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그저 잠만 자는 곳이 아님을
숙소는 그저 잠만 자는 곳이라 여겼던 시절이 있다. 최소 경비로 일정을 꾸리는 첫 배낭여행에서는 더욱 그랬다. 최저가순으로 검색하면 늘 업체가 제공한 몇 장의 사진만 볼 수 있었지만 괜찮았다.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괜찮은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은 늘 용감함으로 무장되곤 했다.
5개 나라를 이동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비싸고 화려한 곳에서 청결은 기본 옵션처럼 충족되지만, 저렴한 숙소에서는 바람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막상 도착하면 사진과 다르거나 관리가 안된 채 더러운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정받은 방 문을 열기 전, 사진과 다르지 않게 해 주세요, 깨끗하게 해 주세요! 바라던 이유이기도 했다. 호텔의 깔끔함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이불이 꿉꿉하지 않고 쾌적한 곳. 곰팡이나 벌레가 없는 곳. 그거면 충분했다. 당연할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은 쾌적함이 비엔나 숙소에는 있었다.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 살짝 꺼진 매트리스, 화장실이 딸린 방. 예약할 때 본 사진과 똑같았다. 깔끔한 6인실 도미토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쾌적한 잠자리가 하루의 컨디션을 얼마나 쥐락펴락 하는지, 크게는 한 도시의 이미지까지 결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서다.
그중 노란색 사물함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지금까지 배낭을 통째로 넣을 수 있는 사물함은 없었는데, 이곳이라면 가능해 보였다. 매번 침대 옆에서 벌벌 떨던 배낭이 사물함 안으로 위치 상승하게 되는 일. 작은 차이지만 여행에서는 크게 느껴지는 일. 덕분에 밖에 나갈 때도 마음이 편안했다. 안전을 보장해주는 공간의 힘을 비엔나에서 다시금 깨닫는다.
반드시 즐거워지는 행복
나라와 나라를 이동하고 나면 벌써 오후가 된다. 배낭을 풀고 짐 정리를 하며 창밖을 본다. 노른자 같은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 관광지 가기엔 너무 늦고 눕기에는 이른 시간. 그럴 때면 동네 산책을 하거나 가까운 슈퍼마켓에 간다. 자동문이 열리고 그곳에 들어서면 본질은 같지만 형태가 다른 음식들이 넘쳐나 눈이 바빠진다. 작은 슈퍼에는 여러 종류의 초코우유와 감자칩과 요플레가 있다. 브랜드도 다양해서 마치 먹거리 컬렉션을 보는 기분이다. 새로운 음식에 둘러싸여 있으면 오직 감으로만 고르게 되는데, 순전히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불확실함이 주는 떨림을 느낀다. 개봉해서 맛보기까지의 설렘을 봉다리에 담아 달랑달랑 들고 온다.
나는 문득, 불확실함과 설렘의 경계 사이를 드나드는 일이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봉다리에 든 사랑은 꼭 맛있었으면 좋겠다고, 확실한 사랑이길 바란다고 말이다.
만약 둘 중 누군가의 강요로 고른 품목이 맛없다면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결론은 '먹어봐서 안 거야'로 마무리되는 하루. 우리는 자주 그곳에 간다. 반드시 즐거워지는 행복이 있기 때문에.
여한 없는 죽음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으면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가 거닐던 정원을 작게 만드는 개나리색 궁전도 보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이며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쇤브룬 궁전. 베르사유 궁전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으로 꼽힌 곳에 있다.
입장권을 끊고 안에 들어서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모차르트가 연주한 거울의 방, 나폴레옹의 방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1441개 방 중 45개 방만 볼 수 있는데, 방 하나가 우리 집보다 커 보였다. 그 안에서 화려하고 반짝이지 않는 것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 시대 이곳에서 살았을 사람을 상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과거로 시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길게 연결된 방을 보면서 언니에게 말했다.
"여기 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까?"
큰 곳에 적응 안 된 언니가 대답했다.
"글쎄, 너무 크지 않아?"
