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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호 Oct 02. 2022

미리 잘라낸 불행

비엔나

미리 잘라낸 불행


새로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형태가 다른 이동수단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자전거와 자동차가 동시에 신호 대기하는 상황은 한국에서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신선하게 바라봤다. 매끈한 아스팔트로 된 자전거도로를 보며 우리도 한 번 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언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단호박을 삼킨 언니가 말했다.
"자전거 안 탄지 오래됐잖아. 여기서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는 바로 순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우려고 한 행동이 언제나 즐겁게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타국에서 사고가 난다면 경찰서나 응급실에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둘 다 원하지 않아서 느슨하게 풀려있던 정신을 꽉 조였다.

자전거가 우리 뒤로 멀어지는 것을 보며 일어날 수도 안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을 미리 잘라낸 것 같았다. 물론 해서 좋았을 수도 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어설픈 운전 실력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을 때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함을 되새기며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행복의 다른 말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걷는 것 또한 여행의 일부가 된다. 걸으면서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새로워서일까. 이 날은 그물망 너머로 신나게 달리는 강아지들에게 시선이 닿았다. 여럿이서 뛰놀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표지판에는 hunde zone이라고 쓰여있었는데, 훈데(hunde)는 강아지라는 뜻으로 반려견 놀이터를 의미했다. 강아지들이 '목줄 없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유일하고 안전한 공간인 셈이다.

비엔나에서는 이런 공간이 자주 보였고, 마을 곳곳에 크고 작은 훈데 존이 있었다. 반려동물만을 위한 시설이 비중 있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강아지를 여럿 보았다. 그럴 때면 어느새 광대가 솟아 있곤 했다.

"와 저 강아지들 정말 행복해 보인다 자유로워 보여."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 한마디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유는 행복의 다른 말 아닐까. 자유와 행복은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여행도 자유가 준 행복이니까. 배낭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내가 언니에게 자주 했던 말은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서 살자"였다. 이제 그 말은 "행복하게 살자"로 들린다.


낭만이 채워진 여행

언니와 여행에서는 로맨스가 빠져있지만, 종종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채워지기도 한다. 사랑과 낭만으로 물든 바람이 잔디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지던 순간. 잔디밭에 누워 애정 표현하는 연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옷에 초록색 풀물이 들지 않을까, 혹시 쯔쯔가무시가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행위다. 걱정 많은 우리는 아마 평생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언니와 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유로움과 사랑이 버무려진 모습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보듯 계속 쳐다볼 수 없었다. 보고 있는 것을 들키면 그들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사실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괜히 실눈을 뜬 채로 힐끔힐끔 보았다.


선선한 바람에 찬기가 섞일 무렵,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언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잔디밭 위는 여전히 사랑과 낭만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루의 끝에서 우리는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집으로 향할 무렵, 우리는 호스텔로 돌아간다. 개운하게 씻고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며 농축된 신음을 토해낸다. 걷기 어플에 30000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다. 온몸을 감싸주는 이불, 삐걱거리지만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눈이 잠깐 감기게 된다. 곧바로 눈을 떴지만, 해가 뜬 창 밖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경험은 이미 한 번 겪었기 때문에 배게에 머리 대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벽에 기대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침대 머리맡에 설치된 스탠드를 서둘러 켰다. 딸각-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빛났다. 침대 속 두 번째 여행이 시작된 시간.

오늘 지출한 가계부 작성, 내일 일정 정리가 끝나면 비로소 일기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여행에서 일기 쓰는 횟수가 늘 수록 쉽지 않다고 느낀다. 일명 '뽕을 뽑는 여행자' 라면 더욱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하루 3만보를 걷고도 쓸 수 있는 체력. 잠자는 시간이 줄어도 쓸 수 있는 체력.

여행에서 하루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 계속해서 걷고 먹고 보는 광경 속에서 새로움에 자주 노출되기 때문이다. 같은 하루인데 평소보다 두 배 더 산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야기를 보따리 속에 넣을 수 있다면 하루 만에 넘쳐날 것이다. 거대하고 비대한 하루치 여행을 그날 다 적어내기 버거운 때도 있다. 그러면 펜으로 쓰다가 핸드폰으로 바꿔 쓰다가 결국엔 노트북으로 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두 손의 움직임'이었다. 모든 걸 토해내듯 한 줄 두 줄 적다 보면 가득 찼던 용량이 단 몇 mb로 바뀌어 단숨에 가벼워졌다. 과부하 된 머릿속이 단순해지는 경험은 늘 후련하다. 다시 새롭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마지막 문장 마침표를 찍고 비로소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따스한 시간에 푹 빠져든다. 그렇게 여행 끝에서 우린 매일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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