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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호 Aug 25. 2022

여행에서는 사랑이 피어나

부다페스트

황금빛으로 가득 찬 도시


태양과 멀어진 시간이 되자 진짜 부다페스트 시간이 시작됐다. 황금빛으로 가득 찬 도시.

잿빛이었던 왕궁은 진짜 금으로 만들어진 착각이 들만큼 많은 빛을 뿜어냈다. 그 아래로 도시의 모든 반짝임을 담은 강물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강둑에 바짝 붙어 물결 위로 쏟아지는 금빛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분위기를 깨는 궁금증이 생겼다.

"매일 이렇게 금빛 도시로 변한다면.... 전기 요금은 얼마나 나올까?"
"전기 요금이 금값보다 더 나오지 않을까?"

부다페스트 관광 예산까지 걱정하는 오지랖을 뒤로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금 한 돈을 선물해 주었으니 금빛이 더욱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했던 왕궁을 뒤로한 채 겔레르트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위에서 내려다볼 차례다.


어둠 속에서 피는 사랑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 말없이 바닥만 보며 오르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흔한 가로등 하나 없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을까? 조금씩 드러나는 황금빛 하나하나가 작은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유일한 등불이었던 핸드폰 플래시는 졸지에 불청객이 되어 빠르게 사라졌다.

언덕 중턱 모습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왜 “유럽 3대 야경”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조용히 야경에 젖어들던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쪽..쪽"

".....??" 화들짝 놀란 언니와 나는 숨죽인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를 따라 눈을 요리조리 굴려보니 계단 옆 풀숲에 가려진 벤치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있던 어느 커플의 실루엣이 보였다. 은밀한 소리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오직 멀리서 빛나는 도시의 반짝임을 배경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그들. 살짝 맺힌 땀을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연인들이 사랑하기 딱 좋은 날.

점점 진해지는 그들 소리에 우리는 눈치를 챙겨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마치 평생 인생을 함께 해 온 노부부처럼, 동시에 "좋을 때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로맨틱한 순간에 웃음을 씰룩거리는 언니와 내가 있었다.


꼼짝할 수 없는 야경


키스 소리로 자극된 청각은 서로 머릿속에 저장된 ‘사랑’이란 정의를 불러일으켰다. 각자 사랑학개론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은 계단을 오르다 보니 주위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곳에 거대한 여신상이 있었는데, 흡사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불빛. "와.." 우리는 그 자리에 돌멩이가 된 것 마냥 꼼짝할 수 없었다. 밤이 건넨 선물 같았다.

사실 유럽 야경 1위로 뽑힌 프라하를 보고 단순하게 '멋지다'라고 느꼈던 터라 부다페스트는 조금 덜 멋지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는데, 뒤통수를 아주 크게 맞았다. 우리에게만큼은 이곳 야경이 1위였다. 누가 정해둔 순위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낀 감정 아닐까.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멋진 야경은 처음이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고 싶어졌다. 멋지고 좋은 걸 볼 때면 마음속 큰 비중을 차지한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랑이란 가끔 그런 순간으로 알아채기도 한다. 

이 감동을 사진에 그대로 담고 싶어서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장소를 바꿔가며 수십 번을 찍었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만 들었다.

"아니 왜 똑같이 안 담기지?? 찍힌 사진 좀 봐 너무 달라..! "

카메라 성능을 탓하다가, 떨리는 내 손을 탓하다가, 그냥 조용히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래 바라보면서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이른 아침, 우체국 앞에 도착했다. Posta. 편지지 한 장을 구입해 그리움이 묻은 편지를 한국으로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체력 소모가 많은 배낭여행에서 입은 쉽게 헐었고 여행도 체력이라는 말을 실감해 갈 때쯤, 부모님께 연락조차 자주 못 드린 걸 깨달은 불효녀가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우리는 건강히 잘 있다는 안부와 어제 부다페스트 야경을 봤는데 너무 멋지더라는 얘기,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겠다는 소망이 담긴 편지였다.

좋은 것을 보고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서 함께 하고 싶다면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가장 먼저 떠오른 엄마 아빠가 내게 큰 사랑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4,000원의 행복

미리 찾아둔 피자가게에 도착했다. 피자 한 판에 990 포린트, 4,000원도 안 되는 가격이라니. 피*스쿨보다 싸잖아..! 저렴한데 평이 좋아서 더욱 궁금해졌다.

유럽 피자는 얇은 편이라 1인 1판이 가능하다. 가게 이름이 붙은 안젤로 피자와 치즈 피자를 주문했다.

