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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by 좋으니


사랑한다는 말보단 좋아한다는 말이 오히려 더 사랑의 표현인 것 같다고 느껴진 이후로는 섣불리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게 싫었고 누군가 사랑한다고 하면 나를 얼마나 안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걸까.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로 와닿기보단 인사치레 정도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 자리에 좋아한다는 말을 썼다. 아직 사랑까진 아닌 것 같으니까. 그 사람도 그걸 알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엔 민망하고 멋쩍은 그런 거부감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싫은데도 좋은 척은 잘만 하면서 이건 또 무슨 모순인가 싶은 것이 사람 마음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또 있을까.


한때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가족한테만 빼고 그랬다. 나는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면 그 좋은 점을 최선을 다해 칭찬하는 사람이다. 이 역시 가족한테만 빼고 그랬다. 가족이니까. 가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란 걸 기본값으로 깔고 있으니까.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었는데,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다가 죽을 때까지 표현 못 하겠다. 이래선 안 되지. 친구들한테는 잘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정작 가족에겐 안 하다니. 출근하다가 지금 당장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삐 걷다 멈춰 서서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대뜸 사랑한다고 말했다. 엄마, 아빠에게 처음으로 말로 사랑한다고 전했던 날이다. 그때 엄마, 아빠는 처음 사랑을 고백받은 사람처럼 "나도" 하고 수줍게 웃으셨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여태껏 나는 사랑과 좋아함을 "상대가 죽거나 큰 병에 걸렸다고 상상했을 때 내 감정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울까"를 기준으로 두곤 했었다. 그 기준으로 두면 가족 외엔 사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아프고, 안타깝고, 슬프긴 해도 고통까지는 감정이 미치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나는 나 스스로 사랑이 부족하고 냉정하고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차갑다거나 새침하다는 소리도 왕왕 들었던 터라 나는 타인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지냈다.


어느 날 이런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준 대화를 하게 됐는데 그 대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밥 먹다가 갑자기 왜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짧게 스치듯 지나간 대화에 사랑과 좋아함의 개념이 좀 더 선명하게 정리되었다.


고양이는 쥐를 사랑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위주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방 위주이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저 말을 듣는 순간 생각이 정리되었다. 좋아하는 것은 내가 유익해야 하고 내가 흥미 있어야 하고 내 취향이고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 싫어지면 안 좋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랑은 다르다. 상대방의 허물까지 다 용납하겠다는 말이다. 내게 유익이 없어도 내 취향이 아니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 그게 사랑이다.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꽤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고 좋아하긴 해도 아직 사랑까진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선을 그은 상대에게도 기꺼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조금 홀가분했다. 내 기준으로는 설명 안 됐던 내 감정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할 만큼은 아니었던 사람에게 쏟은 여러 감정과 마음들이 스스로 설명이 안 됐기 때문이다. 내가 가증스러운 건지 나조차도 나를 도저히 모르겠다고 여긴 감정들이 한순간에 이해된 것이다.


영화 러브 액츄어리에서 템스강 벤치에 앉은 부자의 대화를 떠올린다. 아내를 잃은 남자와 엄마를 잃은 아들. 상실감에 빠진 아들이 걱정되어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 상실감이 엄마를 잃은 슬픔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슬픔인 것을 알게 되자 아빠는 다행이라고, 더 큰 고통일까 염려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들의 대답. "사랑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어요?"


어린아이들에게도 사랑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건가 보다. 사랑은 어렵다. 고통스럽다. 싫은 것까지도 감당해야만 하니까. 그럼 나 글쓰기도 사랑하고 있는 건가. 하, 정말 쓰기 싫어 죽겠는데 쓰는 게 좋고 좋다고 말하기엔 뭔가 얘만 생각하면 가슴이 턱턱 막혀오는데 도대체 얘의 매력은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걸까. 아, 결론이 왜 이렇게 흘러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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