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맑음을 알려준 베네치아의 둘째 날. 태양빛 아래서는 각자가 지닌 색을 짙게 드러냈다. 바다는 파란색으로, 벽돌은 주황색으로. 흐린 날보다 한 톤 밝아진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파스텔로 그린 그림 같아서 나는 조금 더 오래도록 바라봤다. 마치 시간을 품은 색이 온 도시를 뽐내는 듯했다.
수상버스를 타고 부라노 섬에 내리면 알록달록한 집과 마주하게 된다. 저마다 뚜렷한 색을 가졌지만 하나의 작품처럼 조화로웠다. 강한 개성을 띄는 이곳도 원하는 색을 칠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서로 중복되지 않는 합의가 깃든 셈이다. 자기 빛을 뽐내면서도 다른 색을 훼손하지 않는 배려가 이 섬에는 있었고, 덕분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알록달록한 건물 사이를 찬찬히 걸을 수 있었다.
진하게 우러난 마음
언니는 유독 "여기 서 볼래?"라는 말을 자주 했다. 배가 어수선하게 정박한 곳에서, 그늘진 벽 앞에서.
언니: 여기서 찍어줄게, 서봐 나: 여긴 배경이 좀 별론데.. 언니: 예쁘니까 일단 찍어봐! 나: ... (브이)
런던에서 5유로 주고 산 선글라스는 자외선 차단이 전혀 되지 않았지만, 유럽의 강한 햇빛을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다.선택 아닌 필수가 된선글라스를 쓴 채로 찍는 사진은 어울리지 않아서 더 불편했지만 순간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매번 카메라 앞에 섰다. 그래서 나는 불평만을 늘어놓았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선글라스와 사진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언니의 시선으로 관심이 향한다. 카메라를 꺼내는 일은 상대를 위한 마음이 진하게 우러나야만 가능하단 것을,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생을 담아주고 싶었던 농축된 뜻을 이제는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을 남겨주고 싶은 마음 하나 때문에 귀찮아서 쉽게 넘길 수 있는 순간을 끝끝내 붙잡는 부지런함.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행위들. 여기 서보라는 말속에 담긴 언니의 애정이 사진에고스란히 스며있다.
겉은 강하지만 속이 여린 사람의 분위기가 언니에게서 풍긴다. 첫째라는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면서도 유독 잔정이 많은 탓에 울음 여러 개를 품고 살지만,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사랑을 배운다.
배경도 선글라스도 별로라고 뾰족한 말을 쉽게 했던 나는 이제는 그때를 남겨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지나고 보면 어리고 예쁘기만 한 시절인데 왜 그땐 모를까. 젊음은 유독 쥐고 있을 때 잘 모르는 것 같다. 가졌을 때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인생 중 가장 젊은 날이라고, 아직 너무 젊다고 되새긴다. 앞자리가 바뀌어도 계속 이런 다짐을 멈추지 말아야지. 우리는 언제 태어났건 가장 젊은 하루를 살고 있지 않나. 오늘도 내 옆에 있는, 하지만 영원하지 않을 언니의 작은 귀를 잡아다가 늘리면서 고맙다는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사랑과 닮은 노을
해가 질 무렵은 언제나 따뜻한 온기로 물든다. 어떤 날은 주황색으로, 어떤 날은 핑크색으로 물드는 하늘.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엿본 것만 같다.
노을을 보며 사랑이 떠오른 이유는 뭘까. 노을을 향한 마음이 사랑과 닮아서일까. 해지는 순간을 잠시라도 놓칠세라 숨죽이고 보듯이, 놓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만나면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사랑하면 작은 부분조차 놓치고 싶지 않겠구나'
사랑 아닌 것들이 묻어나는 삶에서 지켜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건 사실 큰 행운이란 걸, 사랑하면 알게 되지만 가끔은 사랑하고 있지 않아서 더 크게 와닿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일 거라고, 어려우면서도 소중할 거라고 베니스의 노을을 보며 앞으로 생길 사랑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