몇 걸음을 옮기자 문득 생각에 빠졌다. 죽음 앞에 여한이 없으려면 얼마만큼 만족이 필요할까? 과연 죽음에 여한이 없을 수 있을까. 이렇게 큰 호사를 누리다 모든 걸 두고 떠나야 한다면 편히 죽을 수는 있을까? 하지만 적게 가진 나도 죽음 앞에서 편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채로 궁전을 빠져나왔다.
'아직' 건강한 것,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 너무 당연하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들.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 지금은 소소해 보이지만 사실 아주 큰 행복들.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쉽게 무뎌지는 것들.
당연하게 여겼다면, 궁전에 살던 사람을 아직도 부러워만 했을 것이다. 많이 가졌다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건 아니란 걸 이제는 안다. 궁전에 살던 사람도 나도, 끝이 보이는 행복을 손에 쥔 채 살아간다. 지금 행복이 언제까지나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이 주는 소중함을 느끼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궁전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어
비엔나 시내 쪽을 걷다 보면 합스부르크 겨울 궁전이 나온다. 여름 궁전에 이어 겨울 궁전이라니 계절별로 궁전을 갖는 그들이 놀라웠다. 하지만 왕궁이 완공될 때쯤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했고, 겨울 궁전에 실제로 살지 못했다고 한다. 여름궁전에 머물던 그들은 겨울 궁전을 기대하며 살았을 텐데, 정작 발 한 번 디뎌보지 못할 것을 알았을까.
몰랐을 때는 그저 웅장하게만 보였던 이곳에도 많은 사연과 시간이 녹아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왕궁을 보다가, 문득 어떤 말이든 쉽게 무색해지는 단어가 바로 '영원히'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게 떠올랐다. 그럼 너를 '영원히' 사랑할게 보다 '죽기 직전까지' 사랑할게 가 더 와닿으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말이다. 왠지 그 말에는 지금 마음이 꾹꾹 눌러 담겨있는 듯 하다.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넘치도록 꽉 차있다고, 절대 변치 않을거라는 다짐을 더 견고하게 해주는 것만 같다.
'영원함'이 사실은 영원할 수 없음을 알고 지금을 살아간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못 가진 것에 욕심부리지 않고 시기나 질투 따위는 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늙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런 할머니라면 영원히 살진 못해도 '잘 살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일의 행복을 지키며 살다보면 그런 모습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가까운 행복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곧 저녁밥 먹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배꼽시계는 밥시간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여행하면서 많이 걷다 보면 더욱 그렇다. 또 하나의 행복을 잡기 위해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작지만 큰 울림
식당 가는 길에 작은 공원을 만났다. 어디선가 멜로디가 들려왔고 걸음을 멈춘 내가 말했다.
"잠깐만, 이 소리 들려?"
"무슨 소리??"
둔한 언니를 이끌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무언가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손에 들린 것은 하프였다. 음악의 신 아폴론이 연주했다는 그 악기. 손이 줄을 스칠 때마다 곱고 부드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율을 따라 내 몸에도 전율이 흘렀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소리였다. 신들의 악기라고 불리는 것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프에 매료된 우리는 그대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만 계속 된다면 식사 시간이 늦어져도 상관없었다. 다시 그곳에 있다해도 우리는 똑같이 가던 길을 멈췄을 테니까.
두 세곡을 멋지게 연주한 그는 더 이상 줄을 튕기지 않았다. 해 질 녘 빛이 등 뒤로 쏟아져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을 실현하고 있는 듯 했다. 주변을 정리하는 그에게 '벌써 끝이라니 너무 아쉬워. 더 듣고 싶어 더 더!'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저녁밥을 먹으러 가는듯했다. 등에 내리쬐던 햇살은 어느새 무지갯빛으로 바뀌어 동전 몇 개가 든 바구니를 비추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쨍그랑, 무지개가 담긴 곳에 동전을 넣었다.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든 그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우리도 따라 웃었다.
여전히 감동받은 만큼 낼 수 없었지만 세 곡에 대한 작은 보답을 했다. 이날의 하프 연주라면 아마 훗날에도 감동받은 만큼 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려면 아주 많이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프 연주의 여운으로 황홀해진 귀를 만지며 우리도 저녁밥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대빵만한 슈니첼
저녁식사를 위해 미리 찾아둔 식당에 들어섰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을 판매하는 곳.
