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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Jan 18. 2024

택배가 사라졌다


이제 교보문고도 당일 새벽배송이 된다.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많아서 요즘엔 꼭 읽고 싶은 책이나 사야 할 책만 산다. 몇 십 권의 책이 장바구니에 담겨 있다. 매일 교보문고 앱을 들여다보며 구매 충동을 누른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장바구니에 담긴 결제금액도 늘어났다. 나는 예전부터 그랬다. 우연히 어떤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이 너무 좋으면 그 가수의 전 앨범을 다 듣는다. 내가 놓친 좋은 음악이 어딘가 숨어 있을까 봐 보물찾기 하듯이 샅샅이 뒤져본다. 그런 경향이 작가에게서도 솔솔 생긴 것 같다.


참고 참다가 책 열여덟 권을 주문했다. 학우님들의 리뷰를 읽고 교수님들의 인스타를 보고 하나씩 담아둔 책을 한꺼번에 결제한 것이다. 열두 권은 주문한 다음 날 새벽 3시에 도착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여섯 권은 상품 준비 중이라고 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여니 택배가 없다.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사진을 보니 아래층에 놓고 가셨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택배가 없다. 택배가 사라졌다.


아래층을 내려와 빌라 입구와 주차장 앞 뒤를 아무리 살펴봐도 택배가 없다. 잠시 우리 집 건물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사는 빌라는 호수가 이상하다. 나는 101호에 사는데 거의 3층 높이의 2층이다. 이사해서 가구나 가전제품을 살 때도 배송비 결제가 무척 애매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101호. 대부분 배송비는 3층부터 금액이 추가되었다. 나는 가구가 올 때마다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고 101호 라더니 완전히 속아부렀네. 허허허. 뭐여, 계단이 또 있어?"

"힘드시죠,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뭐라도 도와드리려고 옆에서 종종거리고 있는데 기사님이 "내가 이래 봬도 기술자여" 하시면서 나더러 비키라고 하셨다. 계단에 낡은 담요를 촥 펼치시고는 가구를 옮기셨다. 감사해서 추가 배송료를 드리려고 했는데 "기본 배송료만 줘어~" 하시며 넉넉한 웃음 지으시고 돌아가셨다. 따라나가서 음료수를 드렸다.


아무튼 우리 집 빌라는 현관 입구까지 계단 반층, 계단 반층을 올라오면 세대별 우체통이 있고 거기서 계단 반층을 올라가면 01호 02호 03호가 있다. 건축물대장 상으로는 지층이지만 1.5층 높이다. 그래서 01호 를 101호로 착각하기 쉽다. 거기서 한 층을 올라가야 내가 사는 101호가 있는데. 설명하기에도 복잡한 101호에 사는 나는 배달음식을 시킬 때 아래층에서 찾아온 적이 많다. 하지만 택배는 두세 번을 제외하곤 제대로 왔다. 하지만 그 두세 번 때문에 무거운 택배를 시킬 때마다 걱정한다. 아래층에 놓고 가면 어떻게 들고 오지 하고. 게다가 01호 아주머니는 고약한 분이다.


01호 아주머니와는 이사 때부터 껄끄러웠다. 이사 후 첫여름, 에어컨을 트니 고장 나 있었다. 집주인과 여러 차례 다투면서(사실 다툰 게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여름은 점점 더워지고 폭염과 열대야로 집에서 더위 먹고 몸이 아팠다. 결국 내가 에어컨을 구매하겠다고 하고 마무리했다. 그 과정에서 부동산 사장님께서 "마음 착한 아가씨가 참으세요. 그 집주인이 성격이 예민하고 좀 이상해요"라고 하셨는데 지나고 나니 부동산 사장님께도 내가 당한 것 같다.


고장 난 에어컨인 줄도 모르고 그 에어컨에 나간 돈만 해도 20만 원이었다. 청소업체 불러서 에어컨 청소 하고,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아 AS 불러서 실외기 부품 교체하고, 출장비와 철거비 등등. 아무튼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에어컨을 설치하는 날 복병이 또 등장한 것이다. 01호 아주머니였다.


실외기를 설치하려고 하는데 01호 아주머니가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버젓이 우리 집 베란다 앞에 실외기 거치대가 있는데도 설치를 못하게 했다. 이유는 그전에 살던 사람들이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서 실외기가 돌아갈 때마다 창문이 흔들리고 시끄럽고 더웠다고 했다. 그런데 01호 아주머니 집 베란다 앞에는 우리 집 보다 두 배나 큰 실외기가 있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또 어찌나 화를 내시는지 에어컨 설치기사님도 진짜 너무 하시네, 하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몇몇 이웃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 나왔다.


지쳤고 빨리 끝내고 싶었다. 설치비 11만 원을 더 주고 건물을 빙- 둘러서 건물 외벽에 덩그러니 실외기를 설치했다. 억울하고 어이없고 너무 화가 났지만 기사님도 기다리고 계셔서 어쩔 수 없었다. 이사 비용에 불필요한 지출 130만 원이 추가되었다.


직장생활에 밤에 운동까지 하고 집에 오는 나는 주말 아니고선 에어컨 틀 일이 거의 없어서 에어컨을 틀 때마다 01호 아주머니가 생각나서 속상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맨날 당하는 것만 같아서. 이런 나 스스로가 싫었다. 나는 왜 이럴까. 왜 싸울 때도 남의 기분 생각하며 싸우는 걸까. 아무리 마음먹어도 마음 약한 건 엄마 아빠 다 닮아서 고쳐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깊고도 유쾌하지 못한 사연이 있는 01호 앞에 있던 내 택배. 신나게, 행복하게 주문했던 내 책 열두 권.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교보문고상품권 10만 원으로 고르고 골라 담은 책이 통째로 사라졌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긴. 완전 왕도둑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갔을 때 택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자기 택배인 줄 알고 잠시 실수로 들고 들어간 거였으면. 그래서 다시 밖에 내놓았으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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