바로 구워져 나오는 뜨끈한 피자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계란과 베이컨, 양파가 주를 이룬 피자는 쫄깃한 도우에 넉넉한 토핑으로 가격 대비 훌륭한 맛을 자랑했다.

분위기, 맛, 가격 삼박자를 두루 갖춘 곳. 우리는 저녁에도 이곳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파스타를 주문해 봤는데 이런.. 파스타도 너무 맛있다. 여긴 다 맛있네 감동하면서 나중에 부다페스트에 다시 온다면 또 와야 할 맛집 리스트에 넣어두었다.

여행을 하면서 먹는 음식은 그날의 기분을 쉽게 좌지우지한다. 평소 먹어온 익숙한 음식을 접할 때는 편안했던 마음이 새로운 음식을 마주할 때면 요동친달까. 아마도 그 자체로 변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서 성공과 실패는 매번 따르기 마련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4,000원짜리 피자 하나로 너무 단순하게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단순한 행복. 이게 왜 이렇게 좋지. 이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행복의 여운이 참 길게도 간다.


삼천 원어치의 치즈와 햄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을 찾았다. 무려 19세기에 만들어진 이곳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꼽힌 곳이기도 했다. 야채, 햄, 소시지 등 식료품을 판매하는 1층부터 기념품이 즐비한 2층까지 넓고 깔끔한 그레이트 마켓.

헝가리 특산품인 토카이 와인과 파프리카 가루가 눈에 띄었다. 파프리카 가루 하나만 있으면 집에서도 맛있는 굴라쉬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한 봉지를 슬쩍 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여행할 날이 꽤 남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미뤄두고 바로 먹을 치즈, 햄을 구입해 시장에서 나오는 길. 마트에서 묶음 포장으로 파는 치즈와 햄을 샀던 것과 달리, 필요한 만큼 썰어서 판매하는 방식을 처음 봤을 때 충격받은 기억이 있다. 치즈도, 햄도 종류가 너무 많아 쉽사리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번엔 눈 딱 감고 시도해 본 것이다. 나름 맛있어 보이는 치즈를 손으로 가리키며 원하는 무게를 말했다. 치즈 1장도, 햄 1장도 구입할 수 있었다. 마치 무조건 박스로 사야 하는 귤을 딱 한 개만 구입한 느낌이랄까. 얇은 유산지에 싸인 치즈 4장과 햄 4장을 낯설지만 설렘 가득한 손으로 받았다. 마트에서 사둔 빵에 햄과 치즈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로 저녁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남은 음식을 보관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저렴한 가격에 맛까지 좋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또 다른 종류의 햄과 치즈를 가리킬 용기도 생겼다. 무슨 맛일지 기대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


숙소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곧바로 짐을 챙겼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작지만 큰 쓸모

떠나는 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조식을 챙겨 먹었다. 빵을 바삭하게 구워온 언니는 쨈도 야무지게 떠왔다. 가져온 빵 네 개를 혼자서 다 먹을 줄 몰랐는데 엄청난 위다. 먹는 걸 좋아하는 언니는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맛있게 먹는 법을 안다. 시리얼에 우유를 넣고 초코 가루를 톡톡 뿌리면 초코맛 시리얼이 되는 것도 언니가 알려줬다.

시리얼을 먹을 땐 한국에서 챙겨 온 작은 숟가락을 사용한다. 혹시 몰라서 챙겨 왔는데 매일 쓰게 되는 숟가락. 우리가 어린이였을 때 실제로 썼던 숟가락. 식기류가 없는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아이템이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요플레도 팍팍 떠먹을 수 있다. 배낭을 챙길 때 아빠 숟가락이라고 불리는 밥 숟가락을 챙길까, 포크 달린 군용 숟가락을 챙길까 고민하다가 최종 결정된 어린이 숟가락이다. 사용 시기가 지나 쓸모없다고 생각된 물건도 다시 보면 다른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낸다. 성인이 되어 이 숟가락으로 더 이상 밥을 먹진 않았지만, 시리얼도 먹고 요플레도 먹는 용도로 다시 쓰이고 있다. 어린이였던 우리에게 밥을 먹여준 숟가락은 우리에게 추억도 먹여주고 있다. 세상에 가치 없다고 여겨진 쓸모가 사실은 얼마나 많을까. 작은 숟가락을 깨끗이 씻어 배낭에 넣으면 식사가 끝난 의미였다. 어린이 숟가락은 3개월간 우리와 끼니를 함께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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