직원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에 앉은 후 망설임 없이 슈니첼과 꼬르돈 블루를 주문했다. 1905년부터 이어져온 이곳은 슈니첼이 대빵만 해서 유명하다고 했다. 꼬르돈 블루는 고기 안에 햄과 치즈를 넣은 요리라 더 끌렸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찬찬히 가게를 둘러봤다. 따뜻한 조명 속에서 식사하는 사람들. 그런데 아직 치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접시 위에 남겨진 많은 양의 슈니첼과 감자튀김도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언니가 물었다.
"저기 봐, 사람들이 다 남겼어. 맛이 없나??"
덩달아 걱정스러워진 나는 한때 확고히 믿었던 블로그 속 글들을 잠시 의심했다. 뒤숭숭해진 마음을 정리한 채 대답했다.
"저 사람들 입맛에 안 맞을 수 있지"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왜냐하면 많은 슈니첼 가게 중 이곳을 선택했고, 40유로(5만 원대)로 우리 기준, 저렴한 식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맛이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내가 고른 곳이었다. 언니는 교통을 담당한 대신 나에게 식당 결정권을 주었다. 만약 맛이 없다면 전적으로 내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 빈자리에 남은 음식이 시야에서 까끌거린 이유였다.
슈니첼과 꼬르돈 블루가 뜨거운 열기를 품은 채 테이블에 올랐다. 접시가 안 보일 정도로 넓게 펴진 슈니첼은 정말 대빵만 했다. 손바닥을 쫙 펴봐도 슈니첼을 가릴 수 없었다. 우리나라 돈까스와 비슷해 보였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소스가 따로 없다는 점이다. 상큼한 레몬 한 조각이 끝이었다. 슈니첼을 크게 잘라 레몬을 뿌려 보았다. 입에 들어가자 새콤한 맛이 혀 전체에 퍼지면서 침이 가득 고였다. 덕분에 고기가 부드럽게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절반쯤 먹을 때 목구멍이 퍽퍽해졌다. 레몬으로는 되지 않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입과 식도는 음식이 잘 안 넘어간다며 돈까스 소스를 절실하게 찾았다. 달짝지근한 소스에 찍어 먹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우리는 소스 없이 슈니첼 본연의 맛을 음미해 보기로 했다. 일부러 여러 번 꼭꼭 씹어보았다. 그럴수록 고소한 맛이 났지만 소스 없는 돈까스를 오래 씹는 기분도 들었다.
슈니첼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햄과 치즈가 들어간 꼬르돈 블루를 슥슥 썰었다. 좀 더 다채로운 맛일 거라 기대하며 반을 가르자 빈약한 단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언니와 나는 동시에 웃었다. 미리 찾아본 사진과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봤을 땐 분명 속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인터넷에 '김치'를 검색했을 때 배추 반포기로 된 사진이 이미지 페이지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을 여행하러 온 외국인이 식당에서 잘린 김치를 봤을 때 이런 느낌일까.
"아니 찾아봤을 땐 분명 배추 절반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할 수도 있겠다.
속이 꽉 찬 모습은 아니었지만, 햄과 치즈는 확실하게 들어있었다. 슈니첼보다 부드럽고 짭조름했다. 작지만 맛있어서 순식간에 사라졌고 테이블 위엔 깨끗한 빈 접시만 남았다.
음 슈니첼~ 하면서 먹었지만 사실 우리나라 돈까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맛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110년간 이어져온 역사와 전통이 음식에 담겨 있었고, 우리는 세월을 먹은 셈이다. 만약 이 가게가 계속 운영된다면 훗날 200년 된 맛집으로 소개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가 되고 미래의 사람들이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슈니첼을 먹을 것이다. 그들이 떠올릴 역사의 한순간이 지금이라는 생각에 가게를 찬찬히 둘러봤다. 기분이 묘해졌다. 지나간 과거가 그렇듯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역사임을 되새기며 계산서 위에 지폐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