식에서 고향의 맛을 느끼다니. 한식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잠자고 있던 한국인 유전자에 반짝 불이 켜져 버렸다. 1인 1그릇이 아니라 아쉽게만 느껴졌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서로 번갈아가며 공평하게 나누어 먹었다. 굴라쉬는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오후 8시인 광주에서 저녁밥을 먹고 티브이 앞에 앉아 계실 부모님 생각도 났다. 조만간 연락드리자는 다짐과 함께 소중한 굴라쉬가 목을 타고 뜨끈하게 내려갔다.
추운 날 온천의 도시에 머문다는 것은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차가운 바람까지 맞으니 뜨끈한 물에 푹 들어가고 싶어졌다. 부다페스트에서 유명한 세체니 온천을 가려다 천장이 높고 동굴처럼 생긴 터키식 온천을 발견해 그곳으로 향했다. 부다페스트에 와서 무슨 터키식이냐고 할 수 있지만, 진짜 이유는 1인당 6,000원씩 더 저렴했고 수영복을 따로 대여할 필요 없이 자연인 상태로 즐길 수 있으며 여탕 남탕 분리된 공간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문이 달린 개별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명과도 마주치지 못했다. '여기 조금 썰렁하네'라고 생각하며 온천을 향해 쭈뼛쭈뼛 나갔는데, 물속에서 동공이 커진 사람들이 우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뇌 회로를 돌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뿔싸.. 그들은 모두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체가 아닌 그들을 보자마자 민망함이 몰려왔다. 민망한 감정은 사실을 알기 전과 후, 미묘한 짧은 순간에 갑자기 생겨난다.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행동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을 때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우왕좌왕하며 황급히 탈의실로 돌아왔다. "뭐야 여기 수영복 안 입고 오는 곳이랬잖아..!" "그러게 찾아볼 땐 분명 그랬는데.."
서둘러 수영복을 대여했다. 다시 수영복을 입은 채 토끼 눈이 되었던 그들과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같은 탕에 몸을 담갔다. 차가운 살갗이 뜨거운 물에 잠기자 몸이 노곤해지면서 지금까지의 피로가 물을 타고 흩어졌다. 조금 전 날것의 상태로 민망함을 마주한 감정도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온기만이 몸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