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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 호 Oct 12. 2022

절망을 다 쏟아내고 나면

할슈타트

절망을 다 쏟아내고 나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사람들은 판초 우의를 입거나 우산을 었다.


맑은 날 할슈타트를 보고 싶었다. '여긴 꼭 가야 해'라고 느꼈던 사진 속 모습은 모두 화창했기 때문이다. 배에서 바라본 호수 풍경은 흐리고 안개가 잔뜩 껴 있었다. 기온이 뚝 떨어져 으슬으슬 춥기도 했다. "비가 오긴 하지만 나름대로 운치 있지 않아?" 언니는 덤덤히 말했다.


기대한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한숨이 푹 나왔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곳을 우중충하게 지내야 하는 사실이 절망스러워서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정적으로 뿌리내린 생각은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었지만 썩은 열매에 닿을 뿐. 이대로라면 할슈타트에서 보내는 시간을 완전히 망치겠구나, 직감했다.


절망 끝에서 나는 마음을 재정비해 보기로 했다. 날씨는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가짐을 바꿔보기로. 비 오는 날의 할슈타트도 기쁘게  즐겨보기로. 상황은 변하지 않지만 나의 태도는 변할 수 있으니까. 생각을 바꾸니 우울했던 마음이 차츰 밝아졌다. 동태 눈깔에는 생기가 더해지고 아래로 쳐져 있던 입꼬리는 제자리를 찾았다. 경직된 이전보다 훨씬 편하고 가벼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마음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 비 오는 날 할슈타트도 경험해 보는 거지. 어떻게 매일 좋은 날만 있겠어. 맑은 날이 정답은 아니니까" 내 말을 듣고 언니는 피식 웃었다. 이미 그 과정을 거친 사람의 웃음이었다.


다 쏟아내고 나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힘이 생기길 바랐다. 거름망으로 걸러낸 찌꺼기는 휴지통에 버리고, 마음 필터로 정화된 깨끗한 희망만 마시는 상상을 하면서. 비 내리는 할슈타트는 어떤 모습일지, 비가 와서 공기가 얼마나 맑을지 생각하며 눈처럼 하얀 설렘을 끼워 넣었다. 이젠 비가 와도 이 시절에 내리는 운치라고 생각하며 우산을 펼친다.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여행하는 동안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쓸 일 없던 우산은 짐으로 취급되어 배낭 깊숙이 박혀있었는데, 처음으로 꺼낼 때가 온 것이다. 밭을 갈듯, 배낭을 엎은 후에야 우산을 꺼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배낭여행의 숙명이라 불렀다.


무엇이든 지속되면 쉽게 익숙해지고 당연해진다. 사람이든 날씨든 물건이든. 우리에겐 쨍한 날씨가 그랬다. 처음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서야 화창한 날씨가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동안 너무 당연해서 몰랐던 행복. 맑은 날씨가 주는 기쁨과 행복을 잃고 나서야 짙은 그리움을 마주했다. 날씨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내게 있을 때 그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레인 코트라 불리는 우비를 입고 빗속에서 유유히 걷는 모습을 따라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리 멋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데기로 웨이브를 한껏 넣은 머리카락은 축 늘어지고, 이것저것 찍어 바른 얼굴에서 베이지색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일은 여행자로서 피하고 싶은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를 이동할 때 비가 오면 우리는 그 모습이 되었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워도 어깨끈 사이로 빗물이 들어간다면 배낭 내부가 흥건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마른 옷과 전자기기를 지키기 위해 이동하는 날 만큼은 머리카락과 얼굴보다 그 사이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우산을 뒤로 젖혀서 써야만 했다. 전 재산을 지켜야 하는 일엔 사명감이 생긴다.


바람에 흔들리는 3단 우산을 두 손에 꼭 쥐고 예약해둔 숙소를 향해 걸었다. 차가운 바람에 입술이 파랗게 변할 때쯤, 호스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나무문을 지체 없이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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